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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모스크바 이야기]...(7-3) 급진전 보인 군사분야 교류

기사입력 : 2019년03월27일 12:17

최종수정 : 2019년03월27일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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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시아 관계 빛과 그림자...한-러 군사교류의정서 체결
옐친 "북한과 군사동맹조약 만기되면 더 연장 안한다"
군 고위관계자·함정 상호방문 활발...군사정보보호협정도 타결

[서울=뉴스핌] 김흥식 객원논설위원 = 한·소 수교 이후 정치·경제, 문화적 측면에서는 교류.협력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군사분야에서는 지지부진했다. 국방부, 외무부, KGB 등 보수성향의 기관들이 북한과의 동맹조약 관계를 들어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미그29 전투기 [사진=로이터 뉴스핌]

◆한-러 군사교류의정서 체결...옐친 “북한과 군사동맹조약 연장 안한다”

김영삼 대통령과 옐친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관계를 ‘건설적이고 상호 보완인 동반자관계’로 발전시켜나갈 것을 선언하면서 변화조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군사교류분야에서 ‘군사교류의정서’ 체결을 계기로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이다.

옐친 대통령은 특히 북한과 체결한 군사동맹조약이 만기가 되면 더 이상 연장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한국입장을 다독이려고 했다.

군사교류의 문을 연 의정서 체결과 관련해 필자는 나름대로 취재에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모스크바 대사관이 옐친 대통령의 92년 11월 한국방문을 앞두고 준비에 여념이 없던 가운데 특히 무관부의 부산한 움직임이 촉각을 곤두세우게 했다.

무관부를 들을 때마다 서둘러 서류를 치우는가 하면 기를 쓰고 필자를 문밖으로 내몰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에 없던 일이어서 심층취재에 들어갔다.

한동안 탐문을 하던 중 우연히 사무실에서 나온 파지 뭉치를 보게 됐다. 파쇄가 덜 된 조각에서 겨우 판독할 수 있는 ‘의정서’ ‘군사교류’라는 영어와 러시아어 단어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두 단어를 바탕으로 퍼즐 맞추기 작업에 들어갔다.

조금씩 윤곽이 나오기 시작했다. 옐친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군사부문에서 교류협력에 획을 긋는 조치를 취하기로 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

양국 간 군사교류 관련 의정서임을 확신한 필자는 대사관측에 확인을 요청했다. 대사관측은 경악했다. 마지못해 합의사실을 시인해면서 정상간 공식 체결 전에 보도되면 러시아 측 반발로 허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국익차원에서 보도 자제를 요청했다.

필자의 입장은 달랐다. 러시아 정부는 당사국간 합의도 필요에 따라 뒤엎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쐐기를 박는 차원에서 선제적으로 보도하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나름의 주장을 폈다.

보도됐다는 이유로 예정된 옐친 대통령의 방한이 취소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당시 경제난에 허덕이던 러시아는 일본과의 경제협력이 흐지부지되면서 한국에 기대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군사교류 의정서 문제로 판을 엎지 못할 것이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었다.

무관부의 특수한 입장을 고려해 기본적인 내용만 보도하는 쪽으로 정리했다. 러시아와의 협력에 또 하나의 획을 긋는 내용이어서 서울에서도 크게 보도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군사교류의정서 보도와 한국전쟁 관련한 일련의 발굴기사로 92년 12월 연합뉴스가 제정한 제1회 ‘올해의 보도상’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모스크바 로이터=뉴스핌] 김선미 기자 = 오는 5월 9일(현지시간) 러시아 전승기념일인 ‘승리의 날’ 행사를 위해 러시아 MiG-29 및 Su-30 전투기가 4일 모스크바 상크트바실리 대성당 위 창공에서 대형을 이뤄 행사 리허설을 하고 있다.

◆한-러 군사교류 본격화...군 고위관계자·함정 등 상호방문 활발

사실 한.소 수교에 뒤이어 우리 정부가 관심을 집중한 현안의 하나는 ‘조-소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조약’의 자동군사개입조항 폐기에 관한 문제였다. 러시아 측도 한국과 수교했고 대규모 차관까지 제공받은 처지에 자동군사개입조항이 양국발전에 저해요인임을 인식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보수성향의 군부와 KGB는 문제조항의 폐기 내지 개정에 대해 시기상조라며 완강한 반대 입장을 보여왔다. 그런 상황에서 합의된 군사교류의정서는 양국 간 군사부문에 관한 최초의 실질적 조치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의정서의 체결로 자동군사개입조항의 폐기는 기정사실화된 것이다.

군사교류의정서가 체결되면서 양국 간 군사교류는 양적, 질적으로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한·미 동맹과도 맞물린 민감한 사안이어서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머뭇거리기도 했으나 러시아 측이 적극적이어서 점차 본격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군함이 상호신뢰의 표시로 부산항을 친선방문한데 이어 한국 해군함정이 1993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닿을 내렸다. 해군함정의 상호방문은 ‘군사교류의 꽂’으로 불릴 정도로 군사교류의 상징성이 크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 태평양함대 소속 3척의 함정이 부산항에 입항할 때 우리 측의 강력한 요구로 조기를 게양하도록 했다. 시기적으로 사할린 상공 KAL기 격추 10주년이 해당된다는 점을 들어 조의 표시로 조기를 게양해달라고 요청한 것인데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하던 러시아 측이 우리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군 고위관계자들의 상호방문도 활발해졌다. 이병태 국방장관과 군 서열 1위인 이양호 합참의장을 위시해 군 고위관계자들이 93년을 전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러시아 측에서도 그라초프 국방장관, 칼레스니코프 총참모장, 코코신 제1국방차관 등 최고위급 인사들이 서울을 찾았다.

군수뇌부 회담에서 해상합동구조훈련을 실시하기로 원칙적인 합의를 했다. 특히 군수산업의 총책임자인 안드레이 코코신 제1국방차관이 서울을 방문, 한국의 주요 방위산업시설을 둘러보고 방산협력 문제를 협의했다.

1999년 9월에는 러시아 국방장관 이고르 세르게이 원수가 해군고속정을 이용, 인천항을 방문했다. 러.일전쟁 당시 제물포해전(1904년)에서 함정을 일본에 넘겨주기 않기 위해 자폭을 택한 바랴그 호의 추모행사를 가지기 위해서였다.

러시아 측은 이후 매년 인천 앞바다에서 바랴그 호 추모행사를 거행한다. 러시아 군인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거국적 행사로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도 2013년 방한했을 때 추모행사에 참석했을 정도다.

한·러 간 군사교류가 본격화되고 있는 반면 오랜 동맹관계였던 러시아와 북한의 관계는 인적교류가 뜸해지면서 소원해졌다. 평양을 방문하는 러시아 군대표로 과거의 고위급 장성에서 소장급으로 격이 떨어지자 북한 측이 회의를 보이콧하는 사태를 빚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92년 7월 이상옥 외무장관이 모스크바를 방문, 특파원들과 만나는 모습. 이 장관의 요청으로 CIS(독립국가 연합)를 순회 취재했다. [사진=뉴스핌DB]

◆한-러 군사정보보호협정-군사기술·방산·군수협력협정 체결

한·러 군사협력은 그 이후 또 하나의 극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양국 국방부는 1995년 5월 군사협력의 핵심 중 하나인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협정은 체결 상대국이 제공한 군사기밀을 자국의 비밀과 똑같은 비중으로 지키겠다는 국가 간의 약속이다.

따라서 적대국과는 맺을 수 없고 무기를 거래할 정도의 우방 사이에만 체결하는 게 보통이다. 양국 간 군사협력분야의 신뢰구축과 안전보장이 그만큼 공고해지고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97년에는 양국간 ‘군사기술·방산·군수협력협정’도 체결했다.

일본과는 2016년야 11월에야 유사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한 것을 보면 한.러 간 군사협력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는 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대체로 한국에 우호적인 옐친 정부 하에서 이뤄진 일들이다.

푸틴 정부가 들어서고 수교 초기의 열띤 분위가가 가라앉으면서 양국 관계도 조정기에 들어간 느낌이 든다. ‘강한 러시아’를 지향하는 푸틴 대통령이 북한과의 관계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한반도 정책에서도 ‘러시아 패싱’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비치고 있다.

그 때문인지 남.북한에 대해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반도 정세의 변화에 따라 양국 간 군사협력 수준도 예전만 같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흥식 뉴스핌 객원논설위원
한국외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1977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해직되는 아픔을 겪고 쌍용그룹에 몸담고 있다가 1988년 연합뉴스 기자로 복귀했다. 1991년 한국의 첫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파견돼 맹활약했다. 이후 연합뉴스 북한부장, 남북관계 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실 간사, 경영기획실장을 거쳐 편집담당 상무이사를 지냈다. 퇴임후 연합뉴스 부설 동북아센터 상임이사, 중소기업진흥공단 비상임이사, 도로교통공단 비상임이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특별위원 등을 지낸뒤 현재 뉴스핌 객원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khs@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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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기차 주행거리 두배 증가 배터리 개발 [베이징=뉴스핌] 조용성 특파원 = 중국이 에너지 밀도를 두 배 증가시킬 수 있는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해 낸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칭화(淸華)대학 화학공학과의 연구팀은 '음이온이 풍부한 용매화 구조 설계'를 개발해 냈으며, 이를 기반으로 불소 함유 폴리에테르 전해질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고 중국 관찰자망이 30일 전했다. 해당 연구 성과는 논문 형식으로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에 등재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폴리에테르 전해질은 고체이며, 연구팀은 해당 전해질을 사용하여 전고체 배터리를 제작했다. 제작된 전고체 배터리는 604Wh/kg의 에너지 밀도를 기록했다. 이는 현재 리튬 이온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가 150~320Wh/kg인 점을 감안하면 에너지 밀도가 두 배 이상 높아진 것이다. 동일한 무게의 배터리이지만 해당 전해질을 사용한 전고체 배터리는 두 배 이상의 전력을 충전할 수 있는 셈이다. 이론적으로 전기차의 1회 충전 주행 거리가 두 배 증가할 수 있게 된다. 현재 500km가량을 주행할 수 있는 전기차가 1000km를 주행할 수 있게 된다. 해당 전고체 배터리는 안전성 테스트도 통과하였다. 못을 박아도 화재와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120도의 높은 온도의 박스 안에 6시간 동안 방치되었지만, 연소나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500회 이상 충방전을 거치면서도 에너지 저장 용량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전고체 배터리가 상용화된다면 많은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해진다. 전기차의 주행 거리는 두 배 증가하며, 드론의 비행 거리도 두 배 증가하게 된다. ESS(에너지저장장치) 역시 부피당 저장 용량을 크게 끌어올리게 되며 ESS 소형화가 가능해진다. 칭화대 연구진이 개발한 전고체 전해질의 도식도 [사진=네이처 캡처] ys1744@newspim.com 2025-09-3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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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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