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KYD 디데이
중국 기업

속보

더보기

은퇴하는 마윈, 중국경제 신화로 남은 마윈경영

기사입력 : 2019년09월09일 17:43

최종수정 : 2019년09월09일 17:43

※ 본문 글자 크기 조정

  • 더 작게
  • 작게
  • 보통
  • 크게
  • 더 크게

※ 번역할 언어 선택

흙수저 출신, 삼수 끝 대학 입학
타오바오. 알리페이 등 중국인의 삶 바꿔놓아
은퇴 후 교육 사업에 매진

[서울=뉴스핌] 김은주 기자 = 중국 ‘흙수저’의 성공 신화로 불리는 마윈(馬雲) 알리바바 회장이 9월 10일 공식 은퇴한다. 마 회장은 가난한 집안 출신에 외모, 학벌 등 이렇다 할 스펙 없이 인터넷 기업 알리바바를 세워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로 일군 전설적 인물이다. 그가 만든 인터넷 쇼핑몰 타오바오, 모바일 결제 알리페이 등은 이제 중국인의 일상생활에서 빠져서는 안될 필수 생활 플랫폼이 됐다.

그런 그가 지난해 돌연 은퇴 선언을 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알리바바 창립 20주년인 2019년 9월 10일 알리바바 회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한 것이다. 마윈 회장의 은퇴 임박에 중국 매체들은 그의 알리바바 경영 일생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눈길을 끌고 있다.

마 회장은 삼수 끝에 겨우 들어간 항저우(杭州)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교직에 몸 담으며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항저우전자공업학교에서 영어, 국제무역 담당 교사로 7년간 교편을 잡았다.

그는 중국에서 인터넷 보급이 채 되지 않았던 시절 인터넷의 무한한 성장을 일찍이 알아보고 31살이던 1995년 교직을 박차고 나와 창업에 뛰어들었다. 그러곤 중국 최초의 인터넷 기업 ‘차이나옐로페이지’를 세웠지만, 얼마 못 가 실패를 맛봐야 했다.

하지만 마 회장은 좌절하지 않았다. 4년 뒤인 1999년 마윈은 동료 17명과 함께 항저우의 작은 아파트에서 기업 대 기업(B2B) 거래 회사인 알리바바를 창립했다. 이듬해인 2000년 인터넷 기업에 불황이 닥치면서 회사 도산 위기에 몰렸지만, 마 회장이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으로부터 2000만 달러(약 238억원)를 투자 유치하는 데 성공해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마 회장은 2003년 개인 간 거래인 C2C 전자상거래 사이트 타오바오를 선보여 알리바바를 급성장시킨다. 이 타오바오의 탄생은 기존에 오프라인 구매에 익숙해 있던 중국인들의 소비 습관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중국 전체 소매 시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알리바바 로고 [사진=바이두]

이듬해 타오바오의 결제 편의를 돕는 알리페이도 도입했다. 알리페이는 판매자와 구매자 간 거래를 중개해 소비자가 안심하고 타오바오에서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한 제3자 온라인 결제 플랫폼이다. 오늘날 알리페이는 중국인들의 삶 속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일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2009년 솔로의 날인 11월 11일 광군제에 애인이 없는 솔로들을 위로하기 위한 차원에서 처음 쇼핑 행사를 열었다. 광군제 쇼핑 행사는 해가 갈수록 규모가 커져 오늘날엔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에 버금가는 중국 최대 쇼핑데이로 거듭났다. 지난해 11월 11일 당일 하루 매출이 2135억 위안(약 35조원)에 달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러한 성공을 발판으로 마 회장이 이끄는 알리바바는 2014년 9월 세계 증시 사상 최고의 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뉴욕 증권거래소에 입성했다. 알리바바의 주식이 상장 후 50% 이상 올라 시가총액이 대폭 상승하면서 마 회장의 자산도 급증했다. 이 덕분에 마 회장은 워런 버핏과 빌게이츠를 제치고, 2014년 한 해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억만장자로 이름을 올렸다.

2016년 마 회장은 순수한 전자상거래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며, 온·오프라인을 통합한 ‘신소매’(新零售, 신유통)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해 업계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이를 계기로 중국 유통의 새 트렌드로 자리잡으며 무인편의점, 매장 등이 생겨났다.

마 회장이 20년 전 창업한 알리바바는 이제 전자상거래 뿐만 아니라 소매유통, 클라우드컴퓨팅, 엔터테인먼트 등에 사업 진출하며 종합형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제 알리바바 회장직에서 내려온 마 회장은 본업인 교육업계로 돌아가 교육 사업에 매진할 것으로 전해진다. 교육 사업은 주로 마윈공익기금회, 후판대학, 윈구학교 세 곳을 통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마윈공익기금회를 통해 낙후된 환경으로 교육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농촌 지역 학생들을 지원할 계획이다.

농촌 교육 사업은 오래전부터 마윈 회장이 관심 가져온 일 중 하나다. 실제로 지난 2015년 9월부터 마윈공익기금회를 통해 매년 사비 1000만 위안(약 17억원)을 출자해 농촌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지원하고 있다.

창업 사관학교 후판대학에서는 중국을 이끌어갈 차세대 경영 리더들을 양성할 계획이며, 비영리성 초·중·고 국제학교인 윈구학교를 통해 인재 양성에도 힘쓸 예정이다.

 

eunjookim@newspim.com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광복군, 일본군 무장해제 "항복사실 모르느냐?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전의(戰意)가 없는 것을 보이기 위해 기관단총을 모두 어깨에 걸쳤다. 그러고도 만일을 위해서 각각 산개하면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몸을 날렸다. 아. 그때 그 바람 냄새, 그 공기의 열기, 아른대는 포플러의 아지랑이, 그리고는 아무것도 순간적이었지만 보이지 아니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가? 우리 주변엔 돌격 태세에 착검한 일본군이 포위하고 있었다. 워커 구두 밑의 여의도 모래가 발을 구르게 했다. 코끼리 콧대 같은 고무관을 제독총에 연결한 험상궂은 방독면을 뒤집어쓴 일본군이 차차 비행기를 중심으로 원거리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너무나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것이 그리던 조국 땅을 밟고 처음 맞은 분위기였다. 동지들은 눈빛을 무섭게 빛내면서 사주경계를 했다. 그러나 아직 기관단총을 거머쥐지는 아니했다. 여의도의 공기가 움직이지 않는 고체처럼 조여들어 왔다. 뿐만 아니었다. 타고 온 C46형 수송기로부터 한 50여m 떨어진 곳의 격납고 앞에는 실히 1개 중대나 되는 군인들이 일본도를 뽑아 든 한 장교에게 인솔되어 정렬해 있었다. 그 앞에는 고급장교인 듯한 자들이 한 줄 또 섰고, 장군 몇 명도 있는 듯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8월 18일 한낮의 그 뜨거운 여의도 열기가 우리를 더욱 긴장시켰다. 격납고 뒤에까지 무장한 군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중형전차의 기관포도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환호하는 광복군.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비행장 아스팔트 위엔 한여름의 복사열이 그 위기의 긴장처럼 이글대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땀에 젖어 있었다. 기막힌 침묵이 십여 분이나 지났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행동도 취해 오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가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일본군 고급 장교들이 늘어선 쪽으로 한걸음 씩 움직였다. 각자 산개, 조심하라! 누군가가 이렇게 나직하게 말했다. 서해 연안으로 비행기가 고도를 낮출 때 누군가가 유서를 쓰던 일이 이 순간 내 머릿속에서 상기되었다. 일본군 병사들은 우리가 다가서자 의외로 포위망을 풀 듯이 비켜섰다. 우리는 아직 기관단총을 어깨에 멘 그대로였다. 일본군이 길을 열어주자, 그들도 일본군 육군 중장을 선두로 한 장교단이 우리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조선주차군사령관 죠오쯔끼(上月良夫)였다. 쬬오쯔기는 그의 참모장 이하라 소장과 나남 사단장과 참모들을 뒤로 거느렸다. 우리도 좌우로 벌려 섰다. 쬬오쯔기가 「나니시니 이라시따노?(무슨 일로 왔소?)」말문을 열었다. 퍽 야무지게 보였다. 우리는 말 대신 영등포 상공에서 뿌리다 남긴 선전 전단을 내밀어 주었다. 우리의 임무가 일본어와 우리말로 적힌 전단이었다. 거긴 또 우리가 이렇게 들어오게 된 사연도 적혀있었다. 우리는 한 장씩 그 전단을 다른 일본군 장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쬬오쯔끼는 이를 받아 읽고, "일본은 정전만 한 상태이니 일단 돌아갔다가 휴전 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재입국하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위협했다. 자기네 병사들이 꽤 흥분되어 있으니, 만약 돌아가지 않으면 그 신변 보호에 안전책임을 지기가 어렵다는 분위기라고 했다. 이에 이범석 장군이 "네 놈들의 천황이 이미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사실을 모르느냐? 이제부터는 동경의 지시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맞섰다. 그러나 쉽사리 양보하지 않았다. 옥신각신 말이 몇 번 건너 왔다 갔다. 갑자기 쬬오쯔끼는 한 일본군 대령에게 일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그는 동경서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어 마중을 나와 있던 참이란 말을 하고는 물러가 버렸다" 이범석 장군은 일본군 측에 "조선 총독을 만나 담판 짓겠다'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일본군 무장해제 임무를 띠고 국내로 들어 온 '광복군 국내정진군'은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한 채 다음 날 8월 19일 14:30분 여의도 기지를 이륙하여 중국으로 돌아갔다. 광복군은 미군정이 시작되고 나서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조짐이 좋지 않았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2025-09-29 08:00
사진
중국 전기차 주행거리 두배 증가 배터리 개발 [베이징=뉴스핌] 조용성 특파원 = 중국이 에너지 밀도를 두 배 증가시킬 수 있는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해 낸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칭화(淸華)대학 화학공학과의 연구팀은 '음이온이 풍부한 용매화 구조 설계'를 개발해 냈으며, 이를 기반으로 불소 함유 폴리에테르 전해질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고 중국 관찰자망이 30일 전했다. 해당 연구 성과는 논문 형식으로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에 등재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폴리에테르 전해질은 고체이며, 연구팀은 해당 전해질을 사용하여 전고체 배터리를 제작했다. 제작된 전고체 배터리는 604Wh/kg의 에너지 밀도를 기록했다. 이는 현재 리튬 이온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가 150~320Wh/kg인 점을 감안하면 에너지 밀도가 두 배 이상 높아진 것이다. 동일한 무게의 배터리이지만 해당 전해질을 사용한 전고체 배터리는 두 배 이상의 전력을 충전할 수 있는 셈이다. 이론적으로 전기차의 1회 충전 주행 거리가 두 배 증가할 수 있게 된다. 현재 500km가량을 주행할 수 있는 전기차가 1000km를 주행할 수 있게 된다. 해당 전고체 배터리는 안전성 테스트도 통과하였다. 못을 박아도 화재와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120도의 높은 온도의 박스 안에 6시간 동안 방치되었지만, 연소나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500회 이상 충방전을 거치면서도 에너지 저장 용량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연구진이 만들어낸 전고체 배터리가 상용화된다면 많은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해진다. 전기차의 주행 거리는 두 배 증가하며, 드론의 비행 거리도 두 배 증가하게 된다. ESS(에너지저장장치) 역시 부피당 저장 용량을 크게 끌어올리게 되며 ESS 소형화가 가능해진다. 칭화대 연구진이 개발한 전고체 전해질의 도식도 [사진=네이처 캡처] ys1744@newspim.com 2025-09-30 10:35
기사 번역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기사제목
기사가 번역된 내용입니다.
종목 추적기

S&P 500 기업 중 기사 내용이 영향을 줄 종목 추적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이 내용에 포함된 데이터와 의견은 뉴스핌 AI가 분석한 결과입니다.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 매매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 및 결과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으므로, 투자 전 충분한 조사와 전문가 상담을 권장합니다.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