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1960년 대한민국은 1인당 소득 79달러의 최빈국이었다.
- 국민 대다수가 기생충과 전염병에 시달리며 생존을 위협받았다.
- 제2공화국은 민주화 열망 속에서도 제도적 규율 부족에 직면했다.
!AI가 자동 생성한 요약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2편: 제2공화국 내각책임제의 실험과 또 한번의 좌절
1960년 봄, 대한민국 국민들이 마주하고 있던 삶의 현실은 냉혹했다. 유엔 통계연감(UN Statistical Yearbook)과 한국은행 자료를 보면, 1960년 대한민국의 1인당 명목 국민총소득(GNI)은 고작 79달러(한국은행 기준 약 82달러)에 불과했다.
경제사학자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의 구매력평가(PPP) 기준 1인당 실질 GDP 데이터베이스를 보아도, 당시 한국은 약 1,100~1,200달러 선에 머물며 전 세계 최하위 빈곤국 그룹에 속해 있었다.
이 통계 결과는 당시 갓 독립을 선포했거나 탈식민의 길을 걷던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과 비교할 때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시카고대학교 로버트 루카스(Robert E. Lucas) 교수는 1993년 계량경제학의 최고 권위지인 에코노메트리카(Econometrica)에 발표한 기적 만들기(Making a miracle)라는 논문에서 1960년 당시의 출발선을 생생하게 비교해 보여준 바 있다.

루카스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1960년 필리핀과 아프리카 가나, 그리고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과 전반적인 생활수준을 비교했을 때 한국은 더 가난했다. 영연방 체제 아래 안정적 농산물 수출 기반을 갖추었던 가나는 한국보다 더 높은 1인당 소득과 풍요로운 자원을 누리고 있었다. 가나뿐 아니라 세네갈이나 라이베리아, 케냐나 나이지리아와 비교해도 한국의 1인당 소득은 이들보다 낮았다.
보건과 위생 인프라는 더욱 열악했다. 당시 세계보건기구(WHO)의 역학 보고(World Health Organization, Control of Ascariasis: Technical Report Series No. 379, 1967)와 대한민국 보건사회부·한국기생충박멸협회 (1971), 《제1차 전국 장내기생충 감염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던 위생 환경 탓에 1960년 전후 전 국민의 장내 기생충 총 감염률은 84.3%, 1인당 중복 감염을 합산한 누적 감염률은 147.1%에 달했다(회충 54.9%, 편충 65.4%, 십이지장충/구충 10.7% 등).
인구 대다수가 몸속에 기생충을 품고 살아간 탓에 귀중한 영양분을 빼앗겼고, 여기에 결핵과 장티푸스 등 전염병까지 창궐해 국민의 생명을 상시로 위협했다.
4·19 혁명으로 독재를 무너뜨린 민초들의 환희 이면에는 이처럼 하루하루 굶주림과 질병의 질곡을 버텨내야 했던 처절한 생존의 비명이 배어 있었다. 1960년 출범한 제2공화국은 이와 같은 절대빈곤의 위기 속에서 정치적 과제를 마주하고 있었다.
4·19 혁명으로 분출된 민주화의 열망은 12년 권위주의 독재의 사슬을 끊어내겠다는 정치적 자유의 폭발이었으나, 그 이면의 가장 깊은 동력은 이 참담한 궁핍의 절망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민초들의 원초적 생존권 투쟁이었다.
정치가 국민의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하고 법치가 사회적 최저선의 생존조차 보장하지 못할 때, 갓 태어난 민주주의의 제도적 기반이 얼마나 모래성처럼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지를 1960년 봄의 객관적 지표들은 명확히 증언하고 있다.

정치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고, 주린 배를 채우며,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공동체를 지켜내는 것보다 더 본원적인 정치의 사명은 없다. 하지만 자생적 민주주의의 기반이 전무한 상태에서 출발한 대한민국은 제1공화국의 실패 이후 시작된 또 하나의 민주주의 실험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민주주의 이행과 공고화를 연구한 후안 린츠(Juan J. Linz)와 알프레드 스테판(Alfred Stepan)은 명저 《민주주의 이행과 공고화의 문제(Problems of Democratic Transition and Consolidation)》(1996)에서, 민주화 이행의 성공이 곧바로 민주주의의 영속적 안착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진정한 공고화는 정치 행위자 모두가 민주주의와 헌법적 합의만이 유일한 게임의 규칙임을 내면화하고, 사회적 갈등을 흡수할 수 있는 제도적 통치 역량과 원내 규율을 갖추었을 때에만 완성된다는 것이다.
강원택 교수는 저서 《한국의 정치개혁과 민주주의》(2005)를 비롯한 다수의 헌정 연구를 통해, 제2공화국의 내각책임제 실험이 지닌 구조적 취약성을 짚어낸 바 있다.
강 교수는 독재 타도라는 단일한 표적이 사라진 상태에서 정당 내부의 분파적 파벌주의를 제어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매개 기제가 전무했으며, 이로 인해 신생 정권이 사회적 분출을 여과하거나 규율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표류했다고 진단한다.
이는 일찍이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이 불후의 고전 《소용돌이의 한국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1968)에서 갈파했던 구조적 비극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사회 전반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완충하고 수렴할 중간 결사체가 극도로 취약했던 한국 사회에서, 권위주의적 억압이라는 통제 마개가 단숨에 사라지자 억눌렸던 모든 계층의 욕망과 분노, 사회적 요구는 국회본회의장으로 수렴될 수 밖에 없었다.
국민적 시선이 집중된 국회의 분위기를 기록한 제5대 국회 속기록 원문을 들여다보면, 출발선의 풍경은 사뭇 밝았다. 12년간의 침묵과 공포가 걷힌 자리에는 민주주의의 회복을 자축하는 환희, 동료 의원에 대한 깊은 예우, 그리고 첫 양원제 도입 과정의 서투름을 유쾌하게 녹여내는 해학과 웃음이 풍성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1960년 8월 8일 오전 10시, 제5대 국회 민의원·참의원 합동회의 제1차 본회의 속기록은 새로운 헌정 질서를 선포하던 감격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한글과 한자의 혼용체로 된 속기록 내용을 모두 읽기 쉽게 한글로 바꿔 서술했다.
참의원 의장 임시의장 백낙준: …역사적인 4·19 혁명의 숭고한 희생 위에서 우리 민의원과 참의원이 오늘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새 공화국의 출범을 선언하게 된 것은 민족사의 축복이자 헌정의 영광입니다. (박수) 비록 우리 국회가 처음으로 양원제를 실시하므로 초보적인 의사진행에 다소 이견과 서투른 점이 있을지라도, 국가의 재건과 민주주의의 확립이라는 대의 앞에서는 민의원과 참의원, 그리고 여와 야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 양보하고 협조하여 국민의 기대에 부응합시다.
[전체 의원 일제히 기립하여 열렬한 박수, 장내 환호, 만면에 미소]
이날 본회의장을 가득 메운 기립 박수와 환호는 민주공화국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축포였다. 속기록에 활자화된 만면의 미소라는 지문은, 총칼과 폭력의 위협에서 벗어난 의원들이 서로를 동등한 헌법적 주체로 인정하며 맞이했던 짧은 평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화합과 해학의 분위기는 원구성 과정에서 낯선 의회 규정에 적응해 가던 의원들의 대화 속에서도 뚜렷이 확인된다. 1960년 8월 13일 참의원 제4차 본회의 속기록을 보면, 상임위원장 선출 방식과 각 분과위원회 배분을 두고 절차상 혼선이 빚어지자 원로 의원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긴장을 푸는 장면이 나타난다. 무소속 김용우 참의원 의원은 연단에 올라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김용우 의원: 의원 여러분, 우리가 처음으로 양원제를 운영하다 보니 의사규칙 책자를 몇 번씩 들춰보아도 손발이 잘 맞지 않고 헷갈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12년 동안 빼앗겼던 참된 민주주의를 스스로 배워나가는 아주 값진 수업료 아니겠습니까. (웃음) 조금 서툴더라도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웃는 낯으로 양보하면서 하나씩 배워나갑시다.
[장내 폭소, 박수]
참의원 의장 백낙준: 옳으신 말씀입니다. 서툴러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국회가, 군경의 총칼에 짓눌려 숨죽이고 있던 지난 시절의 의사당보다 백 배, 천 배 낫지 않습니까. 의원 여러분, 여유를 가지시고 차근차근 질서를 잡아 나갑시다.

초기 민의원 회의록에서도 민생 법안과 경제 재건을 논의할 때 정파를 초월한 상호 존중과 격려가 확인된다. 1960년 8월 18일 민의원 제7차 본회의에서 윤제술 의원이 연단에 올라 혁명 직후의 도탄에 빠진 경제 상황을 지적하며 열변을 토했을 때의 기록이다.
윤제술 의원: …국민들은 지금 헐벗고 굶주린 채 우리 국회만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4·19의 피 흘린 학생들이 목숨을 바쳐 세워준 이 민주정부에서, 우리 의원들이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고 밤을 새워 일하지 않는다면 무슨 낯으로 국민을 보겠습니까. 정파를 떠나 이번 임시회에서는 오직 굶주린 민생을 살리는 법안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여야 의석 일제히 박수, 윤 의원 말씀이 백번 옳소!, 밤을 새워 일합시다! 호응]
이 시기만 해도 의회 언어의 품격과 상호존중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상대방의 정책적 견해를 경청하려 했고, 국가 재건이라는 거대한 과제 앞에서 동료 의원을 향한 배려와 유머가 공존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자율적 공론장을 지탱해 줄 내부 규율의 제도화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근대 의회제도의 역사에서 의원의 신체와 발언을 외부 권력으로부터 지키는 방패인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은, 반드시 원내 언어가 폭력과 방종으로 치닫지 않도록 통제하는 의장의 강력한 질서유지권 및 엄격한 원내 징계 제도와 상호 결합되어야만 기능한다.
영국의 에티켓 규범이나 미국 하원의 규칙 위반 호명(Words Taken Down) 제도, 프랑스 국민의회의 세비 삭감 및 등원 금지 처분처럼 의회는 자유의 대가로 엄격한 내향적 칼날을 갖추어야 했다.
그러나 제2공화국 국회는 권위주의의 억압을 걷어내는 데만 몰두한 나머지, 헌법적 특권을 부여받은 의원들의 거친 언어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했고, 의장도 이를 적절하게 견제하지 못했다.
억압의 둑이 터지며 터져 나온 자유는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방종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었고, 파벌 간의 이기적 권력 다툼이 시작되자마자 이 아름다운 화합의 언어는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달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
kimsh@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