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헤즈볼라 수장 나스랄라 폭사가 변곡점… "이란 강경파에 호재"
3일 후 열린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에서 이스라엘 미사일 공격 결정
[런던=뉴스핌] 장일현 특파원 = 이란의 권력 지형에서 반미·반이스라엘 강경파가 득세하고, 개혁·실용 성향의 마수드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영향력을 잃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7월 국내외 예상을 뒤엎고 깜짝 당선된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불과 3개월 만에 정국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이스라엘의 정밀 폭격으로 레바논 친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의 수장 하산 나스랄라(64)가 폭사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 7월 6일(현지시간) 수도 테헤란 남부에 있는 아야툴라 호메이니 묘소에 모인 지지자들에 V 사인을 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뉴스핌] |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2일 "(나스랄라 폭사는) 페제시키안 대통령의 당선으로 굴욕을 당한 이란 강경파에게 호재로 작용했다"면서 "그들은 미국의 압력을 묵인하고 자제를 촉구한 개혁주의 대통령(페제시키안)과 그의 고위 외교관·보좌관들을 비판할 기회를 잡았다"고 말했다.
이란은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결합된 신정일치(神政一致) 체제로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국가의 모든 주요 정책을 결정하지만 직선제로 선출되는 대통령이 최고지도자에 대해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단적인 모습은 지난달 30일 열린 이란의 최고국가안보위원회 회의에서 표출됐다. 이란의 최고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였다. 나스랄라 사망 3일 만에 열린 이 회의에서 이란의 군부 강경파는 이스라엘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을 주장했고, 최고지도자인 하메네이가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군 지휘관들은 "우리가 (이스라엘에) 보복하지 않으면 (헤즈볼라·하마스·후티 등) 지지자를 잃고 (저항의 축의 중심이자 최대 후원자로서의) 명성이 심하게 훼손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 정부 관계자는 "페제시키안 대통령도 많은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논쟁을 할 수도 없고, 군 지도자들에게 어떤 조치도 취하지 말라고 설득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이튿날 이란 혁명수비대는 이스라엘을 향해 180여발의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란은 최근 2~3개월 동안 서방·이스라엘과의 충돌을 극도로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7월 말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무장정파 정치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암살을 당하자 곧바로 '피의 보복'을 선언했지만 실제 행동에는 나서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이어 이란의 최대 대리세력(proxy·프록시)으로 평가받는 헤즈볼라에 대대적인 공습을 이어가는데도 "때가 아니다"라며 몸을 사렸다. 헤즈볼라 등이 도움을 요청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즉각적인 군사적 대응을 주문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란은 자신들의 생존과 이익만 챙기고 대리세력이 궤멸되고 있는 상황을 못본체 한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아랍 특히 시아파 진영에서 "이런 굴욕을 언제까지 참아야 하느냐"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40년 넘게 이란을 대신해 이스라엘을 상대로 무력 투쟁을 벌여왔고, 이란 대리세력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헤즈볼라의 수장이 제거되자 이란도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미사일 공격으로 어쩔 수 없이 전면에 나서게 된 이란이 이스라엘·미국을 상대로 계속 강공을 밀고 나갈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란은 미사일 공격 직후 "이스라엘 정권이 추가 보복을 결정하지 않는 한 테헤란의 행동은 끝났다"고 밝혔다. 이스라엘도 보복을 공언하고 있지만 미국·유럽 등 서방 진영은 "핵 시설이나 정유 공장 등은 타격하지 말라"고 만류하고 있다.
특히 이란은 서방과의 핵합의 복원을 통한 제재 해제를 원하고 있어 이스라엘과의 전면전 위기를 잘 넘긴다면 오히려 화해 무드가 빠르게 조성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페제시키안의 주도권은 다시 회복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