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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12월3일 22시27분

기사입력 : 2024년12월05일 16:04

최종수정 : 2024년12월05일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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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이바름 기자 = "별 일 없을 거야."

잠을 자고 있던 아내에게 웃으며 인사한 뒤, 두꺼운 외투에 노트북을 들고서 집을 나섰다. 택시를 불러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약 1시간, 이동하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떨렸다. 대한민국 역사의 바로 위에 서 있었다. 고교시절 근현대사 과목에서나 봤던 계엄이 선포되고, 모든 시선은 국회로 향해 있었다. 역사 속의 계엄은 '피'와 '폭력', 그리고 '저항'의 동의어였다. 국회와 가까워질수록 경찰을 태운 대형 승합차들이 도로변을 가득 채웠다.

이바름 정치부 기자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 해제를 위해서는 상황이 평상상태로 회복되거나, 국회가 해제를 요구해야 한다. 당장 실현 가능한 건 국회의 해제 요구밖에 없었다. 12월 3일 오후 10시27분, 생중계로 윤 대통령의 입에서 계엄이 선포된 이후 150명의 국회의원이 최대한 빨리 국회에 모여 본회의를 열고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켜야 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등이 모든 의원들에게 국회로 모여달라고 공지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동시에 뉴스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군(軍)과 경찰 병력들이 국회를 포위하며 주변을 봉쇄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국회3문에서 500m 떨어진 곳에서부터 차량 정체가 시작됐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입구는 경찰 대형버스와 순찰차 등으로 막아 차량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고, 그 뒤를 인력이 막고 있었다. 출입증을 보여도 제지당했다. 다른 문들도 마찬가지였다. 경찰들은 3~5m 간격으로 국회를 둘러싸고 모든 이들의 출입을 막았다. 주위가 소홀한 틈을 타 1.5m 높이의 국회 담을 넘었고, 곧장 본관으로 향했다.

계엄법에는 계엄사령관이 비상계엄지역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에 대한 특별조치를 할 수 있으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에는 국민의 재산을 파괴 또는 소각(燒却)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별조치로 계엄군이 본회의 개의 권한을 갖고 있는 '국회의장'을 어떤 명분으로 체포·구금할 수도 있다는 예측도 나왔다. 의장이 계엄군에 구금된다면 계엄 해제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국회 본관 정면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소총과 방탄조끼로 무장하고 내부로 진입하려는 계엄군들을 막기 위해 국회 보좌진·직원, 기자들은 실내에서 책상과 의자, 소파 등을 겹겹이 쌓았다. 다른 문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보좌진·직원, 기자들의 빠른 대처로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 본관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모두 차단됐다.

그러자 계엄군은 본관 우측면으로 돌아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실 유리를 파손하고 실내로 진입했다. 오전 0시 30분을 전후한 시각이었다. 당시 우 의장 등은 본청 3층 본회의장에서 본회의 개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2층으로 진입한 10여 명의 계엄군이 우 의장을 비롯해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을 체포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러려면 로텐더홀을 지나쳐야만 했다.

당시 로텐더홀에 모여 있던 수백여 명의 보좌진·직원, 기자들은 계엄군들을 막기 위해 모든 출입문에 의자 등을 쌓아 저지했다. 누군가는 소화전을 이용해 계엄군들의 본회의장 진입을 멈춰세우기도 했다. 무장한 계엄군을 용기있게 맨손으로 붙잡고 늘어지거나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최대한 본회의에서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시간을 끄는데 주력했다.

계엄군은 4층으로 이동해 3층으로 재진입을 시도했다. 역시나 4층에 있던 보좌진·직원, 기자들이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서 맨몸으로 막아냈다. "남자분들 의자 좀 더 가져다주세요."

"성원이 되었으므로…" 우 의장의 의사봉 소리에 본회의장에 울려퍼지고, 안건으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올라왔다. 의원들 사이에서 "빨리 하세요", "보좌진이 지금 몸으로 막고 있다고요" 등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 의장은 "전국에 생중계되고 있으니까 차분하게 합시다"라며 의원들을 진정시켰다. "재석 190인 중 찬성 190인으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은 가결됐음을 선포합니다."

세 번의 의사봉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함성과 박수가 로텐더홀을 가득 채웠다. 4일 오전 1시였다. 계엄 선포 후 약 150분간의 치열한 사투였다. 윤 대통령은 약 3시간 30분 뒤인 오전 4시27분이 돼서야 대국민 담화를 통해 "군을 철수시켰다"면서 "국무회의를 소집해 계엄을 해제하겠다"고 밝혔다.

right@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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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일본군 무장해제 "항복사실 모르느냐?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전의(戰意)가 없는 것을 보이기 위해 기관단총을 모두 어깨에 걸쳤다. 그러고도 만일을 위해서 각각 산개하면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몸을 날렸다. 아. 그때 그 바람 냄새, 그 공기의 열기, 아른대는 포플러의 아지랑이, 그리고는 아무것도 순간적이었지만 보이지 아니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가? 우리 주변엔 돌격 태세에 착검한 일본군이 포위하고 있었다. 워커 구두 밑의 여의도 모래가 발을 구르게 했다. 코끼리 콧대 같은 고무관을 제독총에 연결한 험상궂은 방독면을 뒤집어쓴 일본군이 차차 비행기를 중심으로 원거리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너무나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것이 그리던 조국 땅을 밟고 처음 맞은 분위기였다. 동지들은 눈빛을 무섭게 빛내면서 사주경계를 했다. 그러나 아직 기관단총을 거머쥐지는 아니했다. 여의도의 공기가 움직이지 않는 고체처럼 조여들어 왔다. 뿐만 아니었다. 타고 온 C46형 수송기로부터 한 50여m 떨어진 곳의 격납고 앞에는 실히 1개 중대나 되는 군인들이 일본도를 뽑아 든 한 장교에게 인솔되어 정렬해 있었다. 그 앞에는 고급장교인 듯한 자들이 한 줄 또 섰고, 장군 몇 명도 있는 듯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8월 18일 한낮의 그 뜨거운 여의도 열기가 우리를 더욱 긴장시켰다. 격납고 뒤에까지 무장한 군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중형전차의 기관포도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환호하는 광복군.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비행장 아스팔트 위엔 한여름의 복사열이 그 위기의 긴장처럼 이글대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땀에 젖어 있었다. 기막힌 침묵이 십여 분이나 지났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행동도 취해 오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가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일본군 고급 장교들이 늘어선 쪽으로 한걸음 씩 움직였다. 각자 산개, 조심하라! 누군가가 이렇게 나직하게 말했다. 서해 연안으로 비행기가 고도를 낮출 때 누군가가 유서를 쓰던 일이 이 순간 내 머릿속에서 상기되었다. 일본군 병사들은 우리가 다가서자 의외로 포위망을 풀 듯이 비켜섰다. 우리는 아직 기관단총을 어깨에 멘 그대로였다. 일본군이 길을 열어주자, 그들도 일본군 육군 중장을 선두로 한 장교단이 우리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조선주차군사령관 죠오쯔끼(上月良夫)였다. 쬬오쯔기는 그의 참모장 이하라 소장과 나남 사단장과 참모들을 뒤로 거느렸다. 우리도 좌우로 벌려 섰다. 쬬오쯔기가 「나니시니 이라시따노?(무슨 일로 왔소?)」말문을 열었다. 퍽 야무지게 보였다. 우리는 말 대신 영등포 상공에서 뿌리다 남긴 선전 전단을 내밀어 주었다. 우리의 임무가 일본어와 우리말로 적힌 전단이었다. 거긴 또 우리가 이렇게 들어오게 된 사연도 적혀있었다. 우리는 한 장씩 그 전단을 다른 일본군 장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쬬오쯔끼는 이를 받아 읽고, "일본은 정전만 한 상태이니 일단 돌아갔다가 휴전 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재입국하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위협했다. 자기네 병사들이 꽤 흥분되어 있으니, 만약 돌아가지 않으면 그 신변 보호에 안전책임을 지기가 어렵다는 분위기라고 했다. 이에 이범석 장군이 "네 놈들의 천황이 이미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사실을 모르느냐? 이제부터는 동경의 지시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맞섰다. 그러나 쉽사리 양보하지 않았다. 옥신각신 말이 몇 번 건너 왔다 갔다. 갑자기 쬬오쯔끼는 한 일본군 대령에게 일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그는 동경서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어 마중을 나와 있던 참이란 말을 하고는 물러가 버렸다" 이범석 장군은 일본군 측에 "조선 총독을 만나 담판 짓겠다'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일본군 무장해제 임무를 띠고 국내로 들어 온 '광복군 국내정진군'은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한 채 다음 날 8월 19일 14:30분 여의도 기지를 이륙하여 중국으로 돌아갔다. 광복군은 미군정이 시작되고 나서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조짐이 좋지 않았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2025-09-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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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기차 주행거리 두배 증가 배터리 개발 [베이징=뉴스핌] 조용성 특파원 = 중국이 에너지 밀도를 두 배 증가시킬 수 있는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해 낸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칭화(淸華)대학 화학공학과의 연구팀은 '음이온이 풍부한 용매화 구조 설계'를 개발해 냈으며, 이를 기반으로 불소 함유 폴리에테르 전해질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고 중국 관찰자망이 30일 전했다. 해당 연구 성과는 논문 형식으로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에 등재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폴리에테르 전해질은 고체이며, 연구팀은 해당 전해질을 사용하여 전고체 배터리를 제작했다. 제작된 전고체 배터리는 604Wh/kg의 에너지 밀도를 기록했다. 이는 현재 리튬 이온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가 150~320Wh/kg인 점을 감안하면 에너지 밀도가 두 배 이상 높아진 것이다. 동일한 무게의 배터리이지만 해당 전해질을 사용한 전고체 배터리는 두 배 이상의 전력을 충전할 수 있는 셈이다. 이론적으로 전기차의 1회 충전 주행 거리가 두 배 증가할 수 있게 된다. 현재 500km가량을 주행할 수 있는 전기차가 1000km를 주행할 수 있게 된다. 해당 전고체 배터리는 안전성 테스트도 통과하였다. 못을 박아도 화재와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120도의 높은 온도의 박스 안에 6시간 동안 방치되었지만, 연소나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500회 이상 충방전을 거치면서도 에너지 저장 용량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전고체 배터리가 상용화된다면 많은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해진다. 전기차의 주행 거리는 두 배 증가하며, 드론의 비행 거리도 두 배 증가하게 된다. ESS(에너지저장장치) 역시 부피당 저장 용량을 크게 끌어올리게 되며 ESS 소형화가 가능해진다. 칭화대 연구진이 개발한 전고체 전해질의 도식도 [사진=네이처 캡처] ys1744@newspim.com 2025-09-3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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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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