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라씨로
KYD 디데이
중국 인물.칼럼

속보

더보기

[중국경제리더] '중국판 스티브 잡스' 레이쥔 샤오미 회장 <下>

기사입력 : 2016년05월10일 07:47

최종수정 : 2016년05월10일 09:21

타고난 워커홀릭, 판세 읽기에 재미들인 스타트업의 원조

[편집자] 이 기사는 01월 22일 오후 5시03분 프리미엄 뉴스서비스'ANDA'에 먼저 출고됐습니다. 몽골어로 의형제를 뜻하는 'ANDA'는 국내 기업의 글로벌 성장과 도약, 독자 여러분의 성공적인 자산관리 동반자가 되겠다는 뉴스핌의 약속입니다.

<上편에서 이어짐>

[뉴스핌=이지연 기자] 낮잠을 즐겨자던 문학소년이 갑자기 공부에 빠져들고 승부근성이 강한 컴퓨터 학도로 변했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컴퓨터광은 숱한 실패와 좌절을 거쳐 '좁쌀국' 왕위에 올랐다. 바로 샤오미의 사령탑 레이쥔(雷軍) 회장의 얘기다.

레이쥔이 지휘하는 샤오미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휴대폰회사가 아니다. 레이쥔은 한국에서 돌풍을 일으킨 보조배터리서부터 이어폰, iHealth 스마트 혈압계, 스마트 콘센트, 체중계, 미밴드, 샤오미TV, 샤오미 박스, 블랙박스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며 지금의 ‘샤오미 천하’를 일궈냈다.

중국 IT업계와 네티즌들은 샤오미를 ‘대륙의 실수’라고 부른다.  중국과 같은 경영풍토에서 나오기 힘든 뛰어난 기업이 탄생한 데 대한 찬사라고 할수 있다. 한국에서는 샤오미 휴대폰 외에 학생들이 메는 샤오미 브랜드의 컴퓨터 가방까지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좁쌀 샤오미를 호령하는 레이쥔 회장의 경영 인생을 조명해 본다.

     
레이쥔 <이미지=바이두(百度)>      

◆ 초고속 승진 “I have a dream”

1991년 7월 레이쥔은 베이징 근교의 한 연구소에 배정된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월급은 나쁘지 않았다. 공무원인 아버지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하지만 레이쥔의 관심은 연구가 아니라 베이징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중관촌 거물들과의 친목도모에 있었다.

같은 해 11월 4일은 레이쥔에게 있어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컴퓨터 전시회에서 오래도록 흠모해오던 WPS 오피스 개발자 추보쥔(求伯君)과 마주친 것. 추보쥔이 건넨 명함에는 킹소프트 부총재라는 직함이 크게 찍혀있었다. 명품으로 한껏 멋을 낸 잘생긴 청년은 레이쥔에게 말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게했다. 추보쥔을 만나면서 레이쥔의 경영인생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레이쥔을 범상치 않게 여긴 추보쥔은 레이쥔을 호텔로 초대했고 함께 오리구이를 먹으며 그에게 킹소프트 입사를 권유한다. 레이쥔은 이날 한 숨도 자지 못 했다. 후에 추보쥔은 고맙게도 직접 우한까지 찾아가  레이쥔의 초기 창업 멤버들에게 킹소프트 입사를 권유한다.

얼마 후 레이쥔은 킹소프트에 입사한다. 추보쥔이 킹소프트 창업자 장쉬안룽(張旋龍)을 만난 것처럼, 레이쥔이 보기에 자신과 추보쥔의 만남은 인생의 전환점이 된 일대 사건이었다. 레이쥔과 추보쥔은 협력 파트너로서 지금까지도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레이쥔은 1992년 킹소프트 개발부 매니저로 시작해 2년 후인 1994년에는 베이징 킹소프트 유한공사 사장으로 취임한다. 그의 나이 고작 20대 중반의 일이다. 1998년부터는 회사의 모든 경영, R&D(연구개발), 상품 판매, 시장 전략을 책임졌다. 31세 때는 총재, 38세 때는 부회장으로 승진하며 승승장구했다. 일에 대한 변함 없는 열정이 선사한 값진 결과였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식지 않는 열정을 유지할수 있느냐"고 묻는다  레이쥔은 단 두 글자, “이상”이라고 답한다. 돈은 바닥을 드러내지만 이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 또 이상이 있으면 그 어떤 유혹 앞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다고 말한다.

레이쥔의 좌우명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I have a dream”이다. 의외로 그는 이상주의자적인 기질도 갖고 있다. 수천만 위안을 들여 WPS 오피스에 투자한 일이 대표적이다. 이는 투자측면에서 그다지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민 소프트웨어’를 지켜냈고, 반격의 기회를 얻었다. 불법 프로그램이 판치는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어떻게 보면 이상주의는 필수적일지도 모른다.

레이쥔은 킹소프트에서 자신의 열정을 모두 쏟아냈다. 왕펑(王峰) 킹소프트 부총재는 일이 끝난 뒤에도 레이쥔과 사무실에서 늦은 밤까지 업무 얘기를 했다고 회고했다. 지독한 워커홀릭인 레이쥔은 킹소프트 CEO가 된 이후에는 하루에 5시간도 채 쉬지 못 하고 업무에 열중했다.

새로운 게임 출시 전, 레이쥔은 모든 임원들에게 게임 캐릭터의 레벨을 40까지 키우라고 지시했다. 레이쥔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동이 틀 때까지 게임 삼매경이었다. 타사의 인기게임까지 직접 플레이 해보면서 거의 모든 게임을 섭렵했다.  

레이쥔은 킹소프트를 수익을 창출하는 회사로 변모시켰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맹렬한 공세 속에서도 WPS를 지켰고, 기존 게임회사의 비웃음 속에서도 온라인 게임 시장에 진출하며 글로벌 전략을 실시했다. 이미 다른 기업이 선점한 백신 프로그램 분야도 헛점을 파고들었다.

◆ “돼지도 태풍을 만나면 날 수 있다”

22세에 입사해서 38세가 되기까지, 킹소프트의 6번째 사원에서 CEO가 되기까지 레이쥔은 쉼 없이 달려왔다. 그리고 2007년 킹소프트가 상장되고, 레이쥔이 최고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는 16년간 몸 담았던 킹소프트를 돌연 떠난다.

레이쥔은 킹소프트를 떠나기 전 ‘보스 타운(BOSS TOWN)’이라는 TV 토크쇼 프로그램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었다. MC가 미래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킹소프트 대표가 아닌 레이쥔으로 불리는 그 날이 오면 그때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백수’가 된 레이쥔은 공허했다. 탱크처럼 장애물들을 쓰러뜨려왔지만 심신이 모두 지치고 말았다. 그제서야 그는 주위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사장 자리에 올랐을 때 갓 학교를 졸업하고 전신국에 입사했던 마화텅(馬化騰)과 딩레이(丁磊)는 어느새 텐센트와 왕이(網易) 회장이 되어 인터넷 업계를 호령하고 있었고, 자신보다 늦게 상경해 함께 식사하기도 했던 같은 후베이성 출신 저우훙이(周鴻祎)도 치후(奇虎)360의 사령탑이 돼있었다.

레이쥔은 자신의 커리어를 되돌아봤다. “킹소프트는 알칼리성 토지에 풀을 심는 것 같았다. 왜 태풍이 불어 닥치는 곳에서 연을 날리지 않지? 돼지도 태풍을 만나면 날 수 있는데”. 생각을 정리한 레이쥔은 다시 한 번 날아오를 준비를 한다.

이후 3년 6개월이라는 세월 동안 레이쥔은 중국에서 가장 성공한 엔젤 투자자로 거듭난다. 인터넷, 소프트웨어, 전자결제, 게임 등 분야에서 투자하는 족족 큰 수익을 냈다. 어떤 기업 회장은 웨이보(중국판 트위터)에 “온 중국이 레이쥔의 실험 밭”이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엔젤 투자자로 활동하면서 레이쥔은 더 넓은 시야로 인터넷 생태계를 관찰했고, 그 결과 모바일 인터넷, 전자상거래, SNS 분야에 무한한 잠재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레이쥔은 ‘수’와 ‘흐름’을 몹시 중요하게 생각한다. 취미인 바둑과 스키도 수와 흐름이 중요한 스포츠다. 특히 대세를 따른다는 의미인 ‘순세이위(順勢而為)’는 입에 달고 살 정도다. 대성하려면 대세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레이쥔은 그의 40세 생일 저녁, 중관촌 근처에서 친구 몇 명과 만나 술자리를 갖는다. “무작정 산 위로 바위를 굴리다간 지치기만 한다. 또 위에서 굴러오는 돌에 맞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일단 정상에 올라야 한다. 그 다음에는 내 마음대로 바위를 굴릴 수 있다”

◆ 샤오미와 ‘레이잡스’의 탄생

사람을 중시하는 레이쥔은 본격적인 창업에 앞서 몇 개월간 직접 발품을 팔며 인재 찾기에 나선다. 적합한 인물을 발견하면 “yes”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 결과 린빈(林斌) 구글 중국공정원 부원장, 황장지(黃江吉) 마이크로소프트 중국 공정원 개발총괄, 훙펑(洪峰) 구글 중국 고급상품 매니저 등 걸출한 인재 6명을 발굴, 초특급 창업팀을 꾸린다. 이 엄청난 라인업을 본 글로벌 기술업체 직원들은 구름처럼 샤오미로 몰려들었다.

2010년 4월, 불혹을 갓 넘긴 레이쥔은 마침내 샤오미를 창립한다. “킹소프트에서의 16년은 내공을 다진 시간”이라며 이제는 ‘태풍’을 만나 날아오를 때라고 판단한 것. 그 해 8월, 모바일 운영체제 MIUI가 탄생했고, 이듬해인 2011년 8월에는 샤오미의 첫 휴대폰 Mi1이 출시된다.

샤오미의 휴대폰 판매량은 2012년 719만대, 2013년 1870만대, 2014년 6112만대로 고속 성장한다. 바로 이 무렵 레이쥔에게 ‘레이 잡스’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중국판 스티브 잡스인 셈. 한 업계인사는 레이쥔을 두고 “이전(킹소프트 재직 시절) 인터넷 물결은 타지 못 했지만, 모바일 인터넷 물결은 탔다”고 평했다.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馬雲)은 중국 국영매체 CCTV 경제인물 시상식에서 샤오미의 핵심은 마케팅이라고 한 적 있다. 레이쥔은 그 자리에서 마윈에게 샤오미의 핵심은 ‘헝그리 마케팅’ 등이 아니라 제품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최고의 제품이 최고의 마케팅”이라며 혁신적인 제품이 곧 샤오미의 생명력이라고 설파한다.

만약 지금의 레이쥔을 있게 해준 10명을 꼽는 다면 그 중에는 기술지원팀 신입 사원 한명을 빼놓을수 없다. 이 패기 넘치는 신입사원은 상사의 지시를 잘못 알아듣고 레이쥔이 몇 년간 어렵사리 모은 프로그램 코드를 전부 포맷해 버렸다.  황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레이쥔은 그이후 자신의 프로그램 코드에 빠져지내던 습관에서 벗어나 경영에만 집중할수 있었고 덕분에 지금의 샤오미를 일궈냈다는 후문이다.

이런 적도 있다. 어느 날 레이쥔이 새로 이전한 사무실로 출근을 하는데 입구에서 사원증이 없다고 경비원에게 가로막혔다. 레이쥔은 몹시 신사적인 말투로 “제 성은 레이입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단호한 경비원은 “당신 성은 알 바 아니고 사원증이 없으면 절대 못 들어 간다”고 했다. 결국 레이쥔은 행정 매니저를 불러 겨우 사무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레이쥔이 강조하는 원칙 경영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하는 에피소드다.

2015년 샤오미는 7000만대의 휴대폰을 판매했다. 목표했던 8000만대는 달성하지 못한 것. 레이쥔은 올 초에 열린 샤오미 연례총회에서 우울한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냈고, 이어 ‘즐거우면 OK’를 2016년 가장 중요한 경영모토로 제시했다. 여기서 가리키는 즐거움은 목표가 있는 즐거움이다.

레이쥔은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중간관리자와 핵심성과지표(KPI)를 없애고 제품 혁신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100번 이상의 수정을 거쳐 신제품 발표회 PPT를 만드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모든 역량과 열정을 그의 마지막 종착지인 샤오미에 바칠 것이다.

샤오미에 위기가 닥쳐도 수 읽기에 강한 레이쥔은 또 다른 ‘대세’를 찾아내며 그의 좁쌀국을 굳건히 지켜낼 것이다. 2016년 핵심 키워드로 ‘과감한 탐색’을 택한 레이쥔. 그가 ‘레이잡스’라는 별명을 벗고 ‘레이쥔’ 그 이름 그대로 불릴지 올 한해 샤오미의 경영에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뉴스핌 Newspim] 이지연 기자 (delay@newspim.com)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한덕수, 대선 출마 여부에 "노코멘트" [서울=뉴스핌] 이나영 기자=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는 미국의 관세 부과 조치에 대해 "맞대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 대행은 20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양측이 모두 윈-윈(win-win)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한국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드는 데는 미국의 역할이 매우 컸다"며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원조, 기술이전, 투자, 안전 보장을 제공했다. 이는 한국을 외국인에게 매우 편안한 투자 환경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 대행은 미국과의 통상 협상에서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 축소 방안을 논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뉴스핌] 이길동 기자 =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 2025.03.24.gdlee@newspim.com 한 대행은 "협상에서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와 상업용 항공기 구매 등을 포함해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기 위한 방안을 논의할 수 있다"며 "조선업 협력 증진도 미국이 동맹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FT는 "비관세 장벽을 낮추는 방안도 논의될 수 있다"고 한 대행이 언급했다고 전했다. 한 대행은 협상 과정에서 "일부 산업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면서도, 양국 간 무역의 자유가 확대되면 "한국인의 이익도 증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FT는 방위비 분담금 재협상 여부에 대해서는 사안에 따라 재협상에 나설 수 있음을 시사했다고 전했다. 한편, 한 대행은 6·3 대통령선거 출마 여부에 대해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며 "노코멘트"라고 답했다. nylee54@newspim.com 2025-04-20 13:43
사진
호미들 중국 한한령 어떻게 뚫었나 [베이징=뉴스핌] 조용성 특파원 = 중국의 '한한령'(限韓令, 중국의 한류 제한령)이 해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나라 가수가 중국에서 공연을 한 사실이 알려지며 그 배경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18일 베이징 현지 업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3인조 래퍼 '호미들'이 지난 12일 중국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시에서 공연을 펼쳤다. 반응은 상당히 뜨거웠다. 중국인 관객들은 공연장에서 호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음악에 맞춰 분위기를 만끽했다. 공연장 영상은 중국의 SNS에서도 퍼져나가며 관심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국적 가수의 공연은 중국에서 8년 동안 성사되지 못했다.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BTS도 중국 무대에 서지 못했다. 때문에 호미들의 공연이 중국 한한령 해제의 신호탄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호미들 공연이 성사된 데 대해 중국 베이징 현지 문화콘텐츠 업계 관계자들은 공연이 소규모였다는 점과 공연이 성사된 도시가 우한이었다는 두 가지 요인을 지목했다. 호미들이 공연한 우한의 우한칸젠잔옌중신(武漢看見展演中心)은 소규모 공연장이다. 호미들의 공연에도 약 600여 명의 관객이 입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에서 800명 이하 공연장에서의 공연은 정식 문화공연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된다. 중국에서는 공연 규모와 파급력에 따라 성(省) 지방정부 혹은 시정부가 공연을 허가한다. 지방정부가 허가 여부를 판단하지 못할 경우 중앙정부에 허가 판단을 요청한다. 한한령 상황에서 우리나라 가수의 문화공연은 사실상 금지된 상황이었다. 호미들의 공연은 '마니하숴러(馬尼哈梭樂)'라는 이름의 중국 공연기획사가 준비했다. 이 기획사는 공연허가가 아닌 청년교류 허가를 받아서 공연을 성사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우한시의 개방적인 분위기도 공연 성사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한에는 대학이 밀집해 있으며 청년 인구 비중이 높다. 때문에 우한에는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높다. 게다가 젊은 층이 많은 만큼 우한에서는 실험적인 정책이 시행되어 왔다. 우한시는 중국에서는 최초로 시 전역에서 무인택시를 운영하게끔 허가하기도 했다.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파격적인 정책이 발표되는 우한인 만큼, 한한령 상황임에도 호미들의 공연이 성사됐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베이징의 한 문화업체 관계자는 "우한시가 개방적이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호미들의 공연은 소극적인 홍보 활동만이 펼쳐지는 한계를 보였다"며 "공연기획사 역시 한한령 상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현지 문화콘텐츠 업체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한국의 최정상급 가수가 대규모 콘서트를 개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어서 빨리 한한령이 해제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한한령이 해제될 것이라는 시그널은 아직 중국 내에서 감지되고 있지 않다"고 언급했다. 호미들의 중국 우한 공연 모습 [사진=더우인 캡처] ys1744@newspim.com 2025-04-18 13:10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