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3·1운동 100주년이다. 3·1운동은 이후 민족적 독립운동의 근본이 됐고 대한민국 건국의 원천이 됐다.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이라는 3·1 정신은 한 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유구히 계승되고 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의 상처는 다 아물지 않았고 식민 잔재는 여전히 곳곳에 스며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 선조들이 '못다부른 만세'는 우리에게 과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기획시리즈를 마련했다.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올해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다. 광복이 된 지도 어느덧 74년. 그러나 아직도 35년 의 강점기동안 켜켜이 쌓인 식민문화는 그 기나긴 독립의 역사가 무색할만큼 곳곳에 남아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일제 문화가 여전히 잠복된 대한민국의 모습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강제로 흡수된 일제 문화는 일상 곳곳에서 드러난다. 학교에서도, 길거리에서도, 도시의 명소에도 일본 문화가 여전히 숨 쉬고 있다. 문제는 그것이 일제 잔재라는 사실 자체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잔재로 남은 식민문화를 청산할 것인지,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기억할 것인지는 시대의 몫이다.
◆ '학교종' 알고보니, 일본의 요나누키 장조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애국가 다음으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부른 동요로 꼽히는 '학교종'은 일본식 음계와 장단으로 만들어진 동요다. 이 곡의 역사는 올해로 71년, 1948년부터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렸다. 광복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였던 김메리가 작곡한 곡으로 입학식 날 처음으로 등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노랫말과 곡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학교종' 외에 '퐁당퐁당', 쉬는 시간 즐겨한 놀이로 부른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도 모두 일본식 '요나 누끼' 장조 음악이다. 요나누키(よなぬき) 장조는 '도레미파솔라시도'에서 '파'와 '시'를 뺀 5음계다. '파 '가 일본어로 '요(よ)', '시'가 '나(な)'이고 '누키(ぬき)'는 '빼다'라는 뜻으로 요나누키는 파와 시가 빠진 음계로 구성됐다는 의미다.
이런 동요들은 요나누끼 장조에 일본 장단의 노래다. 반대로 단조는 '엔카'와 연결된다. 이미자의 '동백꽃 아가씨'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2박자에 요나누끼 단조 형식을 갖고 있었는데 한때 '왜색'이 짙 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국민 동요'급인 '학교종'을 일본풍의 노래로 알고 부르는 것과 모르고 부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 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실장은 이와 같은 노래들이 일제시대 잔재이며 이는 교육에서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실장은 "일제시대 잔재를 바로 잡지 않은 게 문제다. 당시에는 일본풍의 노래도 있었고, 독립군도 독립을 열망하며 일본풍의 노래에 한국 가사를 붙이는 식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일본풍의 노래가 계속해서 불리는 것은 수단이나 목적이 있는게 아니다"라며 "예전에 불렀으니까 그냥 부르는 거다. 이를 대체할 동요나 민요가 굉장히 많다"고 안타까워 했다. 대책으로는 "막무가내로 군사정권처럼 일본풍의 노래를 '부르지 마라'라고 하는 건 말이 안된다. 이런 노래가 불려왔으나 일본식의 노래이며 그 배경을 알아야 한다. 지속적으로 학교에서 교육해야 한다"고 힘을 실었다.
현실적으로 학교에서는 '학교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일제 잔재가 깃든 노래로 교육되지는 않는다. 한 초 등학교 교사는 "굳이 교과서에 실린 노래를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 의무는 없다. 노래 선정은 음악 교육의 주제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 주제가 '장단'이라면 그에 맞는 음악을 선정하는 거다"라고 말했다 . 이어 "'학교종'은 2015년 정도에 2학년 교과서에 실린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종'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교육을 하려고 해도 저학년이기 때문에 교육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며 "대부분의 계기교육이 고학년에 맞춰져 있다. 저학년을 위한 계기교육 콘텐츠의 필요성을 느낀다"고 했다. 아울러 이 교사는 "요즘은 창작 동요가 교과서에 많이 실린 편"이라고 언급했다.
◆ 70여년간 이어진 일본식 표현과 단어
일상에서 우리가 읽고 쓰고 말하는 언어에서도 일재의 잔재는 많다. 노래 가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고 향의 봄'의 가사에서 '나의 살던 고향은'은 '내가 살던 고향은'은 정확한 우리말 표기다. '나의 살던 고향 은'은 소유격인 '노(の)'를 쓰는 일본식 표현에서 온 거다.
일본어가 자연스럽게 한국어에 녹아든 건 일본의 '문화통치'로 거슬러 간다. 1910년대 무단통치가 먹히지 않자 일제는 1920년대 문화통치로 전환했다. 한국인에게 일본어를 쓰게 하고 일본풍 노래를 퍼뜨리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위협했다. 그 잔재가 70년이 넘도록 이어진 것이다.
영화 '말모이'의 한 장면 (본 기사와 관련 없음)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
일본식 표현은 생각보다 일상에서 많이 쓰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애매하다'는 '모호하다'로 순화를, '수 순을 밟다'는 '절차를 밟다'로, '익일'은 '다음 날', '견습'은 '수습'으로, '곤조'는 '고집'으로 순화해야 한다.
국립국어원이 2012년 발표한 '일본어 투 어휘자료 구축'에 따르면 '간담회'와 '감봉'은 일본식 단어다. 일본에서 한자어로 쓰인 단어가 우리 한자음으로 음독된 경우다. 또 일본 고유어가 한자 표기로 음독돼 한국말로 굳어진 경우도 있다. '각서' '취소' '견습' '엽서' 등이 있다. 일본어 투 어휘 자료 구축은 그간 국립국어원이 발간한 간행물을 바탕으로 하고 연구자들이 단어를 500개 선정해 일본어 투 한자어를 추출했다. 일본어 투 한자어는 '한자로 표기된 일본어를 우리말 한자로 음독해 사용하는 단어'로 정의했다.
이 자료의 집필진은 일본과 접촉 교류가 본격화된 19세기 말 자료의 발굴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 당시에 발간되거나 기록된 신문 잡지류와 교과서류, 문학작품, 종교서까지 다양한 종류의 자료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연구를 위해 연구자료의 발굴과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일본식 언어의 청산을 위한 움직임이 포착돼 눈길을 끈다. 법무부는 지난해 6월 '알기 쉬운 민법 개정을 위한 공청회'를 열고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민법 만들기 방안에 대해 고민하는 자리를 가졌다. 지난 2015년 11월 진행된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국민들의 84%가 '현행 민법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답했고, 민법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려운 법률용어' 때문이라는 응답이 65.3%에 달했다.
윤철홍 숭실대 법과대학 교수는 당시 진행된 공청회에서 "한국의 민법전은 서기 6세기에 발간된 로마법대전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법전으로 손꼽힌다"고 밝혔다. 그 이유는 "제정 당시 조항의 절반 이상이 일본 민법전의 조문을 그대로 직역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법무부 개정안에 참여한 현소혜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어려운 한자어 표현과 생소한 법률용어를 비롯해 지나치게 축약된 용어를 개선해 민법을 이해하기 쉽게 했다"고 첨언했다.
◆ 3·1운동 발생지 종로서 '벚나무' 갑론을박
3·1운동의 발생지인 서울 종로 탑골공원부터 낙원상가에 이르는 '송해길'의 가로수는 벚꽃나무다. 이를 두고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은 "적어도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의 가로수가 벚나무인 것은 어울리지 않다"고 주장했다. 봄이 되면 이곳 아래서 일본의 꽃놀이 문화를 하는 모습이 일본의 잔재와 겹친다고 덧붙였다.
종로는 3·1운동의 근거지다.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을 기다리던 학생들은 민족대표가 나오지 않자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서'를 읽고 '만세' 운동을 펼쳤다. 비폭력 시위로 자주독립의 염원을 외치던 그곳은 역사적 상징적을 띤다.
종로구는 지난 2016년 5월23일 종로 2가 육의전빌딩부터 낙원상가까지 약 240m에 이르는 이 거리를 '송해길'로 지정했다. 종로구 낙원동은 방송인 송해 선생이 '연예인 상록회' 사무실을 열고 방송 생활을 이어온 곳이다. 또 고향이 황해남도 재령 출신의 실향민인 송해는 종로구가 '제2의 고향'이라며 남다른 애착을 갖고 지역을 위해 행사나 봉사 활동에 참여한 바 있다. 이에 종로구는 2011년 송해를 명예구민으로 선정했다 .
황성관 종로구청 조경팀장은 "2010년 주민의 의견을 수렴해 벚나무를 가로수로 지정하게 됐다. 주민들은 꽃피는 나무를 선호한다. 다만 이곳 벚나무 종은 한국이 원산지인 왕벚나무"라고 밝혔다. 이어 독립운동의 성지에서 일본 꽃이 가로수로, 그 밑에서 일본 문화인 '꽃놀이' 문화를 연상시킨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서는 "일본 꽃이라 논란의 여지는 있을 수 있다. 송해 선생님도 그런 부분을 염려했다"면서도 "요즘은 벚꽃이 대중화돼서 '일본의 것'이란 생각보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로 보는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강조했다.
4월이 되면 진해 '벚꽃군항제'부터 여의도 '벚꽃 축제'까지 전국 각지에서 화기에 따라 벚꽃축제가 펼쳐진 다. 많은 국민들이 즐기는 벚꽃놀이가 일본의 전통문화인 '꽃놀이 문화'를 떠올린다는 시각은 과하다는 의견도 있다. 장석흥 국민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는 "왕벚나무는 한국산이다. 제주도에서 자생하는 나무다. 분명히 이러한 것을 배려해 가로수로 선정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의 꽃축제를 연상시킨다는 건 너무 편협한 시각이다. 한국도 꽃놀이 문화가 있다. 벚꽃이 다 일본 문화는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 교통·문화의 중심 용산, 과거 일본軍 주둔
용산에 주둔했던 조선군 사령부 [사진=민족문제연구소] |
현재는 교통과 문화의 중심지인 용산은 100년 전 일제시대에 군대가 주둔했다. 용산역 14번 게이트를 시작점으로 용산역 맞은편에 위치한 드래곤 힐 호텔 부근, 미군 부지의 영역은 조선군사령부와 조선총독부 관저가 있던 자리다. 지난해 미군 부지가 평택으로 이전을 하면서 이곳은 용산공원 조성이 진행중이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서울(중구 필동)을 조선군 거점지로 못 박았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한국에 있는 일본대사관과 일본 민간인을 보호하겠다는 목적으로 이곳을 점령했고 계속해서 한국인의 의병 운동을 저지하며 탄압했다. 1910년 조선주차군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15년 용산에 제20사단이 세워졌다.
20사단에 세워진 용산에 1918년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사령부가 설치됐다. 일본은 겉으로는 조선의 치안 유지를 주장, 실질적으로는 러시아군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용산을 점령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군이, 한국 전쟁 이후에는 미군이 주둔했던 이곳은 한반도의 뼈아픈 역사가 흡수된 곳으로 한국의 분쟁과 해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에는 민간인 출입 114년 만에 공개하는 버스 투어 프로그램이 운영되기도 했다.
장흥석 국민대학교 교수는 용산의 조선군 기지를 기념관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장 교수는 "서대문형무소도 역사기념관 형태로 남아있다"며 "미군분대가 해산하면 조선군 막사와 군부대를 전시관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제 잔재를 없애는 게 능사는 아니다. 군대가 주둔하게 된 과정을 많은 이들이 모르니까 어떻게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가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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