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1938년 일본 의회는 국가총동원법에 저항하며 발언권을 지켰다.
- 1940년 사이토 다카오 제명 뒤 의회는 전쟁비판을 용납하지 못했다.
- 민주주의 붕괴는 의회 폐쇄보다 말의 소멸에서 시작했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국가총동원과 말할 권리의 소멸
1937년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 언어변화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간다. 1938년 제73회 제국의회에 제출된 「국가총동원법」은 사람과 물자, 생산과 소비, 임금과 가격, 기업활동까지 국가가 광범위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었다. 3월 17일 귀족원 본회의에서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총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근대전의 특징은 이른바 국력전이라는 데 있습니다.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육해군의 분투만으로는 부족하며 국가총동원의 태세를 완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시 또는 전쟁에 준하는 사태에서는 물심 양면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군수의 충족뿐 아니라 국민생활을 확보하고 국가의 모든 활동을 원활하게 하여 국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해야 합니다."

이제 전쟁은 군대의 일이 아니었다. 노동자와 기업, 가계의 소비와 국민생활까지 전쟁목적 아래 다시 배열되었다.
루이즈 영(Louise Young)은 『Japan's Total Empire: Manchuria and the Culture of Wartime Imperialism』(1998)에서 만주에서 형성된 군부·관료·기업·언론과 대중문화의 결합을 '제국적 총동원'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전쟁은 사회의 한 영역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조직하는 원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1938년의 의회에는 아직 저항의 흔적이 선명했다. 3월 3일 국가총동원법안위원회에서 육군 중좌 사토 겐료(佐藤賢了)가 의원들의 끼어들기에 자신의 말을 "조용히 들으라"는 취지로 말하자 회의장이 즉시 술렁였다.
의원들은 "위원장이 단속할 일이다", "무례한 말을 하지 마라"고 외쳤고 오가와 고타로 위원장은 사토에게 표현 취소를 요구했다. 이타노 도모조 의원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며 이렇게 항의했다.
"그런 태도로 설명하는 사람의 발언을 계속 듣는 것은 의사진행상 견딜 수 없으며, 의회의 위신을 위해서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시끄러운 의회였지만 바로 그 소란 속에서 의회가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 있었다. 군인은 의원에게 명령할 수 없으며 의원의 발언권을 관리하는 권한은 의장에게 있다는 원칙이 아직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과 2년 뒤에는 전혀 다른 장면이 나타난다.
1940년 2월 2일 제75회 제국의회 중의원 본회의에서 입헌민정당의 사이토 다카오(斎藤隆夫)가 연단에 올랐다. 그는 중일전쟁이 이미 2년 반이나 계속되었는데 정부는 일본이 무엇을 위해 싸우며 어떻게 전쟁을 끝낼 것인지 국민에게 분명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그의 핵심은 전쟁 그 자체를 모욕하는 데 있지 않았다.

국민이 피와 돈을 지불하고 있는 이상 정부가 '성전', '국제정의', '도의외교', '공존공영' 같은 추상적 표현 뒤에 숨지 말고 전쟁목표와 전망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이토의 문제의식은 분명했다. 국가가 전쟁이라는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국민에게 가장 큰 희생을 요구하는 순간일수록 의회는 오히려 더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질문한 의원이 문제가 되었다. 의장 고야마 마쓰주는 사이토 연설의 상당 부분을 속기록에서 삭제했고 그는 징벌위원회에 회부되었다.
주변에서 사퇴하라는 압력이 이어졌지만 사이토는 헌법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의회에서 정부의 전쟁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의원직을 사퇴하는 것이 오히려 국민에게 충실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맞섰다. 결국 1940년 3월 6일 중의원은 그를 제명했다.
1938년에는 군인이 의원에게 무례하게 말했다는 이유로 의회가 발언권을 지켰다. 하지만 1940년에는 의원이 제국주의 전쟁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그의 말이 삭제되고 그 자신이 의회에서 쫓겨났다. 불과 두 해 사이 의회가 지키려는 대상이 달라진 셈이다. 1938년에는 의회의 존엄을 지켰다면 2년 뒤에는 전쟁을 둘러싼 국가적 존엄을 지키는 데 의회가 동원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정치언어의 붕괴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순간은 반대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때만이 아니다. 반대가 잘못된 의견이 아니라 불충으로 이해되기 시작할 때다. 상대가 틀릴 수 있지만 정당한 정치적 경쟁자라면 논쟁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국가를 해치는 존재라면 논쟁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일본과 바이마르 독일 붕괴의 본질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체제에서 공통적으로 상대가 공동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로 낙인찍는 순간을 주목해야 한다.

1940년 정당들은 차례로 해산했고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로 흡수되었다. 대정익찬회는 1940년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총리가 이른바 '신체제운동'을 추진하면서 조직한 전국적 정치조직으로, 기존 정당들이 해산된 뒤 국민과 정치세력을 천황 중심의 전시체제 아래 결집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정당 간 경쟁을 통한 의회정치가 사실상 사라지고 정치가 국가총동원체제에 편입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1941년 일본은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에 들어갔다.
고든 버거는 「Politics and Mobilization in Japan, 1931–1945」(『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제6권, 1988)에서 바로 이 점을 강조한다. 일본의 의회와 정치세력은 단순히 제거되었다기보다 국가동원체제 안으로 흡수되어 갔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국민을 호명하는 총리의 언어는 1925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국민에게 정부와 군을 신뢰하고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협력일치하여 국난을 돌파할 것을 요구했다.
이후에는 '일억 동포'가 하나가 되어 끝까지 싸우고 끝까지 이겨야 한다는 언어가 반복되었다. 1925년 가토의 국민은 국정에 '참여'하는 국민이었지만, 도조의 국민은 전쟁에 '동원'되는 국민이었다.
1942년에는 중의원 선거도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익찬선거'에서 전쟁완수는 이미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다. 선거라는 제도는 남았지만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의 범위는 크게 줄어들었다.
1938년 군부의 무례에 항의했던 의회, 1940년 전쟁을 질문한 의원을 제명한 의회, 1941년 총리의 전쟁연설을 박수로 맞이한 의회, 1942년 선거를 실시하면서도 전쟁완수라는 목표를 전제로 한 의회가 서로 몇 년 사이에 이어졌다.

일본 민주주의는 언제 무너졌는가
그렇다면 일본 민주주의는 정확히 언제 무너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1931년 만주사변인가, 1932년 이누카이 총리 암살인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인가, 1940년 사이토 다카오 제명과 정당해체인가, 아니면 1941년 태평양전쟁인가.
하나의 사건이나 날짜만 선택하는 것은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제국의회 속기록이 보여주는 것은 민주주의의 붕괴가 사건 하나보다 과정에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메이지 일본은 국가를 매우 강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철도와 전신, 산업과 군대, 관료제와 교육, 조선과 군수산업을 빠르게 발전시켰다. 동시에 헌법과 의회, 선거와 정당정치도 발전시켰다. 다이쇼기에 들어서는 정부가 국민과 의회 앞에서 정책을 설명해야 한다는 언어도 성장했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바로 그 강한 국가를 통제하는 의회의 언어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국민'은 정부를 심판하는 시민에서 국가목표를 수행하는 신민으로, '책임'은 의회에 대한 설명책임에서 천황과 국가를 보필하는 사명으로, '법'은 권력을 제한하는 절차에서 국가적 필요를 실현하는 도구로 이동했다.
'명예'와 '생존'은 점차 정책의 결과보다 상위에 놓이는 말이 되었다. 무엇보다 의문을 제시하고 해결책을 묻는 숙의의 언어가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획일적 의회언어에 밀려났다. 속기록의 언어 분석은 이 변화를 세 단계로 구분한다.
1920~31년에는 아직 '국민·법·책임'에 참여와 절차, 설명책임의 의미가 강하게 남아 있었지만, 1932~37년에는 군사화와 함께 국가적 필요와 충성의 의미가 확대되었고, 1938~45년에는 국민·법·책임 자체가 총동원과 전쟁목적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급격히 재편되었다.
여기서 일본의 사례가 남기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교훈은 의회가 폐쇄되지 않았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헌법도 상당 기간 남아 있었고 선거도 치러졌다. 의원은 연단에서 형식적으로 대정부 질문을 이어 갔고 총리가 답변하는 형식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의회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의회민주주의가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정부가 정책의 이유를 설명하던 의회에서 의원이 자신의 애국심을 증명해야 하는 의회로 변하고, 반대자가 정치적 경쟁자에서 국가적 단결을 해치는 존재로 재정의되며, 의장이 소수의 발언권 존중보다 한 목소리를 강요하게 될 때 의회는 외형을 유지하면서도 민주주의적 기능을 잃는다.

1945년 패전 뒤 소집된 제89회 제국의회에서는 전쟁 중에는 쉽게 제기하기 어려웠던 질문들이 다시 공개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의원들은 왜 의회가 전쟁의 확대를 제어하지 못했는지, 왜 군부와 관료의 판단을 충분히 검증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왜 제국의회가 국민의 대표기관이기보다 정부의 전쟁정책을 뒷받침하는 기관처럼 변해갔는지를 스스로 묻기 시작했다.
이전 시기에도 비판적 발언이 완전히 사라졌던 것은 아니지만, 사이토 다카오의 반군연설과 제명에서 보듯 전쟁의 목적과 정부의 판단을 정면으로 문제 삼는 일은 점점 더 정치적 위험을 수반했다. 패전은 바로 그 억눌렸던 질문들을 다시 의회 안으로 불러들였다.
민주주의는 제도가 복원될 때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 다시 "왜 그랬는가", "누가 책임질 것인가", "다른 선택은 가능하지 않았는가"라고 묻는 언어가 돌아올 때 비로소 회복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 점에서 일본의 경험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단지 쿠데타나 헌법폐지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회언어는 제도보다 먼저 변화할 수 있다. 정책이 옳은가를 묻던 말이 누가 진정한 국민인가를 묻기 시작하고, 상대방의 논리를 비판하던 말이 상대방의 충성을 의심하는 말로 바뀌며, 정부에 책임을 요구하던 책임이라는 단어가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책임으로 바뀐다면 민주주의는 이미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메이지 일본이 놀라운 속도로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강한 국가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0년대 일본의 비극은 바로 그 강한 국가를 견제할 정치의 언어가 그 국가의 능력만큼 강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철도와 전신은 국민을 연결할 수도 있었지만 군대를 동원할 수도 있었고, 산업과 관료제는 국민생활을 향상시킬 수도 있었지만 총력전을 수행하는 체제로 전환될 수도 있었다. 강한 국가와 건강한 민주주의는 같은 것이 아니다.
결국 일본 제국의회의 55년은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민주주의는 의회가 문을 닫을 때 비로소 무너지는가. 아니면 의회가 계속 열려 있으면서도 상대를 설득할 필요가 없어지고, "왜?"라는 질문이 국가적 충성심을 의심받게 만드는 순간부터 이미 후퇴하기 시작하는가.
일본의 속기록을 읽으면 후자의 가능성으로 기운다.
그리고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이 다시 시작해야 했던 것도 바로 여기에서였다. 천황의 신민이었던 국민을 어떻게 주권자로 바꿀 것인가, 전쟁을 위해 동원하던 국가를 어떻게 국민생활과 경제재건을 위한 국가로 바꿀 것인가, 그리고 전쟁에 의문을 제기한 의원을 제명했던 의회를 어떻게 다시 총리에게 책임을 묻는 공간으로 만들 것인가.

(다음 편에서는 그 전환을 살펴본다. 패전과 점령, 신헌법과 새로운 국회의 탄생, 요시다 시게루와 전후 복구, 고도경제성장과 자민당 장기집권을 거치며 일본의 정치언어가 어떻게 다시 '국민', '평화', '생활', '책임'의 언어를 회복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도 미일안보투쟁과 정경유착, 록히드 사건과 같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문제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중의원 회의록을 통해 따라가게 될 것이다.)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달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
kimsh@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