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슈만(Schumann)은 장 파울의 소설 『장난꾸러기 시절』로부터 영감을 얻어 <나비>(1831년)에서 상상의 가장무도회가 주는 인상을 그렸다. 그로부터 4년 후에 나온, <카니발(Carnaval, Op.9)>(1835년) 역시 가장무도회를 그렸다.
모두 21개의 곡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인물들과 더불어 파가니니, 쇼팽, 슈만,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미래의 부인인 클라라 비크까지 출연한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작품 '프레앙빌(Preamble). 2022.03.30 digibobos@newspim.com |
먼저 1곡 '서두'. 축제의 서막을 알린다. 팡파르가 울리는 듯 포르테시모로 즐거운 화음이 가득 펼쳐진다.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삼박자의 흐름은 경쾌함과 기대감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2곡은 '피에로'다. 슈만의 '카니발'엔 부제목이 있다. '네 개의 음표에 의한 작은 장면들(Schwänke auf vier Noten)'이다. 그 네 개의 음표가 2곡에서 나타난다. A, E-flat, C, B 음이다. 이는 독일식으로 A, S, C, H로 쓸 수 있는데, 이 알파벳은슈만이 한때 사랑했던 약혼녀 에르네스티네 폰 프리켄의 고향인 아슈(Asch)를 상징한다. 이 상징적인 음은 10번 곡 'ASCH-SCHA'의 토대가 되고, 나머지 곡들에서도 심심치 않게 튀어나온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작품 '피에로' 2022.03.30 digibobos@newspim.com |
전체 곡은 약혼녀를 버리고 클라라에게 향하는 슈만의 속마음을 드러낸다. 아니마토로 생기 있게 연주하라는 14곡은 '재회'다. 슈만은 이 곡에서 클라라와의 만남을 통해 진정한 환희를 표현한다. 그리고는 15곡 '판탈롱과 콜롱비네'에서 즐겁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곡은 프레스토로 빠르게 흘러가고, 스타카토와 레가토 연주가 번갈아 나타나며 즐거운 대화를 연상케한다.
이렇게 전체적인 스토리는 카니발의 시작과 슈만의 등장을 거쳐 스핑크스 앞에서 일종의 통과의례를 거친 뒤 클라라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약속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끝이 난다. 슈만의 카니발엔 이처럼 자신이 의도한 많은 이야기들을 상징으로 풀어내놓았다. 피아노곡으로 자신의 하고 싶은 이야기, 자신의 욕망을 분출한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작품 '프롬나드(Promnade) 2022.03.30 digibobos@newspim.com |
사진작가 구본숙(53)의 욕망은 이런 슈만의 가면무도회를 자신의 사진으로 풀어내는 것이었다.
"슈만의 카니발에 주목한 것은 하루키 때문이었다. 하루키 단편소설집 '1인칭 단수'는 8개의 단편소설을 모았는데, 그 중 하나의 제목이 '카니발'이다. 그리고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내가 만약 무인도를 간다면 슈만의 카니발을 들고 가겠다'. 그때부터 슈만의 카니발이 내 열망을 부추겼다. 사진으로 그 욕망을 풀어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문제였다. 카니발을, 피아노곡을 어떻게 사진으로 시각화할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할 때, 구본숙에게는 우리 고유의 '색동'이 먼저 떠올랐다. 카니발의 첫 인상은 흥청거림 혹은 활기참이다. 구본숙은 색동 역시 흥청거림과 활기참의 상징이라고 보았다.
평소엔 고위층과 기생한테나 허용되던 화려한 색상이 축제나 명절, 혼례 때는 누구한테나 허용되었다는 평등적 요소를 대중의 축제 카니발과 연계함으로써 음악적 사고 확장을 사진 작품으로 연결시켰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작품 '발스 알레망데(Valse allemande)' 2022.03.30 digibobos@newspim.com |
3월 24일부터 31일(목)까지 평창동 갤러리 '수애뇨339'에서 열린 구본숙 사진전 <카니발>에는 모두 20개의 작품이 걸렸다. 모두 21개 곡인데, 작품이 20개인 까닭은 8번곡 '응답과 스핑크스'의 '스핑크스' 대목에서 슈만이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음악적 암호를 의도적으로 설치해 놓아 일종의 수수께끼가 되어버려 대부분 피아니스트들이 이를 생략한 채 연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본숙의 사진에서는 색동의 색상 배열의 규칙적인 반복성이 가지는 안정감과 채도가 높은 순색을 등 간격으로 배치함으로써 경쾌하고 선명하며 명랑한 정서를 자아낸다. 빨강과 파랑과 노랑으로 건너가는 그 사이에 무한한 울림, 창조적 확장이 존재한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작품 '키아리나(Chiarina)'2022.03.30 digibobos@newspim.com |
피아니스트들이 작품의 모델로 나선 것도 '명랑한 해석의 확장'이다. 오색을 두른 왕, 기생, 광대, 여인 등을 각 곡의 주인공으로 각각 정했는데 모델이 필요했다.
"피아노곡인 만큼 피사체가 피아니스트면 좋겠다 싶어 먼저 피아니스트 김태형에게 제안했는데, '그거 재밌겠는데'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래서 다른 분들에게도 얘기를 꺼냈더니 모두 흔쾌히 응해주셨다. 덕분에 아주 즐거운 작업이 됐다. 피아노 연주는 그냥 건반만 두드리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는 연출 작업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피아니스트들은 사진기 앞에서 얼어붙지 않고 자신들의 표정을 잘 나타냈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작품 '코케트(Coquette)'2022.03.30 digibobos@newspim.com |
그렇게 피아니스트 김태형(경희대 교수)은 피에로, 김규연(서울대 교수)은 어우동 모자를 쓴 기생, 조재혁은 왕, 이효주는 지체 높은 여인, 정지원은 어릿광대로 변신했다. 김규연 교수는 흔히 요부(妖婦)로 번역되는 7번째 곡 '코케트(Coquette)'를 사진으로 표현하기 위해 조선 시대 여인들이 나들이할 때 사용했던 전모(氈帽)를 썼다.
피아니스트 이효주는 나중에 부인이 되는 클라라를 담은 11번째 곡 '키아리나'를 위해 신윤복의 '미인도'처럼 가체(加髢·부인들이 머리를 꾸미기 위해 다른 머리를 덧붙인 것)를 얹었다. 슈만의 클라라에 신윤복의 미인을 대체시킨 것이다.
사진작가가 이렇듯 피아니스트를 비롯한 예술가들과 많은 교분을 쌓은 까닭은 구본숙이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의 상주 사진작가이자 예술감독으로 2004년부터 2019년까지 일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손열음·김선욱·조성진,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이유라 등 수많은 연주와 인물 사진을 찍었다. 음악과 관련한 여러 사진 작업에도 참여했다. 지난해에도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3중주 1번을 주제로 사진을 찍어 전시회를 열었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작품 '판탈롱과 콜롱비느(Pamtalon et Colomnbine) 2022.03.30 digibobos@newspim.com |
사실 구본숙은 "클래식은 1도 몰랐던" 체육과 운동선수 출신이다. 농구를 했다. 그런데 '으뜸과 버금' 비디오 대여점에서 같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사진과 학생에게 한두달 쯤 사진을 배웠고, 사이판에 놀러가서 스노클링하는 부부 관광객들 사진 찍어주다가 흥미를 느꼈다.
"사이판 호텔 침대에 누워있는데, 벽도 하얀색, 커튼도 하얀색, 시트도 하얀색이어서 그게 묘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뭔가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에 돌아와 바로 캐논 EOS 5를 샀다."
그렇게 사이판 여행과 '캐논 EOS 5'가 구본숙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금호재단 예술감독도 사간동에 있던 금호아트홀에서 영상기록을 담당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경력이 쌓여서 발탁이 됐다.
[서울=뉴스핌] 조용준 기자 = 작가 구본숙. 2022.03.30 digibobos@newspim.com |
구본숙은 지난 2016년 개인전 <Heterophony>를 열었다. 제주도와 오대산 월정사 부근에서 틈틈이 담은 사진들이었는데, 제목은 '헤테로포니'라니.
헤테로포니(Heterophony)는 동일한 선율을 한 가지 이상의 방식으로 동시에 연주하는 것, 즉 같은 선율을 여러 사람이 함께 연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약간씩 서로 다르게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헤테로포니 음악은 화성적 바탕 위에서 작곡된 것이 아니라, 즉흥적 집단 연주에서 한 선율에 다양성을 주기 위해서 발생한다. 이는 플라톤이 처음 사용한 용어였는데, 음악학자 슈툼프(C. Stumph)에 의해 즉흥 연주 형태의 다성음악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구본숙은 이 사진전에서도 풍경에 음악과 조화를 이루는 작업이 덧입혔다. 제목에 페르마타, 게네랄 파우제, 톤 클러스터, 리피트 마크 등의 음악적인 용어들이 등장한다. 찰나의 사진들이 음악의 용어와 어우러져서 깊은 울림을 주었다. 무채색에 가까운 톤의 색감이나, 안개가 드리운 풍경, 자작나무의 흔들리는 순간의 모습들이 마치 다양한 음악 용어처럼 마음에 다가오게 했다.
구본숙은 말한다. "헤트로포니가 자연과 음악의 만남이라면, 이번 사진전 카니발은 음악과 인간의 만남이다. 앞으로의 작업은 음악과 자연, 인간이 만나는 지점을 표현하고 싶다."
슈만 카니발의 21번째 곡은 '아니마토 몰토'로 발랄하게 이어지면서 긍정적이고 희망에 찬 모습을 담는다. 마지막은 '스트레토'로 양손이 서로 바통을 잇듯이 음을 주고받으며 '카니발'의 끝을 장식한다. 구본숙이 앞으로 펼쳐낼 '아니마토 몰토 비바체'를 기대한다.
구본숙 사진전 '카니발'은 서울 전시가 끝나면 4월 20일부터 밀양 청학서점에서 전시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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