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KYD 디데이
중국 피플

속보

더보기

이덕호: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다

기사입력 : 2020년04월13일 14:41

최종수정 : 2020년08월20일 09:50

[서울=뉴스핌] 정리 주옥함 기자 = 25년 전, 마음 속 열정이 넘치는 청년이 한국을 떠나 홀로 중국으로 가서 삶을 모색했다. 25년 후, 그는 화려하게 변신하고 꿈을 이뤄 유위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바로 재칭다오한국인(상)회 이덕호 회장이다.  

       
     2017년에 정광일 강연회 및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이덕호.[사진=금교]

이국에서 창업, 고생도 있지만 낙도 있다

1995년, 한중 수교에 따른 한중 무역이 지속적으로 활기를 띠면서 많은 한상이 계속해서 중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덕호 역시 당시 중국 투자 기회를 포착하고 칭다오에서 사업을 개척하기로 했다. 그의 회사인 칭다오김종귀공예유한회사(青島金鐘貴工藝有限公司)는 바로 그 해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만사는 시작이 가장 어렵다. 이덕호가 처음 칭다오에 왔을 때 언어소통이 그에게 가장 큰 난제였다. 그는 창업 초기의 어려움을 상기하니 감개무량하여 "그때는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제가 중국에 오기 전에 중국어를 안 배웠고, 아는 말도 '니하오'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칭다오에 투자한 한국 기업은 얼마 없었고 한국인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제가 정말 용감하고 패기 있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나중에 조선족 동료들이 많이 생겼고 그들은 중간에 통역의 역할을 잘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주거 환경이 좋지 않았던 것도 이때 이덕호가 직면했던 또 다른 난제였다. "지금 아파트에 살고 보일러도 있고 전기도 잘 공급하지만 그전에는 지금만큼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당시 라오산구(嶗山區)의 싸즈커우(沙子口) 근처에 살았는데 밤에 종종 전기가 끊어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그는 회상하며 말했다.

하나 또 하나의 어려움에 직면하자, 이덕호는 뒷걸음치지 않고 이런 어려움들을 자신이 사업을 계속하는 동력으로 전환했다. 그는 "나는 반드시 성공하겠다.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절대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라는 신념이 자기를 지탱하여 힘든 시간을 견뎌냈다고 말했다.  

분투해온 길에 어려움이 겹겹이 쌓였지만 당시 한국 기업에 대한 중국의 태도는 이덕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는 "그 당시 중국은 한국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세제 혜택과 수출 장려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뿐만 아이라 안전면에서도 공안국과 파출소가 우리를 잘 보호해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칭다오 바다갓의 조감도[사진=금교]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봉사정신으로 신념이

사실 이덕호가 재칭다오한국인(상)회 회장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자신의 공예품회사의 대표인 것 외에도 제7대 재중국한국공예품협회 회장을 지냈다.

그의 소개에 따르면, 그가 처음 칭다오에 왔을 때, 청양구(城陽區)에는 이미 공예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재중국한국공예품협회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모아 서로 교류하고 친목활동을 하게 한 곳이다. 때로는 협회가 회원들이 함께 봉사활동에 참여하도록 하는데, 적십자사에 돈을 기부하여 고아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을 돕는 것이 전형적인 예이다. "저희 회원들에게는 같은 소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저희의 힘으로 사회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다는 것입니다."그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회장에 재임하는 동안, 이덕호는 협회 이전의 봉사활동을 이어가는 것 외에 협회를 이끌고 청양교통국, 청양교육국과 함께 환경보호를 주제로 한 '쓰레기 줍기 운동'을 불러일으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일부 한국 기업들이 참담한 경영으로 잇달아 중국시장에서 철수하는 가운데, 이덕호의 회사는 경영을 잘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한국 언론의 주의를 끌어들였다. 그는 우수기업으로 선정하여 한국 MBC방송국은 무려 20분 동안 보도를 했다며 이 경험에 대해 그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지런히 노력하면 수확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자신의 일자리에서 매사에 최선을 다한 이덕호가 점점 더 많은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그로 하여금 자기 인생의 하이라이트를 맞아 무게가 있는 '대통령상'을 받았다.

현재 재칭다오한국인(상)회 회장인 이덕호는 여전히 정성을 다 해서 자신의 상회를 이끌고 있다. 회장 당선에 대해, 그는 회장이 된 것은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에 있는 한국 동포들을 위해 좀더 많은 일을 해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눈 온 뒤의 라오산[사진=금교]

미래를 전망하고, 마음속에 기대가 가득 차다

2019년은 이덕호에게 매우 의미 있는 한 해였다. 그는 상회를 이끌고 칭다오 세계한상대회 개최를 해 세계 각국의 한상들이 중국 기업의 글로벌 파트너로서 서로 이익을 얻는 기회를 모색하고 깊이 협력해 나갈 수 있도록 했다. 이와 함께 상회는 칭다오 청운한국학교(青雲韓國學校)가 학교 신축에 필요한 예산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적극 협조해주었습니다. "저희는 3년 안에 한국인의 학교를 지을 계획인데, 이게 저희에게 있어 가장 큰 일입니다"라고 이덕호가 말했다.

수년 동안 중국에서 사업하면서 여기가 이덕호의 제2의 고향이 된 셈이다. 그는 "한국과 중국은 바다를 사이에 둔 이웃입니다. 상인으로서나 양국 간 우호 촉진자로서 앞으로 양국 간 무역이 더 확대되고 인문 교류가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제가 중국에 온 지 26년이 되었으니 중국에 대한 정이 상당히 깊습니다. 제가 중국을 사랑하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도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1월 1일부터,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외상투자법(中華人民共和國外商投資法)>을 정식으로 시행해 외자기업들에게 더욱 포용적인 비즈니스 환경과 법적 보장을 제공한다. 이에 이덕호는 느낀 바가 많아 "한국 기업의 투자에 관한 장려정책이 잘 나왔는데 홍보활동도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중국에 전자, 로봇 제조 등 관련 산업에 투자하는 것이 한국 기업으로서는 더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하면 한중 기술과 자본이 잘 결합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식이 중국인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만큼 앞으로 더 많은 한식 기업이 중국에 진출하기를 바라고 한국의 음식문화가 더 많은 중국인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리멍후이(李夢暉)

[금교(金橋,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 주관 잡지)=본사 특약]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트럼프 "하메네이 어디있는지 알아" [뉴욕=뉴스핌] 김민정 특파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면서 이란을 향해 조건 없는 항복을 촉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7일(현지시간)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에 "우리는 이른바 '최고지도자"가 어디에 숨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며 "그는 쉬운 표적이지만 지금 그곳에 있는 한 안전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적어도 지금은 그를 제거하지 않을 것(즉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민간인이나 미군을 향해 미사일이 발사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우리의 인내심은 점점 바닥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게시글에는 "조건 없는 항복!"이라고 적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트럼프 대통령이 하메네이를 제거하려는 이스라엘의 계획을 저지했다는 보도가 전해진 후 나왔다. 전날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 같은 보도에 대해 "섣부르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하며 그 차이를 일축했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가 지난 4일(현지시간) 1979년 이슬람 혁명의 지도자인 루홀라 호메이니 아야톨라 사망 36주년을 맞아 테헤란 남부 호메이니 기념관에서 연설하는 모습. [사진=로이터 뉴스핌] mj72284@newspim.com 2025-06-18 02:05
사진
[이재명의 사람들] '포용복지' 문진영 수석 [서울=뉴스핌] 박성준 기자 = 문진영 대통령실 사회수석은 이재명 대통령의 복지 철학을 가장 가까이서 이해하고 이를 실제 정책으로 구현해 온 대표적인 정책 참모다. 복지국가 구상에서 구체적 설계, 제도 실행까지 전 과정을 함께해온 핵심 브레인으로, 현 정부의 사회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난 문 수석은 연세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학·석사 과정을 마치고, 영국 헐(University of Hull) 대학에서 사회정책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성공회대학교 조교수,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사회복지정책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문과 정책 현장을 오갔다. 그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당시 시민사회단체 정책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이후 국민취업지원제도 도입, 기초생활보장제도 개편 등 복지제도 확충에도 깊숙이 참여했다. 문 수석이 '정책형 학자' 또는 '현장형 브레인'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의 경력에서 비롯된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연구와 실무를 두루 거친 이력은 책상 위 이론을 넘은 정책 설계의 밑바탕이 됐다. 문진영 대통령실 사회수석. [사진=대통령실] 아동수당 도입 논의 초기부터 실효성 있는 대안을 제시해 왔고, 이를 '아동청소년수당'으로 개편해 지급 연령을 만 18세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설계했다. 이는 이재명 정부 복지 정책의 핵심 방향 중 하나로, 문 수석이 실질적인 설계자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2018년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 취임 직후 인수위에 참여했고, 이후 경기도일자리재단 대표이사로 2년간 청년·여성·중장년 대상 맞춤형 고용·복지 정책을 추진하며 '현장 중심 정책가'로 자리매김했다. 현장과 학계, 캠프와 정부를 아우르는 경험은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이를 사회정책 전반에 녹여낼 수 있는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20대 대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 포용복지국가위원회에서 이재명 당시 후보의 복지 공약을 총괄 설계하며 아동수당 확대, 돌봄 국가책임제, 육아휴직 부모 할당제 등의 정책을 이끌었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도 "복지 제도에 대한 이해가 깊으며 아동수당 도입 등 실효성 있는 정책을 제시해 온 분으로 대통령의 복지 국가 비전을 구체화할 것"이라며 문 수석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문 수석 임명은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포용사회, 복지국가 기조를 본격화하겠다는 신호탄으로 읽힌다. 향후 아동·청소년, 취약계층 지원은 물론, 일과 돌봄의 국가 책임 확대, 사회안전망 정비 등 주요 복지과제를 설계·집행할 실무 총괄자로서 그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전망이다. 문 수석은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정책가로, 정부가 말하는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복지국가' 실현의 핵심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1962년 서울 출생 ▲연세대 사회복지학 ▲영국 헐대 사회정책학 박사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 조교수 ▲국가인권위원회 사회권 전문위원회 위원 ▲경기도지사 인수위원회 문화복지분과 위원장 ▲경기도 일자리재단 대표이사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포용사회 분과위원장 parksj@newspim.com 2025-06-18 07:00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