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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후보 인물탐구①] 운명을 마주한 '준비된 대통령' 문재인, "권력의지를 갖다"

기사입력 : 2017년03월16일 10:59

최종수정 : 2017년04월03일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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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감과 도덕성…정권교체 바라는 촛불민심에 '대세론' 떠올라
패권주의 논란·확장성 '한계'…매머드급 人材영입, 잇단 설화 우려

[뉴스핌=이윤애 기자] '문재인 대세론'이 깨지지 않고 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대통령 탄핵정국 속에서 대세로 떠올라 압도적인 1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촛불민심이 '이게 나라냐'고 자괴감을 표할 때 "정권교체를 통해 구시대와 구체제의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국가대개조를 이룰 수 있다"고 외쳤다. '준비된 대통령'의 이미지와 도덕성, 삶의 궤적 등은 그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했다. 하지만 '패권주의' 논란과 확장성 부족 등은 풀어나가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3월 청와대에서 문재인 당시 비서실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사진=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선택의 순간 : "운명이 이끌어" → "내가 대세", "자신있다"

문 전 대표의 삶에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절대적인 존재다. 그는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지만 학창시절 시위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에서 탈락했다. 좌절하고 번민하던 시절, 그의 말마따나 운명처럼 '변호사 노무현'을 만나 평생의 동지로 선택했다. 30년 인연의 시작이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인권변호사 생활을 함께 했고, 이후 노 전 대통령의 정치행보에 따라 한몸처럼 움직였다. 2002년 대선에선 부산 선대위원장을 맡았고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시민사회수석비서관,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노 전 대통령 탄핵소추 당시엔 탄핵심판 간사 변호인을, 2009년 서거 당시에는 '국민장 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수많은 별명 중에 노무현 그림자라는 별명이 가장 좋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문 전 대표는 2012년 "끝내 피하고 싶었던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며 부산 사상구에서 19대 총선에 뛰어들었다. 과거 인권변호사 시절 정치입문 제의를 여러차례 받았지만 모두 거절할 정도로 관심이 없었다. 그는 "노무현은 지키지 못했지만 노무현 정신만은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MB(이명박) 정권을 심판하고 부산의 운명을 바꾸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자신의 책에 "운명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 온 것 같다"고 적었다. 

5년이 지난 2017년, 그는 단단해지고 강인해졌다. 말도, 얼굴인상도 바뀌었다는 말을 듣는다. "내가 대세인 것 같다"고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다. 정견발표를 할 때면 "자신있다"는 말을 반복한다. 주변에서는 그를 두고 "이제서야 비로소 권력의지를 갖게 된 것 같다"고 평한다. 그에게서 가장 부족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정답처럼 나오던 게 바로 '권력의지'였다. 문 전대표는 이번 대선에서 배수진을 쳤다. 만약 떨어진다면, 정치인생을 끝내겠다고 했다. 지난 20대 총선에 나오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지난해 탄핵정국에서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문재인의 호소(號召)'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김학선 사진기자>

◆ 문재인의 말말말 : "국민 의견은 물어봤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4수 만에 대통령이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5선 의원을 지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88년 정계입문 후 2003년 대통령이 됐다. 역대 대통령과 비교하면 문 전 대표의 정치 경력은 매우 짧다. 이 때문에 그의 정치화법은 때로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은 국민들의 힘으로 이뤄진다", "개헌? 국민 의견은 물어봤나"

촛불민심 속에서 문 전 대표의 말에는 '국민'이 자주 등장했다. 민주당 경선 토론회에서 보수정당을 끌어안지 않는 소연정으론 적폐청산을 위한 개혁입법 추진이 어렵지 않겠냐는 물음에 '국민의 힘'으로 이루면 된다고 했다. 민주당을 제외한 3당의 개헌 합의에 대해서는 '국민 의견'을 물어야 한다고 맞섰다. '국민'이란 거대 추상명사보다는 구체적이고 실행가능한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아쉬움이 나온다. 

"저에 대한 지지를 거두시겠다면 미련 없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겠다"

정치인에게 정계은퇴 발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쉽게 내뱉어서도 안된다. 문 전 대표는 지난해 4·13 총선 당시 호남의 심장부인 광주에서 정계은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민주당은 호남 28석 중 단 3석을 얻었다. 섣부른 말은 상당기간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광주와 호남에서 우리 당이 지지받기 위한 전략적인 판단이었다"며 "그것이 광주 시민이나 호남 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게 있다면 죄송하다"고 해명해야 했다.

"기억이 잘 안 난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회고록 논란 당시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결정 과정과 관련해 "솔직히 그 사실조차 기억이 잘 안난다", 기억이 좋은 분들에게 들으라"며 답변을 회피했다. 이에 대해 야권에서도 "대선 주자의 태도로는 적절치 않다"는 우려가 나왔다.

◆삶과 정치여정 : "검증이 끝난 후보", "부와 맞바꾼 자부심"

문 전 대표는 스스로 "검증이 끝난 후보",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청렴 강직한 성품과 올곧은 소신의 소유자라는 평가는 그의 최대 정치적 자산이다. 그의 부인 김정숙 여사는 "과거 매년 임금협상하듯 테이블에 앉아 그해 생활비 인상협상을 했다"며 '부와 맞바꾼 자부심'이라고 표현했다. 캠프에선 바로 이것이 대세론 형성의 밑거름이라 평가한다.

그는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경남 거제도로 피난했다. 2남 3녀 중 장남인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1972년 재수 끝에 4년 장학금을 주는 경희대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해 10월 유신이 선포됐고, 그의 인생에서 변곡점으로 작용했다.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 수감되고, 학교에서도 제적당했다. 강제징집 돼 특전사에 복무했다. 전역 후 다시 거리투쟁에 나섰고 또 다시 구속됐다. 그는 철창 안에서 제22회 사법고시 합격 소식을 들었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친구를 일체 만나지 않았다. 김정숙 여사에게도 백화점 출입을 금지시켰다. 공직자 부인들과의 교류에도 신중을 기울이라고 당부했다. 그는 자신의 지위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미리 차단했다.

◆좌우명 : 어려울수록 원칙으로 돌아가라

문 전 대표는 어려울수록 정공법을 택한다. 때로 불리해 보이는 선택이라도 '원칙'이라면 지킨다. 이 때문에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정치인으로서 강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참여정부의 호남홀대론에 대한 태도에서도 이런 원칙이 묻어난다. 호남홀대론이 나올 때마다 "인사문제에선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강하게 반박한다. "국세청장, 법무장관, 국정원장, 감사원장 등 권력기관장도 호남이 가장 많았고, 국가의전서열 10위 가운데 보통 5~6명은 호남 출신이었다. 법무장관, 검찰총장, 국정원장이 다 호남일 때도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문재인이 호남홀대의 주범이다. 인사학살을 했다'는 식으로 됐는데, 이것은 저를 공격하는 프레임"이라고 맞서고 있다. 

그의 원칙은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일자리대통령'을 강조하며 참여정부에서 '실패했던' 사회경제적 문제 해결을 마무리짓겠다고 했다. 그가 보기에 참여정부는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시대정신 구현에는 성공했지만, 양극화와 비정규직 등 사회경제적인 부분에서는 실패했다. 미완의 과제를 자신이 매듭짓겠다고 나섰다.

문재인의 사람들 : "3철은 없다", 매머드급 인재영입

문 전 대표는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구호에 맞게 역대급 캠프를 꾸려가고 있다. 대통령 당선 후 인수위원회 없이 즉각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 만큼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계와 학계, 전문가 집단에서 계파, 이념, 분야를 뛰어넘어 대거 참여하고 있다. 

특히 최근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로 불렸던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 원장을 영입했다.  김 원장은 대선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싱크탱크 역할을 한 국가미래연구원을 이끌었다. 또한 '삼성 저격수'로 알려진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과 중도·진보 성향으로 사회통합을 주장해 온 김호기 연세대 교수도 합류했다. 이들 세 사람은 신설될 '새로운 대한민국 위원회'에서 활동한다.

캠프의 공동 선거대책위원장에는 전윤철 전 감사원장과 박병석·김진표 민주당 의원, 이미경·김효석 전 의원,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 등 6명을 영입했다. 문 전 대표의 대선 캠프인 '더문캠'은  2실(비서실·종합상황실) 7본부 체제로 구성돼 있다.

최측근으로 거론되는 전해철 의원,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이호철 전 민정수석은 뒷선으로 물러났다. 문 전 대표는 "어떤 철(이호철)은 오래전 지방으로 갔다. 3철은 없다"고 강조했고, 송영길 본부장은 "비선·3철, 이런 말 없게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3철의 영향력에 대해 여전히 의심한다. 18대 대선 때 문재인 캠프에서 핵심으로 뛰었던 한 비문(문재인)계 의원은 "차라리 공식적으로 직함을 주고 일을 하는 게 좋지 않겠나"라고 꼬집었다.

정책을 주도하는 싱크탱크 '정책공간 국민성장'에는 1000여명의 전문가가 참여했다. 주류·중도 성향의 경제학자인 조윤제 서강대 교수가 소장을 맡고, 조 전 교수는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경제보좌관 및 주영대사를 지냈다. 추진단장에는 김현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참여했다. 이둘이 '국민성장론'의 핵심 입안자로 꼽힌다.

이 밖에도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의 장·차관 출신 60여명이 참여한 자문단 '10년의 힘 위원회' 각 분야 전문가 지지모임인 '더불어포럼', 외교자문포럼 '국민 아그레망' 등이 있다.

다만, 이같은 매머드급 인재(人材)영입이 잇단 구설과 논란에 오르며 "인재가 인재(人災)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문재인 약력>
1952년 경남 거제 출생 / 1980년 경희대 법대 졸업·사법시험 합격 / 1982년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 시작 / 1987년 부산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 1991년 부산·경남민변 대표 / 1995년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2002년 새천년민주당 부산시대통령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 2003년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 / 2004년 대통령 시민사회수석비서관 / 2005년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 / 2006년 대통령 정무특보 / 2007년 대통령 비서실장 /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 / 2010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18대 민주통합당 대통령 선거 후보 / 2015년 새청년민주연합 대표 / 2017년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예비후보

 

[뉴스핌 Newspim] 이윤애 기자(yunyun@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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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문의 화랑담배] 제2회 광복군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 가릉호텔에서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창설식이었다. 미국 한인 동포들이 보내온 돈 4만원으로 조직한 군대였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억 원 정도 된다.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 참모장 이범석 장군, 제1지대장 이준식, 제2지대장 고운기, 제3지대장 김학규, 제5지대장에 나월환을 임명했다. 지대장은 지금의 사단장에 해당한다. 모두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를 비롯하여 남북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에 직접 참여하여 활동한 독립군 출신이었다. 한국광복군 훈련반 제1기 졸업사진. [사진= 독립기념관]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포고문을 통해 "국내외 동포들에게 알립니다. 1940년 9월 17일부로 대한민국 광복군을 창설하였습니다. 광복군은 1907년 8월 1일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 날이 바로 광복군 창설일임을 선언합니다. 광복군은 구 한국군의 후신으로 33년간에 걸친 의병과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을 계승한 전통 무장 조직입니다"라고 했다. 대한제국 국군-의병-독립군의 군맥(軍脈)과 군혼(軍魂)을 분명하게 잇고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부대 편성은 소대, 중대, 대대, 연대, 여단, 사단 6단으로 편성하였다. 총 3개 사단을 조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인원이 적은 상황에서 우선 지대를 만들고, 각 지대를 구대와 분대로 연계한 전투부대를 구성했다. 임시정부에서 1940년 9월 19일 중국 국민당 정부에 통보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직원 명단'에 의하면, 부대 규모가 총사령부와 4개 단위부대, 여기에다 조선혁명군 부대까지 포함하여 5000여 명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1941년 12월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1942년에는 미국 측에 "미국이 제주도를 해방 시켜 주면,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제주도로 옮긴 후,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한반도 상륙작전을 전개하겠다."라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실제로 미국 OSS 부대(지금의 CIA)와 1945년 4월부터 8월까지 강도 높은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주요 훈련은 3개월 기간에 고공낙하, 암살법(권총에 특수장치를 하여 소리 없이 암살하는 방법), 통신(암호의 작성 및 해독법, 무전기 조작 및 수리), 교란 행동, 정보수집, 폭파 등 이었다. 일과는 07:00∼12:00 오전 훈련, 13:00∼18:00 오후 훈련, 19:00∼22:00 야간 훈련이었다. 주요 임무는 대한민국으로 낙하산과 잠수함으로 침투하여 미 공군 공습에 필요한 지형 등의 정보를 제공하고 일본군 군사시설 탐지 및 파괴 지하 유격대를 조직하여 연합군 상륙작전 시 제2선에서 연결하는 작전이었다. 마침내 1945년 8월 7일 모든 훈련을 마치고 국내진공작전 출정식을 개최했다. 개시일은 8월 10일이었다. 출정식 때 장준하 경기도 공작 반장은 "나는 조국광복을 위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내가 나의 죽음을 지불하면, 내 능력껏 그 대가가 조국을 위해서 결제될 것입니다. 나의 각오는 한 장의 정수표입니다. 발생인은 장준하, 결제인은 조국입니다"라는 유서까지 작성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2025-09-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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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이시바' 누구?...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 [서울=뉴스핌] 오영상 기자 =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자민당 총재직 사임을 공식화하면서, 일본 정국의 관심은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로 쏠리고 있다. 집권당 총재가 곧 총리직을 맡는 일본 정치 구조상 이번 총재 선거는 사실상 다음 총리를 뽑는 절차다. 자민당은 조만간 새로운 총재 선거 일정을 확정할 예정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지난 2024년 9월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총리와 경합했던 주요 인사들이 다시 출마할 가능성이 높다.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상,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 등이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정국 운영이 소수 여당이라는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차기 총재가 야당과 어떻게 연대할지, 어떤 연립 구도를 짤지가 최대 쟁점으로 꼽힌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고 있는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권 현재 여론조사에서는 고이즈미 농림수산상과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이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지난달 29~3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차기 총리에 적합한 인물로 다카이치가 23%, 고이즈미가 22%를 기록했다. 나란히 1, 2위다. 자민당 지지층으로 한정하면 고이즈미가 32%로, 다카이치(17%)를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카이치는 2024년 총재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에게 역전패했다. 고이즈미 역시 의원 표에서 선두에 올랐지만 당원 표에서 밀리며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당내 기반과 대중적 인지도를 겸비해 차기 선거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주자들이다.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1981년생(44세)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이다. 2009년 중의원 첫 당선 이후 줄곧 '포스트 아베',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았다. 환경상, 농림수산상을 거쳤으며 개혁 성향과 젊은 이미지로 지지층을 넓혔다. 2024년 총선에서 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으나 참패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농림수산상으로 복귀해 쌀 유통 개혁 등 농정 개혁에 매진했다. 대중적 인지도와 '고이즈미 브랜드'라는 정치 자산이 최대 강점으로 꼽힌다.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은 1961년생(64세)으로 보수 강경파로 분류되는 여성 정치인이다. 2021년 총재 선거에 첫 도전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3위를 기록했다. 2024년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최다 득표(의원 72표, 당원 109표)를 얻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 총리에게 역전 당했다. 유일한 여성 후보로서 '보수의 아이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아베 전 총리와 가까웠던 의원 그룹이 주된 지지 기반이다. 이시바 정권에서 당직 제안을 거절하며 독자 노선을 유지해 왔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일본 경제안보담당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하야시·모테기 등 잠룡도 주목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두 선두 주자 외에 잠룡들의 행보도 주목된다.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옛 기시다파 일부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시바 정권의 2인자로서 존재감을 키워왔다.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은 당내 경험과 풍부한 인맥을 강점으로 삼고, 아소 다로 전 부총리와 교류를 통해 지지 기반을 다지고 있다.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은 5선 의원으로, 동기 의원들과 옛 니카이파의 지원을 받으며 출마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 총재 선거 이후에도 정국 '안갯속' 자민당 총재 선거는 국회의원 표와 당원·당우 표를 합산하는 방식이 원칙이지만, 긴급 시에는 국회의원과 지방 지부 대표만 투표하는 '양원 의원 총회' 방식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 경우 의원 표의 비중이 커져 파벌 역학이 중요해진다. 차기 총재가 선출되더라도 곧바로 정권 안정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일본 헌법상 총리는 국회에서 지명되는데, 자민·공명 양당은 현재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에서 과반을 잃은 상태다. 따라서 야당이 단일 후보를 세워 결집할 경우, 자민당 총재가 총리로 지명되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민당 총재가 총리에 오르더라도, 예산안·세제 개혁 법안 등 국정 운영은 야당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차기 총재는 곧바로 '연립 확대'나 '정책 연대'를 추진할 수밖에 없고, 총재 선거 과정에서도 어떤 야당과 손을 잡을지가 핵심 화두가 된다. 결국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는 단순히 차기 지도자를 뽑는 절차를 넘어, 일본 정치가 다당제 속에서 어떤 연립 구도를 구축할지 시험대가 되는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goldendog@newspim.com 2025-09-0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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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이 내용에 포함된 데이터와 의견은 뉴스핌 AI가 분석한 결과입니다.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 매매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 및 결과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으므로, 투자 전 충분한 조사와 전문가 상담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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