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영란 편집위원= 누구나 이 코로나팬데믹 시대에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만남과 회식이 줄어들며 나를 마주할 시간이 늘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더욱 그럴 것이다. 혼자만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의 실마리를 찾다보면 스스로를 성찰하게 마련이다.
동서양 고전회화를 첨단 디지털기법을 통해 움직이게 하며, 독보적인 작업을 창출했던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52)이 이번에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나섰다. 그런데 자아를 찾아나선 과정도 이이남다운 방식이라 눈길을 끈다.
지난 20여년간 가상현실, 인공지능 등 다양한 첨단기술을 활용해 고전회화에 숨결을 불어넣었던 이이남이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관장 이명옥) 초대로 개인전을 가지며 자신의 DNA에 주목했다. 작가는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지플러스생명과학과 협력해 스스로의 DNA데이터를 추출한 뒤 이를 원용해 다양한 신작을 제작했다. 이에 사비나미술관은 신작 중 영상, 설치, 평면작품을 선별해 '이이남,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다'라는 타이틀로 여름특별전을 꾸몄다. 오는 8월31일까지 사비나미술관 전관에서 열리는 이이남 작품전에는 높이 6.8m에 달하는 대형 모니터 영상작품 '시가 된 폭포'를 비롯해 15점의 영상작업과 6점의 영상 설치미술이 출품됐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이이남 '인간,자연,순환,가족'. 65"LED TV. 싱글채널 비디오(3pcs). [사진=사비나미술관] 2021.7.19 art29@newspim.com |
이이남은 자신의 DNA데이터를 추출한 것에 대해 "우리는 일평생 동안 '나'라는 신체 속에 갇혀 살지만 자신의 실체를 직시하지는 못한다. 주변 이미지와 정보를 통해 얻어지는 간접적 정보일 뿐이다. 이 한계를 벗어나고 싶어 DNA데이터를 추출해 디지털로 변환했고, 나의 뿌리에 해당되는 고전 작품들과 결합시켰다. 이를 통해 진정한 나를 성찰하고, 본질에 다가가는 실험을 시도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미디어 아트와 DNA데이터가 결합된 매우 이례적인 전시이자, 최신의 융복합 전시가 됐다.
12분짜리 영상이 대형 모니터와 거울에 투영되는 이이남의 신작 'DNA 산수'는 바로 작가에게서 추출된 DNA데이터가 동양의 산수화와 결합된 작품이다. 작가의 DNA 염기서열을 구성한 깨알같은 알파벳들이 왕희맹의 '천리강산도' 등의 고전산수와 함께 빛의 신호로 변환돼 생성, 소멸되며 합일을 이루고 있다. 전남 담양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냠도의 풍광과 동양의 산수화를 보고 자란 작가에게는 동양의 고전회화가 일종의 정신적 DNA인 셈이다. 이에 작가는 우리 앞의 자연과 대상을 서구의 풍경(Landscape)이란 관점이 아닌, 동양의 '산수' 관점에서 보며 '나'라는 자아가 존재하기까지의 연결성을 역추적했다. 즉 나는 어디서 왔으며 나의 뿌리와 본질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작업을 통해 돌아본 것이다.
이이남은 이번에 당나라 시인 사공도(司空圖)의 시학서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에서 전시의 주제를 가져왔다. '이십사시품' 중 자신을 온전히 보고 싶은 욕망을 투영한 "형상 밖으로 훌쩍 벗어나 존재의 중심에 손을 쥔다"라는 귀절에서 영감을 얻어 '이이남 식 DNA 디지털 산수'를 선보이게 된 것.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이이남 'DNA 산수'. 거울, 다중채널 비디오, 사운드. 2021. [사진=사비나미술관] 2021.7.19 art29@newspim.com |
이처럼 DNA 염기서열과 고전 회화가 하나가 됐듯 이번 전시에는 실상과 허상, 위와 아래, 생명과 소멸,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며 경계를 넘나드는 최첨단 미디어 아트가 여럿 출품됐다.
2층 전시실 중앙에 설치된 '분열하는 인류'라는 작품은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화살이 길게 마주하고 있다. 스크린에 꽂힌 화살은 열매 실(實) 자에 적중돼 글자 아랫부분을 가루처럼 흩어져내리게 한다. 현대인이 추구하는 정신적, 물질적 결실이 코로나팬데믹 상황에서 과연 어떤 의미가 있으며, 존속은 가능한가라고 묻는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존재하지만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자신의 유전자 정보를 디지털로 시각화한 '시화일률' 연작은 작가의 DNA 정보들이 모여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반시직의 '웅혼' 등의 작품을 천천히 빚어낸다. 작가는 작품 곳곳에 거울 등의 반사체를 설치해 관객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며 관객과 작품을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다.
작가는 "급변하는 IT기술로 초연결시대가 가능해졌지만 코로나팬데믹이란 뜻밖의 사태가 도래했다. 마치 허구처럼 느껴지는 이 상황은 엄연히 실재하는 것이다. 실재인 듯 허구인 듯 모호한 시대에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를 함께 통찰해보고 싶어 이런 작품들을 제작했다. 앞으로 인류 공동체가 어떻게 달라질지 돌아보기 위해서도 우리 스스로부터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대학원(박사)을 졸업한 이이남은 디지털 기법으로 창조해낸 미디어아트로 국내외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작가다. 영국 테이트모던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고, 대만 타이페이, 벨기에 겐트 등 전세계 주요 미술관과 화랑에서 70여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2018년 4.27남북정상회담(판문점 평화의 집) 당시에도 그의 영상작품이 상영된 바 있다. 이이남의 작품은 아시아미술관(샌프란시스코, 미국), 소더비(홍콩 본사, 홍콩), UN본부(뉴욕, 미국),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식물원, 부산시립미술관, 경기도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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