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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랑 45주년 기념 '밤하늘의 별이 되어'...서양화 선구자 21명 치열한 삶 조망

기사입력 : 2023년04월03일 13:15

최종수정 : 2023년04월03일 13:16

4월 5일부터 5월 4일까지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1978년 설립된 예화랑(서울시 강남구 가로수길 73)이 창립 45주년을 맞아 기념전시 '밤하늘의 별이 되어'를 4월 5일부터 5월 4일까지 개최한다.

'밤하늘의 별이 되어'는 예화랑의 뿌리를 찾아가는 전시다. 이번 전시회의 화가 21명은 동양화가 주류였던 시기 이 땅에 서양화가 유입된 초기 시절 서양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우리의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로 승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일생을 살았던 선구자들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 해방과 6.25전쟁이라는 한국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 속에서 오늘의 대한민국 미술을 반석 위에 올려준 미술문화 건국의 주역들을 모시는 자리가 된다.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 자리에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예화랑은 연락이 닿는 유족들을 불러 선구자들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보면서 이들을 기리는 자리를 만들고자 했다.

이번 전시의 작가들은 오지호 구본웅 남관 임군홍 이인성 김환기 윤중식 최영림 김향안 유영국 손응성 장욱진 이준 임직순 이대원 홍종명 문신 권옥연 정규 천경자 변종하(생년월일 순) 21명이다.

예화랑 김방은 대표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당시를 살았던 분들의 예술에 대한 진정성, 순수함과 열정을 느끼며 새삼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작가에 대한 존경심, 예술에 대한 경외감을 다시 한번 새길 수 있었다. 힘들었지만 아름다웠던 시기를 돌아보며 지금처럼 좋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가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다. 비록 지금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밤하늘의 별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신 분들을 말이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 오지호 (1905~1982)
1919년 3.1 운동 직후 나라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강경한 성품과 남다른 민족의식이 전 생애에 걸쳐 있었던 작가. 1921년 한국의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으로부터 미술을 배우고, 1928년 서양화가 단체인 '녹향회'를 결성하여 전시를 열어 활동하던 중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는 사태를 맞기도 했다. 6.25전쟁 때에는 인민군을 피해 산중 생활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적도 있는 고난했던 우리의 역사를 피부로 느꼈던 작가다.

1938년 한국 최초의 컬러 화집 <오지호 김주경 2인화집>을 <순수회화론>과 함께 발표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는 일본 화단에서조차 원색 화집을 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조선 회화의 우수함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었다.

오지호의 회화는 한국의 자연, 한국의 정신세계를 담고자 하는 것이었고, 인상주의 화론은 밝고 맑은 한국의 자연을 그리기 위해서 가장 좋은 회화적 수단이라고 믿었다. 오지호는 "자연이 나고 내가 곧 자연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과 자연을 결부시켜 그림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국의 풍광을 토대로 민족 회화를 창조하기 위해 매진한 오지호는 구상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이론을 겸비한 화가였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오지호, 북구의 봄, 44x59cm, oil on canvas(1981) 2023.04.03 digibobos@newspim.com

 

◆ 남관 (1911~1990)
남관은 흔히 문자추상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작업을 완성해 가는 그가 창안한 데콜라주 기법은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물감이 아닌 종이, 천, 얇은 철판 등을 캔버스 위에 접착제로 붙이는 것을 콜라주라 한다면 데콜라주는 반대의 프로세스로, 붙인 이물질을 떼어내는 작업이다.

남관은 6.25 전쟁이 남긴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던 1954년 미도파화랑에서 도불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2월 프랑스 유학을 감행하였다. 이때만 해도 서울을 떠나 일본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한 달에 걸려 파리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68년까지 14년간의 프랑스 생활이 시작되었다.

힘든 생활이었다. 몽파르나스의 반지하 셋집은 습기가 늘 흥건했고, 벽돌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캔버스를 세워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극한의 상황이었지만 커피 한잔의 시간도 아까워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해가며 목숨 걸고  그림을 그렸다.

작업실의 축축한 물기가 캔버스 위의 붙여진 종이들을 퉁퉁 불렸고 그 종이를 다시 한 겹 한 겹 벗겨내며 먼 과거로, 아득한 원형의 세계로 돌아간 듯한 미묘한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을 완성시켜나갔다. 남관의 문자추상작업들은 고대의 상형문자와 같고 조선의 예술가들이 작품을 마치고 자기의 분신 같은 낙관을 찍듯 마치 무슨 암호나 코드와 같이 느껴진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남관, 옛뜰, oil on canvas, 64x80cm(1985) 2023.04.03 digibobos@newspim.com

1966년 프랑스 망통 현대 비엔날레에서의 망통시 1등 상은 작가 개인에게는 식민지 시대 청년 일본 유학시절을 거쳐 한국전쟁, 5·60년대의 처절한 고생의 프랑스 유학시절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였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가에는 커다란 큰 영광을 안겨준 대단한 사건이었다. 

◆ 임군홍 (1912~1950 월북 ~ 1979)
대한민국의 파란만장한 근대사를 고스란히 온몸에 떠 앉고 작업 활동을 했던 작가가 임군홍 이상의 작가가 또 있을까? 임군홍은 1930·40년대 서울, 신징, 베이징, 한커우에서 산업미술과 순수예술의 창작활동을 누구보다도 활발히 하였으나 1948년 교통부의 신년 달력에 세계적인 무용수 최승희 사진을 실었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수개월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으로 인해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 임군홍은 가족을 남에 놔둔 채 일단 몸을 피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월북을 하게 된다. 이것이 영원히 가족과 이별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는 일이었을 것이다. 1950년대 이후에는 평양, 개성, 함경북도 일대를 떠돌며 작업을 하다 68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그의 일생은 개인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무거운 시대의 아픔인 것이다.

50년에 북으로 간 이후 우리에게는 잊혀진 화가였지만, 천만다행히 유족에 의해 70년 넘게 고스란히 보관된 그의 30·40년대 작품들은 보물처럼 남아 우리에게 그 시대의 아픔과 함께 임군홍의 작품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임군홍, 정물, 16.4x36.5cm, oil on canvas 2023.04.03 digibobos@newspim.com

 

◆ 김환기 (1913~1974)
이번 전시에는 김환기의 예술적 동지이자 삶의 반려자인 김향안 (본명 변동림)의 그림이 함께 전시된다. 두 사람은 1944년 고희동의 주례로 결혼하여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함께 겪고, 파리와 뉴욕에서 동고동락하며 예술 창작에 몰입하였다.

김환기는 타고난 예술적 기질과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으로 추상미술의 최정상에 선 20세기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작가다. 우리 산천과 달 구름 등 자연의 모습과 백자, 골동 민예품 등 민족 정서를 일깨우는 화재를 선택해 서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사용해 서정적이고 추상적인 화면을 완성시켜 나갔다.

1930년대에는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전시 활동을 하였고, 1946~49년 서울대 미술대 교수, 1952년에는 홍대 미술대 교수를 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56년 44세의 나이에 파리로 떠나 3년 동안 프랑스에서 창작 생활을 이어나갔다.

1959년 김환기가 파리를 떠나면서 몽파르나스 뒤 어두운 창고 같은 남관의 화실을 찾아 "자네는 파리에서 뼈를 묻게"라고 한말은 후에 남관의 글을 통해 알려졌다. 이후 김환기는 한국으로 돌아와 작업 생활을 하다가 1963년 뉴욕으로 떠나고 1974년 생을 마칠 때까지 뉴욕에서 머물면서 전면 점화를 탄생시키면서 추상회화의 대표적인 화가가 된다.

1974년 김환기가 뉴욕에서 타계한 소식을 접한 남관은 "김환기 형의 영전에 " (동아일보 1974)에서 김환기의 죽음에 대한 애통한 마음을 전하면서 "서울에 주저앉아 있는 게 형에게 부끄럽다"라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최고의 두 추상화가의 예술세계가 얼마나 치열했고 진지했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 윤중식 (1913~2012)
그는 석양빛 찬란한 자연미의 정취, 비둘기가 나타나는 평화 염원의 시각이 내포된 서정적인 풍경미를 추구한 작가다. 1931년 2학년인 그는 서울의 미술가 등용문이던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출품하여 입선, 그다음 해와 다음다음 해에도 연속 입선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며 화가의 꿈을 확정한 윤중식은 도쿄의 데이코쿠 미술학교 서양학과로 유학을 떠나 1940년 졸업하고 돌아온다. 1953년 6.25 전쟁 정전 직후 윤중식은 제2회 국전 서양화부에 출품한 <가을풍경>이 특선에 오르며 작가적 위상을 다진다. 그 후 몇 번 입상을 거듭한 그는 1959년 제8회전부터 추천작가 위치에 오른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의 작품은 더욱 자유로운 변용으로 이어진다. 다분히 도식적인 단순화, 그러면서 자연미의 본질을 풍부하고 밀도 짙은 색채로 표현감정이 두드러지게 조화되는 형태로 추구되어 간다. 윤중식은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시를 비롯한 여러 비중 큰 초대전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다. 그때마다 그의 화면들은 선명하게 개성적이며 표현감성이 풍부하게 빚어진 전형적 작풍을 부각시켰다.

◆ 최영림 (1916~1985)
최영림은 전설을 테마로 하는 작품 활동을 벌였던 전설의 작가이다. 최영림은 지난날의 말벗이 은밀하게 들려주던 전설의 맥락을 회화의 어법으로 번안하여 현실의 우리들에게 들려주던 말벗으로서의 화가이다. 말벗으로서 최영림의 그림은 정령신앙적인 모티브가 농후하게 응용되고 있다. 그의 소지가 모래나 흙가루 같은 마티에르로 되어있어 더욱 그렇다.

그의 미술은 19세와 20세가 되던 해에 주목받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평양박물관의 학예원인 일본인 오노 다타아키의 지도로 목판화를 배우게 되는데, 스승의 권유로 일본판화협회전에 출품한 게 입선이 되었다. 이 일은 최영림에겐 크나큰 사건이었고, 사회적 사실로서의 미술의 각성이기도 했다. 그는 후일 오노의 소개로 일본으로 건너가 무나카타 시코로부터 목판화 기법의 지도를 받게 되며, 이때의 경험이 최영림 미술의 생애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 김향안 (1916~2004)
김향안은 시인 이상과 함께 했고, 수화 김환기의 아내로 기억되지만 그들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 스스로도 그림을 그리고 수필을 씀으로써 자신의 미의식을 발전시키며 본인만의 예술 세계를 펼쳤다. 그녀는 한국적인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여 해외에서 활동하는 김환기의 예술 토양이 되어주었으며 그의 작품을 가장 한국적이자 세계적인 작품으로 만드는데 일조한다.

'그림은 사람하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먼지를 쏘이며 생명체처럼 살아갈 때 비로소 광채를 발휘한다.'라고 믿은 그녀는 김환기 사후에 국내 최초 사설 기념관인 환기미술관을 1992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 개관하였다.
"가로되 아름다움을 공감할 줄 아는 사이에는 나누어 즐겨야 한다. 그의 작품에서 나도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때 황홀하다."

◆ 유영국 (1916~2002)
유영국은 한국 근대미술의 전위에 서서 추상미술의 영역을 개척했던 선구자다. 특히, 한국의 자연을 아름다운 색채와 대담한 추상 형태로 빚어낸 최고의 조형감각을 지닌 화가다. 1935년 도쿄 문화학원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화풍을 자랑했던 문화학원에서 그는 당시 도쿄에서도 가장 전위적인 미술운동이었던 '추상'을 처음부터 시도했다.

형태는 비정형적인 것에서부터 점차 기하학적인 형태로 단순화했고 삼원색을 기반으로 하되 유영국의 특유의 보라, 초록 등 다양한 변주가 구사된다. 이로써 유영국의 작품은 회화적 아름다움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간다.

◆ 장욱진 (1917~1990)
장욱진은 소년 시절부터 학생미전에서 빛나는 수상을 하는 등 천부적인 예술적인 소질을 발휘하였다. 1943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후배 양성과 조국의 빈곤한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터전을 개척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작가에게 자연은 늘 영감의 원천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집과 이틀리에 주변을 산책하며 하루를 시작한 그는 자연에서 전쟁으로 떠난 고향과 어린 시절에 관한 향수를 느꼈다. 그의 그림 속 푸르른 생명력을 간직한 풍경은 자연과 벗하며 살기 원한 화가의 또 다른 초상이자 원초적 이상향이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장욱진, Untitled, 26x19.5cm, marker on paper(1979) 2023.04.03 digibobos@newspim.com

장욱진의 작품은 마치 초등학생이 그린 것처럼 단순하지만 그 속에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조화로운 화면 구성과 동양철학 사상을 담고 있다. "나는 심플하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화가 장욱진은 평생을 자연 속에서 심플한 삶을 살면서 그림을 통해 동화적이고 이상적인 내면 세계를 표현하였다.

◆ 임직순 (1921~1996)
'꽃과 여인의 작가'로 불리는 임직순은 특유의 색채가 인상적인 작가이다. 임직순은 빛의 대비와 색채의 변조를 통한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면서도 형식적으로 안정된 구도를 추구하였으며, 작품의 주제로 자연의 모습과 꽃과 여인을 화폭에 담아내 궁극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힘과 그 내면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작품의 바탕을 인상파적인 미학에 두었지만, 그보다 더욱 현대적인 감각이나 시각의 기쁨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임직순의 작품세계이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임직순, 화실의 한떄, oil on canvas, 112x145.5cm(1986 복사) 2023.04.03 digibobos@newspim.com

그는 6·25 전쟁으로 중단됐던 국전이 1953년 휴전과 함께 재개되자 해마다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였고1957년 제6회 국전에서는 꾸준하게 노력과 부지런함으로 닦아온 그간의 역량을 인정받아 문교부장관상을 거쳐 실내의 소녀를 주제 삼은 풍부한 색채 구사의 「좌상」 이 대통령상을 타며 크게 각광을 받았다.

◆ 이대원 (1921~2005)
이대원 작가의 작품에는 진정으로 그리고 싶었던 충동과 남다른 심성의 자연관과 향토적 애정의 깊이가 진하게 묻어 나온다. 이대원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그림 재능을 보이고 있었으나 뜻했던 미술학교 진학은 집안의 반대로 좌절하고 경성제국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포기할 수 없었고, 화가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갔다.

전통적 미의식과 한국적 감성의 표출, 우리의 고화, 민화 민예품 등에 애정을 가지고 있던 이대원은 서예와 이조의 수묵화, 중국 청나라 초에 간행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등의 묘화법 등을 배워 1960년대 민화 풍의 시도와 유채로서의 문인화 전통의 묵화 형식을 계승하고 1970년대 동양적 혹은 한국적 감성 표출을 위한 점묘다채 수법을 통해 한층 독자성을 키워나갔다.

프랑스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는 "이대원은 빛을 그린다기보다는 데생한다."며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그의 나무 그림은 한국 수묵화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평가했으며 부수처럼 쏟아지는 눈부신 색채의 향연에서 받는 감동적인 자연에의 귀의는 바야흐로 생의 허심한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니냐는 극찬을 받고 있다.

◆ 홍종명 (1922~2004)
과수원 집 딸을 그리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 홍종명은 일제 강점기 때 데이고쿠미술학교에서 수학한 뒤 한국전쟁 중 남한으로 자유를 찾아 내려온 평양 출신이다. 1951년 후퇴 때 제주까지 피난을 와 어려운 피난 상황에서도 제주시 칠성통에 '미술사'라는 화방을 열고, 오현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는 동시에, 그림을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을 가르쳐 제주 현대미술의 주역들을 키워냈다.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이산이라는 아픔을 겪어 그의 작품에는 고향을 연상시키는 향토적 소재, 헤어진 큰 딸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자연스럽게 담겨있다. 작가는 향토적 정서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정립하였고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흙의 빛깔과 같은 색을 사용하여 고분벽화의 퇴락한 색조를 재현하려 했다. 그의 작품에서 간취되는 한국적인 특성은 거친 질감과 투박한 색채에 의해 초가집, 벽화와 같은 요소이며 질감이 남한에는 없는 고구려 고분 벽화를 상기시킨다는 점은 주목할 일이다.

◆ 문신 (1923~1995)
문신은 유년 시절을 마산에서 보내고 193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한 후 고국으로 돌아왔다. 마산과 서울을 오가며 회화작가로 활동하다가 돌연 1961년 프랑스로 떠나 60년후반부터 기존에 하던 구상회화에서 벗어나 추상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70년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 조각 심포지엄에 출품한 13미터 높이 나무조각 '태양의 인간'으로 조각가로서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가 선보인 브론즈, 나무, 석고 조각은 유럽 미술계에서도 독창성을 인정받고 조각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1980년 프랑스로부터의 귀화 요청을 거절하고 귀국, 고향 마산에 정착하여 1995년 타계할 때까지 창작에 몰두했다.

그는 퍼블릭 아트라 불리는 야외 조각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1988년 올림픽 조각공원의 25미터 높이 작품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1992년에는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에서 헨리 무어, 알렉산더 칼더와 함께 <세계3대 조각 거장전>에 참여해 조각가로서의 명성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또한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학 훈장인 '슈발리에'를 수상했고, 제11회 세종문화상을 수상했다. 1994년에는 프랑스 예술문화 훈장 '오피시에'를 수상했다.

◆ 권옥연 (1923~2011)
화가 권옥연을 떠올렸을 때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만의 개성은 사물을 인식하고 자신의 내면 속에서 걸러내어 이를 화면 위에 개성적 이미지로 발현시키는 개인 양식을 심화한 결과이다. 그는 독자적인 자신만의 양식을 확립한 작가들을 동경하면서 "전람회장에 들어갔을 때, 작품보다는 사람이 먼저 보이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였고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체취, 자신만의 시, 자신만의 노래"를 갖기를 원했다.

이러한 면모는 권옥연을 어떤 사조나 운동의 흐름 속의 하나가 아닌 권옥연 자체가 가진 고고한 개성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한다. 그가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수학 후 돌아와 활동한 초기의 구상적 화풍에서, 50년대 후반부터의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양식의 화풍, 70년대 이후의 인물, 정물, 풍경의 구상적 화풍으로 회귀하기까지 변화의 과정 속에서도 그의 감수성에 바탕을 둔 '스타일'은 또렷하게 드러난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권옥연, 여인, 27.5x22cm, oil on canvas, (1980-1984) 2023.04.03 digibobos@newspim.com

"권옥연의 목청을 그림 속 빛깔로 나타낸다면 오래된 기왓장을 닮은 청회색이 될 것이다"라고 평론가 황인이 말했듯이, 그의 그림 속 절제된 회색 톤을 자신만의 그림을 나타내는 특유의 포에지(poesie)로 자리 잡았다. 강렬한 원색이 없이도 단번에 눈길을 잡아끌고 오래 보게 하는 것은 그가 가진 예리하고 풍부한 감성을 갈무리하여 깊이를 더하고, 차분한 색채를 조화롭게 사용하는 뛰어난 역량 때문이다. 

◆ 정규 (1923~1971)
정규는 화가, 판화가, 도예가로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한 화단 활동을 하였다. 그는 20대에 일본 데이코쿠 미술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해방을 맞이했지만 곧 6.25가 터지자 부산으로 내려왔고 1953년 부산 르네상스 다방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55년 록펠러재단 후원으로 국립박물관 부설 한국조형 문화연구소가 설립되자 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박물관에서 근무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58년에는 록펠러재단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도자를 연구하였고 1963년 경희대학교 요업 공예과 교수로 부임하여 현대 도자 운동을 주도하였다. 정규는 박대순, 남상교, 이신자 등과 함께 한국공예가회를 발족시키고, 공예 운동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정규는 최순우, 이구열, 이경성 등 당대 미술 이론가 및 비평가들과 교류하며 비평가로도 활동하였다. 특히 그가 1957년 잡지 <신태양>에 연재했던 '한국 양화의 선구자들'을 통해 우리의 근대미술가들을 발굴하고 재정립하였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예리하게 인지하여 관통하는 비전을 가졌고, 우리 고유의 미를 찾아 현대화하며 차별화하는 것을 고민한 작가였다.

◆ 천경자 (1924~2015)
천경자는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독특한 화풍과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컬러로 환상적인 작품 세계를 확립한 작가다. 그녀의 화가로서의 삶은 1940년 유학길에 올라 일본 동경여자미술대학에서 인물화를 익히고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자신의 조부를 그린 작품이 입선하며 시작되었다.

귀국 후 1946년에 모교인 광주여고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이후 1949년 서울에서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치르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 무렵 동생의 죽음과 삶의 역경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린 1951년 작품 <생태>는 수십 마리의 뱀이 얽혀 있는 모습으로 화제가 되었다.

천경자는 자신의 삶의 희로애락을 작품을 통해 가감 없이 보여주었으며, 특히 여성으로서 삶이 가진 한과 슬픔을 화려한 색채를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았다. 대표적인 작품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55세의 작가가 22세 자신의 과거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린 것으로, 그녀가 그린 작품 속 수많은 여인들은 모두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분신이다. "나는 종일 혼자 있어도 내 그림에 나오는 모델들과 대화도 하고 사랑도 나누니까 하루가 지루하지 않다"라며 자신의 그림을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했고, 그림을 통해 삶을 구원받았다고 하였다.

1955년 여인 소묘를 시작으로 출간했던 여러 수필들로 연애와 결혼, 그리고 여자이자 엄마이고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진솔하게 남겼다. 1969년부터 유럽과 남미, 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이국적인 풍물에 영감을 받아 몽환적인 예술로 승화해서 표현하였다. 그녀에게 삶은 곧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떠나는 여행이었고, 2015년 타계할 때까지 멈추지 않고 자신만의 꿈과 환상을 쫓아 생명력 넘치는 아름다운 작품을 피워냈다.

◆ 변종하 (1926~2000)
변종하는 한국적 이미지를 서정적이고 은유적으로 담아낸 작가이다. 그는 1950년대 서울에서 활발히 작품을 발표해오다 196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와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62년 저명한 평론가이자 시인인 르네 드루앵(Rene Drouin)과 만나면서 이전의 표현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작품 세계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르네가 말한 '테푸이예(depoailler)', '껍질을 벗긴다'는 뜻의 단어는 화가에게는 군더더기를 빼고 본질에 도달해야 한다는 의미로, 변종하 작품세계의 평생의 테마가 되었다. 르네 드루앵에게 발탁된 후, 그는 런던과 파리, 뮌헨 등 유럽의 갤러리와 미술관을 무대로 활동하며 일그러진 인물상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우화>와 <돈키호테>연작 등을 발표했다.

변종하는 귀국 이후 1970년대부터는 부조와 같은 독특한 요철의 화면에 물들이듯이 채색을 하는 '요철회화'의 기법을 새롭게 시도하였다. 1980년대에는 한국의 자연에서 따온 모티브인 꽃, 새, 나무,달, 잠자리 등 우 리에게 친근한 풍경을 특유의 시적 서정성을 담아 간결하고 소박하게 표현했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변종하, 새, 46x53cm, mixed media on relief laid on canvas(1980년대) 2023.04.03 digibobos@newspim.com

이후에도 판화, 분청사기나 청화와 같은 도화(陶畵)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주제와 다양한 기법 등을 펼쳐 보였으며, 변종하만큼 이렇게 전 생애를 걸쳐 회화의 새로운 길을 탐구한 화가는 보기 드물다. 또한 그의 작품 속 간결하고 자연스러운 형태와 부드러운 색감, 독특한 문학적 서사가 있는 구성은 항상 본질에 다가가고자 했던 화가의 심상 그 자체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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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 "윗집 발망치 소리, 내년부터 끝" [세종=뉴스핌]김정태 건설부동산 전문기자= 지난 21일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주택성능연구개발센터(HERI). 세종시에 위치한 이곳에는 주택 성능을 시험할 수 있는 여러 시험동이 있지만, 5층짜리 실제 아파트 건물 한 동이 눈에 들어왔다. 출입구 한켠에는 'db35lab(데시벨 35 랩)'이란 영문과 숫자 표기가 부착돼 있었다. 아파트 1층 내부에 들어가야 이 표기의 의미를 알게 됐다. 이는 LH가 층간소음 1등급 기준인 37데시벨보다 낮은, 도서관처럼 조용한 집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은 층간소음기술연구소의 시험동 이름이다. 층간소음 등급별 시연 모습 [사진=국토부기자단 공동] 거실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 화면에는 2층의 층간소음을 일으킬 수 있는 런닝머신, 책상과 의자, 공 등의 도구들이 보였다. 우선 화면을 통해 윗층에서 아래층에 전달되는 성인의 발걸음 소리를 들려줬다. 말 그대로 '발망치' 소리였다. 들려오는 소음은 49데시벨로 4등급 수준이다. 층간소음의 기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2005년 전에 지어진 공동주택의 경우 일부에서 이러한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중량충격음이다. 이번에는 실제로 윗층에서 걷는 소리를 듣는 순서였는데, 귀를 쫑긋 세우지 않고서는 소음을 느끼기 어려웠다. 미세한 진동음이 들리긴 했지만, 불편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어 1m 높이에서 3kg 무게의 공을 떨어뜨리는 실험도 시연됐다. 이는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중량충격음으로, 역시 4등급 수준에서는 참기 어려운 소음과 진동이 느껴지지만, 이곳의 실제 시연에서는 역시 진동음이 확 줄었다. 의자 끄는 소리는 비교적 가볍고 딱딱한 충격음이어서 경량충격음이라고 하는데 4등급 수준에서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불편했지만, 실제 시연에서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충격음이 전달되지 않았다. 이처럼 층간소음이 획기적으로 줄어든 데는 1등급 기준인 37데시벨에 맞춘 성능으로 시공된 바닥 때문이었다. 기존 슬래브 두께보다 두꺼운 250mm로 시공하고, 그 위에 40mm 복합완충재와 30mm 고밀도몰탈 및 와이어 메쉬 등을 함께 깔아 놓은 바닥재다. 공동주택 층간소음 저감기술은 2023년부터 개발되기 시작했으나, 슬래브 두께는 210mm로 상대적으로 얇고 낮은 등급의 완충재와 일반 몰탈을 적용해 3등급 수준에 머물렀으나, 이를 매년 개선해 온 결과 올해 1등급 기준을 충족하게 됐다. LH는 이러한 기술 개발을 실험동 연구에 그치지 않고, LH 공동주택 각 현장에 실증 시공을 하면서 실증 결과 데이터를 쌓아왔다. LH가 층간소음 저감기술을 처음으로 적용한 단지는 양주회천 A15블록으로, 당시 3등급 수준이었으나 지난해에는 평택고덕 ab57-2블록에 2등급 수준으로 끌어 올려 적용했다. LH 연구원 관계자는 "이 같은 1등급 기준을 달성하기 위해 2022년부터 지속적으로 관련 기술과 공법을 연구해 왔다"면서 "47개의 기술 모델 개발과 총 1347회에 걸친 실증을 거쳐 자체 1등급 기술 모델을 정립해 내년부터 주택 설계에 본격적으로 적용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이 같은 1등급 기준 설계로 분양가 상승의 요인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기존 공동주택 24평형(전용면적 59㎡) 기준으로 가구당 300만~400만 원의 공사비가 더 소요되는 것으로 LH는 추정하고 있다. 정운섭 LH 스마트건설본부장은 "층간소음 1등급 설계 적용 때문에 수분양자의 분양가 상승 부담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자체 원가절감과 함께 정부 재정 지원을 요청한 상태"라면서 "지속적인 기술 개발로 공사비 상승의 주요인인 슬래브 두께를 슬림화하면서도 1등급 기준을 충족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층간소음감지기를 통해 경고 알람이 뜨는 월패드 시연 장면 [사진=국토교통부기자단 공동] 층간소음 1등급 설계는 새로 짓는 공동주택에서만 가능하다. 때문에 구축에서는 이러한 혜택을 누리기 어렵다. LH는 이를 보완하는 방안으로 층간소음 감지기를 IT업체와 협력해 개발 중이다. 바닥에 여러 차례 충격을 줄 경우, 층간소음 감지기의 센서가 작동해 해당 세대 월패드를 통해 주의를 당부하는 알람이 뜨도록 하는 장치다. 정승호 LH 스마트주택기술처 팀장은 "구조적으로 층간소음을 줄일 수는 없겠지만, 층간소음을 일으키는 기준을 해당 세대에게 알림으로써 아래층 이웃과의 분쟁을 줄일 수 있도록 고안한 장치"라고 말했다. 실제 이날 시연은 기존 공동주택에 적은 비용으로도 층간소음을 저감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팸투어에 참여한 국토교통부 기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층간소음 1등급 바닥구조 [사진=뉴스핌DB] LH는 바닥에서 발생하는 층간소음에 국한하지 않고, 옆 세대와의 벽간소음, 화장실 배관 소음 등 공동주택에서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생활소음 저감 방안도 마련하고 있다. 벽간소음을 저감하는 소음 차단 성능 1등급 벽체 구조는 2019년 11월부터 이미 설계에 반영한 바 있다. 내년부터는 화장실 배관이 아래층을 통하지 않고 각 세대 내에서 설치되는 자체 배관을 적용해 배관을 통해 전달되는 소음도 줄여나간다는 계획이다. 또 내구성이 좋은 장수명 주택, 수요자의 취향에 맞게 가변형 평면 구성이 가능한 라멘 구조 주택, 레고처럼 조립·건설하는 모듈러 주택 등 주택 건설의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는 주택 유형에도 층간소음 1등급 접목 방안을 모색해 적용 범위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LH는 층간소음 저감 기술 저변을 민간으로 확산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우선, 민간의 고성능 신기술을 발굴하고, 다양한 1등급 기술 요소의 시장화를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올해에는 층간소음 기술 마켓을 통해 6개의 고성능 기술을 발굴했으며 LH 공공주택 현장에서 그 성능을 검증해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다. LH는 층간소음 1등급 적용 확산을 위해 db35lab을 내년 3월부터 전면 개방하기로 했다. 자체 층간소음 시험 시설이 없는 중소기업에 데시벨 35랩을 테스트베드로 제공해 기술 개발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LH는 또 그간 개발해 온 층간소음 저감 기술 요소와 시공법, 실증 결과를 중소 민간 건설사들과 공유할 계획이다. 더불어 자체 기술 개발과 층간소음 저감 시공·품질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건설사들에 대한 기술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이날 이한준 LH 사장은 "2년 전 취임 당시 제일 먼저 강조한 게 층간소음 문제 해결을 약속한 것이었다"면서 "내년부터는 LH가 짓는 모든 아파트에 1등급 기준을 적용해 국민 일상의 생활 고통을 덜어주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벽식 구조의 공동주택에서 벗어나 라멘(기둥식) 구조와 모듈러에도 층간소음 1등급 기준을 적용해 100년 이상 가는 장수명 주택의 근간을 마련하겠다"고 덧붙였다. dbman7@newspim.com 2024-11-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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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동행카드, 고양·과천도 30일부터 [서울=뉴스핌] 이경화 기자 = 서울시는 '기후동행카드'가 오는 11월 30일 첫 차부터 고양시와 과천시까지 서비스를 확장한다고 21일 밝혔다. 이로써 서울~고양~과천을 오가는 시민들도 월 5만~6만원대로 기후동행카드의 무제한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지난 1월 27일 서울 지역을 대상으로 출발한 기후동행카드는 3월 30일 김포골드라인, 8월 10일 진접선·별내선까지 확대됐다. 서울 공동생활권인 인구 100만의 대규모 도시 고양시와 지리적으로 서울시와 경기남부의 길목에 위치한 과천시까지 연결됨에 따라 수도권으로 본격 확대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시는 기대한다.  서울 외 지역 기후동행카드 이용 가능 도시철도 구간 [이미지=서울시] 서울시와 고양시, 과천시는 지난해 2~3월 기후동행카드 참여 업무협약을 체결한 이후 후속 논의를 통해 구체적인 시행방안을 마련하고 11월 30일 고양시(3호선·경의중앙선·서해선), 과천시(4호선)의 기후동행카드 참여를 확정지었다. 관계기관들과 함께 시스템 개발·최종 점검을 완료했다. 이번 확대로 3호선은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역에서 서울시 송파구 오금역까지 모든 역사(44개)에서 기후동행카드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경의중앙선은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역에서 구리시 구리역까지 34개 역사, 서해선은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역에서 서울시 강서구 김포공항역까지 7개 역사, 4호선은 남양주시 진접역에서 과천시 정부과천청사역사까지 34개 역사에서 기후동행카드를 이용할 수 있다. 이에 더해 현재 기후동행카드 서비스 범위에 이미 고양시를 경유하는 서울 시내버스 28개 노선과 과천시를 경유하는 6개 노선이 포함돼 있음을 고려하면 서울과 고양·과천을 통근·통학하는 약 17만 시민의 이동 편의가 더욱 증진될 것으로 보인다.  또 이용범위가 대폭 확대되면서 과천·고양 등 시민들도 기후동행카드의 다양한 문화 혜택을 동일하게 누릴 수 있다. 과천시 4호선 확대로 대공원역도 기후동행카드를 이용할 수 있는 만큼 방문 시 서울대공원 50% 할인 등 혜택을 참고하면 된다.  기후동행카드는 올해 1월 23일 서비스 시작 이후 70일 만에 100만 장이 팔리는 등 시범사업 단계부터 큰 호응이 확인된 바 있다. 7월부터 본사업에 들어가면서 청년할인권·관광객을 위한 단기권 등 다양한 혜택이 더해졌다. 평일 최대 이용자가 65만명이 넘어가는 등 인기가 지속되고 있다. 서울시는 고양·과천 지하철 적용을 시작으로 수도권 시민들에게도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할 수 있도록 관련 협의·시스템 개발 검토를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 향후 기후동행카드의 무제한 확장을 위한 타 경기도 지자체와의 논의 역시 급물살을 탈 것으로 기대된다고 시는 덧붙였다.  기후동행카드를 이용하려면 안드로이드 기반 휴대전화에서 '모바일티머니' 앱을 무료로 다운받아 충전하면 된다. 실물카드는 서울교통공사 1~8호선 고객안전실, 지하철 인근 편의점 등에서 구매한 후 서울교통공사 1~8호선, 9호선, 신림선·우이신설선 역사 내 충전기에서 권종을 선택·충전 후 사용할 수 있다.  기후동행카드의 고양시, 과천시 확대 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고양시(031-909-9000), 과천시(02-3677-2285), 서울시 120 다산콜센터로 문의하면 된다. 윤종장 서울시 교통실장은 "김포·남양주·구리에 이어 고양·과천 확대로 경기도 동서남북 주요 시군까지 기후동행카드의 무제한 대중교통 혁신이 이어지고 있다"며 "교통비 절감·생활 편의·친환경 동참 등 일상 혁명을 수도권 시민들까지 누릴 수 있도록 수도권 지역 서비스 확대·편의 향상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kh99@newspim.com 2024-11-2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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