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라씨로
KYD 디데이
중국 마켓·금융

속보

더보기

다섯번 얼굴 바꾼 위안화, 70돌 맞은 G2 중국 화폐 RMB의 어제와 오늘

기사입력 : 2018년12월18일 16:54

최종수정 : 2018년12월18일 17:08

달러패권에 도전하는 위안화 70년 발전상

[서울=뉴스핌] 이미래 기자 = 달러패권과 충돌하며 미국과 무역전쟁중인 G2 중국의 통화 위안화가 발행된 지 70주년을 맞았다. 지난 1948년 첫 발행된 위안화는 총 다섯 차레 변화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위안화의 공식명칭은 런민비(人民幣)다. 국제표준기구에는 CNY(ChiNaYuan)라고 명시돼 있지만 국제시장에서는 RMB(RenMinBi)로 통용된다. 말 그대로 ‘인민의 돈’이라는 뜻이다. ‘인민의 돈’이라는 이름의 뜻대로 위안화는 당시 경제와 문화 사회를 담고 있었다. 모두 다섯번에 걸쳐 얼굴을 바꾼 위안화의 70년 발자취를 짚어본다.

1948년 첫 발행된 첫 번째 위안화 [사진=바이두]

1948년 12월 1일은 중국 화폐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다. 당시 몇몇 은행 통합으로 출범한 런민(人民, 인민)은행이 첫 위안화 지폐를 발행한 것.

합병 후 허베이(河北) 스자좡(石家庄)에 처음 설립된 인민은행 [사진=바이두]

인민은행은 과거 화베이(華北)은행 베이하이(北海)은행 시베이(西北)눙예(農業)은행 등 세 곳의 은행이 통합돼 설립된 은행이다. 신중국 설립의 해인 1949년부터 1978년까지 약 30년간 중국의 유일한 은행으로 중앙은행이자 상업은행의 역할을 모두 담당했다.

당시 발행된 첫 위안화는 1위안(元) 5위안 10위안 20위안 50위안 100위안 200위안 500위안 1000위안 5000위안 10000위안 50000위안 등 12종류가 있었다. 도안 종류에 따라 총 62종류로 분류됐다.

첫 번째 위안화 도안 [사진=바이두]

첫 위안화는 당시 시대적 배경을 반영, 대부분 농업 생산 노동 등 모습을 담았다. 화폐에는 토지를 갈고 베를 짜는 농민의 모습은 물론 창청(長城, 만리장성) 신화먼(新華門) 등 명소가 등장한다.

런민왕(人民網)에 따르면 첫 위안화 디자인 당시 중국 내 마오쩌둥(毛澤東) 추종자들이 그의 얼굴을 화폐에 넣으려 했지만 본인이 한사코 거부했다고 한다. 당시 마오쩌둥은 “런민비는 국가의 것”이라며 “자신은 당의 주석일 뿐, 정부 주석이 아니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를 거절했다.

중국 첫 위안화는 발행된 지 7년 만인 1955년 5월 10일 유통을 중단했다. 유통 기간이 1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1949년 신중국이 출범도 하기 전에 화폐가 먼저 통합된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955년 첫 발행된 두 번째 위안화 [사진=바이두]

두 번째 위안화는 1955년 3월 1일 발행됐다. 당시 중국은 전국적으로 통화체제를 통일∙확립시키던 시기다. 이때의 위안화는 온전한 화폐 시스템하에 발행된 첫 위안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인민은행은 당시 첫 위안화의 액면 단위(가장 큰 화폐단위 50000위안)가 너무 크다고 판단, 전체적으로 액면가 단위를 낮췄다.

이때 위안화는 1펀(分) 2펀 5펀 1자오(角) 2자오 5자오 1위안 2위안 3위안 5위안 10위안 등 11종류의 종이지폐와 1펀 2펀 5펀 등 3종류의 동전으로 발행됐다. 편의성 확대를 위해 기획된 동전은 1957년 12월 1일부터 발행됐다. 단위 구성은 1위안=10자오=100펀이다.

두 번째 위안화 도안 [사진=바이두]

화폐 도안은 단위별로 각기 다른 주제로 디자인됐다. 펀 단위 지폐는 공업과 교통을 주제로, 지아오 지폐는 농업 기계화를 주제로 디자인됐다. 1 2 3위안 지폐에는 각각 신중국설립 및 공산당 혁명과 관련 있는 천안문(天安門) 옌안(延安) 바오타산(寶塔山) 징강산(井岡山)룽 위안커우스차오(龍源口石橋)가 등장한다.

당시 인민은행은 위안 지폐 디자인에 마오쩌둥의 얼굴을 넣었다. 5위안에는 소수민족들이 마오쩌둥 초상화를 받들고 있는 장면이 디자인됐고 1위안 도안 속 천안문 망루 위에는 마오쩌둥 이미지가 들어갔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반대로 그의 초상화 이미지는 모두 빠졌다. 지폐는 결국 마오쩌둥의 개인 우상화 대신 당시 정책을 홍보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해당 위안화는 2007년 4월 1일부터 유통이 중단됐으나 당시 동전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1962년 첫 발행된 세 번째 위안화 [사진=바이두]

세 번째 위안화는 1962년 4월 20일 발행돼 2000년 7월 1일 까지 사용됐다. 총 38년 동안 유통돼 가장 오랜 시간 사용된 위안화로 평가된다. 가장 오래 사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앞서 발행된 화폐들보다 인쇄술이 좋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위안화는 1자오 2자오 5자오 1위안 2위안 5위안 10위안 등 총 7종류의 종이지폐로 구성됐다. 1980년 4월 15일 1자오 2자오 5자오 1위안 동전도 발행됐다. 이 단계에서 액면가 3위안 종이지폐가 사라졌다.

세 번째 위안화 도안 [사진=바이두]

디자인은 주로 농업 경공업 등을 상징하는 도안으로 꾸며졌다. 앞면 기준, 2자오에 디자인된 우한(武漢)의 장강대교(長江大橋)를 비롯해 모두 산업을 나타내는 디자인이다.

1987년 첫 발행된 네 번째 위안화 [사진=바이두]

네 번째 위안화는 1987년 4월 27일 발행됐다. 1998년 9월 22일 발행은 중단됐으나 지금까지도 일부 통용이 되고 있다.

해당 화폐는 1978년 개혁개방을 선언한 공산당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이후 국무원의 명령에 따라 발행된 것이다. 때문에 중국 개혁∙개방을 상징하는 도안으로 디자인됐다.

네 번째 위안화 도안 [사진=바이두]

이 당시 위안화 문양은 창청 징강산 등 중국 명소와 위주르족(維吾爾族) 장족(藏族, 티베트족) 만족(滿族) 등 소수민족의 이미지로 채워졌다.

특히 100위안에는 마오쩌둥을 포함한 저우언라이(周恩來) 류사오치(劉少奇) 주더(朱德) 등 공산당 주요 지도층의 얼굴이 등장했다. 첫 번째 위안화 시기부터 언급되던 마오쩌둥이 드디어 화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단위는 1자오 2자오 5자오 1위안 2위안 5위안 10위안 50위안 100위안 등 지폐와, 1자오 5자오 1위안 등 동전으로 분류된다. 경제의 고속성장에 따라 앞서 발행된 화폐 대비 액면가 50위안 100위안 지폐 발행량을 대폭 늘렸다.

1999년 첫 발행된 다섯 번째 위안화 [사진=바이두]

현재 사용되고 있는 다섯 번째 위안화는 1999년 10월 1일 발행됐다. 중국 건국 50주년인 1999년 국무원의 명령으로 발행된 디자인으로 1999년 버전과 2005년 버전으로 나뉜다.

인민은행은 당시 ▲사용 기간이 길어지면서 홀로그램이 약해진 것 ▲인쇄술 발달로 위조지폐가 제조 및 유통된 것 ▲ATM 등 이용이 용이하지 않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새로운 화폐를 디자인했다.

다섯 번째 위안화 도안 [사진=바이두]

해당 화폐의 특징은 1위안부터 100위안까지 6종 지폐 앞면에 마오쩌둥의 얼굴이 실렸다는 것이다. 때문에 위안화는 마오화폐(毛币)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국가 통합을 지속시키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뒷면은 ▲1 위안 항저우(杭州)의 시후(西湖, 서호) ▲5위안 타이산(泰山, 태산) ▲10위안 창장 싼샤(長江三峽, 장강삼협) ▲20위안 구이린(桂林)의 산수(山水)풍경 ▲50위안 라싸(拉薩)의 부다라궁(布達拉宮, 포탈라궁전) ▲100위안 베이징(北京)의 인민대회당(人民大會堂)으로 디자인됐다.

액면가 단위는 1자오 5자오 1위안 5위안 10위안 20위안 50위안 100위안 등 8종류다.

 

leemr@newspim.com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한덕수, 대선 출마 여부에 "노코멘트" [서울=뉴스핌] 이나영 기자=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는 미국의 관세 부과 조치에 대해 "맞대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 대행은 20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양측이 모두 윈-윈(win-win)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한국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드는 데는 미국의 역할이 매우 컸다"며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원조, 기술이전, 투자, 안전 보장을 제공했다. 이는 한국을 외국인에게 매우 편안한 투자 환경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 대행은 미국과의 통상 협상에서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 축소 방안을 논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뉴스핌] 이길동 기자 =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 2025.03.24.gdlee@newspim.com 한 대행은 "협상에서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와 상업용 항공기 구매 등을 포함해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기 위한 방안을 논의할 수 있다"며 "조선업 협력 증진도 미국이 동맹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FT는 "비관세 장벽을 낮추는 방안도 논의될 수 있다"고 한 대행이 언급했다고 전했다. 한 대행은 협상 과정에서 "일부 산업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면서도, 양국 간 무역의 자유가 확대되면 "한국인의 이익도 증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FT는 방위비 분담금 재협상 여부에 대해서는 사안에 따라 재협상에 나설 수 있음을 시사했다고 전했다. 한편, 한 대행은 6·3 대통령선거 출마 여부에 대해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며 "노코멘트"라고 답했다. nylee54@newspim.com 2025-04-20 13:43
사진
호미들 중국 한한령 어떻게 뚫었나 [베이징=뉴스핌] 조용성 특파원 = 중국의 '한한령'(限韓令, 중국의 한류 제한령)이 해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나라 가수가 중국에서 공연을 한 사실이 알려지며 그 배경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18일 베이징 현지 업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3인조 래퍼 '호미들'이 지난 12일 중국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시에서 공연을 펼쳤다. 반응은 상당히 뜨거웠다. 중국인 관객들은 공연장에서 호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음악에 맞춰 분위기를 만끽했다. 공연장 영상은 중국의 SNS에서도 퍼져나가며 관심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국적 가수의 공연은 중국에서 8년 동안 성사되지 못했다.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BTS도 중국 무대에 서지 못했다. 때문에 호미들의 공연이 중국 한한령 해제의 신호탄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호미들 공연이 성사된 데 대해 중국 베이징 현지 문화콘텐츠 업계 관계자들은 공연이 소규모였다는 점과 공연이 성사된 도시가 우한이었다는 두 가지 요인을 지목했다. 호미들이 공연한 우한의 우한칸젠잔옌중신(武漢看見展演中心)은 소규모 공연장이다. 호미들의 공연에도 약 600여 명의 관객이 입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에서 800명 이하 공연장에서의 공연은 정식 문화공연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된다. 중국에서는 공연 규모와 파급력에 따라 성(省) 지방정부 혹은 시정부가 공연을 허가한다. 지방정부가 허가 여부를 판단하지 못할 경우 중앙정부에 허가 판단을 요청한다. 한한령 상황에서 우리나라 가수의 문화공연은 사실상 금지된 상황이었다. 호미들의 공연은 '마니하숴러(馬尼哈梭樂)'라는 이름의 중국 공연기획사가 준비했다. 이 기획사는 공연허가가 아닌 청년교류 허가를 받아서 공연을 성사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우한시의 개방적인 분위기도 공연 성사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한에는 대학이 밀집해 있으며 청년 인구 비중이 높다. 때문에 우한에는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높다. 게다가 젊은 층이 많은 만큼 우한에서는 실험적인 정책이 시행되어 왔다. 우한시는 중국에서는 최초로 시 전역에서 무인택시를 운영하게끔 허가하기도 했다.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파격적인 정책이 발표되는 우한인 만큼, 한한령 상황임에도 호미들의 공연이 성사됐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베이징의 한 문화업체 관계자는 "우한시가 개방적이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호미들의 공연은 소극적인 홍보 활동만이 펼쳐지는 한계를 보였다"며 "공연기획사 역시 한한령 상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현지 문화콘텐츠 업체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한국의 최정상급 가수가 대규모 콘서트를 개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어서 빨리 한한령이 해제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한한령이 해제될 것이라는 시그널은 아직 중국 내에서 감지되고 있지 않다"고 언급했다. 호미들의 중국 우한 공연 모습 [사진=더우인 캡처] ys1744@newspim.com 2025-04-18 13:10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