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박찬욱 감독이 영화 '헤어질 결심'으로 다 큰 어른들의, 미묘한, 감정의 시간차를 둔 짙고 깊은 로맨스를 그려냈다.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파고를 불러오는 이 영화는 올해 칸 감독상의 영예를 안았다.
박 감독은 '헤어질 결심'의 개봉을 앞두고 온라인으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칸 영화제 수상과 박해일, 탕웨이와 영화를 작업한 소감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칸 수상이 기쁠 법도 하지만 "상을 못받아서 슬프지 않은 것과 비슷한 이유로 그리 좋지도 않다"면서 담담한 반응을 내놨다.
"칸에 가서 수상 못한 적도 있지만 아무렇지 않았거든요. 근데 주변 사람들이 섭섭해하니까 죄 지은 것 같고.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지는 않았어요. 상투적인 얘기라 하나마나지만 영화로 경쟁해서 상을 받아도 그리 좋지는 않아요. 작품을 경쟁을 붙여서 상을 주고 안받고 하는게 가치있는 일인가 싶죠. 심사위원 구성에 따라 취향이 많이 갈리기도 하고요. '헤어질 결심'이 제게 어떤 의미로 남을지는 다른 작품이랑 같겠죠. 배우가 가장 먼저 떠올라요. 박해일 탕웨이가 함께 한 영화라는 의미로 제게 남겠죠."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헤어질 결심'으로 제 75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 [사진=CJ ENM] 2022.06.29 jyyang@newspim.com |
박찬욱 감독은 이번 영화 '헤어질 결심'을 기획한 이유로 전작인 '리틀 드러머 걸'을 들었다. 영국 BBC 드라마로 선보였던 이 작품은 유럽 로케이션 촬영에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았다.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한국어 영화를 만들고 싶었음을 고백했다.
"'리틀 드러머 걸'은 영국에서 만들고 촬영도 그리스, 체코 같은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했죠. 다음 작품은 무조건 한국에서 한국어로 하는 영화를 하고 싶었어요. 극장용으로요. 최선을 다해서 찍었고 자부심도 있는데 극장에서 보여드릴 수 없어 서글펐거든요. 그래서 최고 수준의 후반 작업의 결과를 해내고 싶었고 극장에서 선보이고 싶었죠. '리틀 드러머 걸'은 팔레스테인 분쟁을 소재로 해요.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다음 작품은 사회, 정치적 메시지가 없는 영화 그 자체, 최소한의 형식으로 짜인 가장 순수한 형태의 영화를 바랐어요. 런던에서 정서경 작가가 여행 왔을 때 붙들어 앉혀놓고 '헤어질 결심'을 구상했죠."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 시사 이후 쏟아진 제각각의 반응들을 언급하며 "재밌다"고 말했다. 평소 리뷰를 잘 읽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다양한 이들의 리뷰들을 읽으며 흥미진진한 한 때를 보냈다고도 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평도 소개했다.
"이 영화의 리뷰 자체가 다 재밌어요. 여러 비평가와 기자분들이 시적인 문체로 적어 내려간 걸 읽는 게 좋아요. '이 기자분 CJ에서 밥 한번 사드려야겠다' 얘기하기도 하고요. 각자 다르게 영화를 보신 것도 재밌고 각자의 성격이 드러나는 문체로 쓴 글을 읽을 때 흥미진진하죠. 그 중에서도 '히치콕 영화를 보지 않고 만든 히치콕키안 필름 같다'는 말이 기억에 남아요. 굉장히 사적인 영화가 될 것 같다. 관객 한명 한명에게 개인적인 감상을 일으키는 영화요. 그래서 뭘 읽어도 재밌고 전문 리뷰어가 아니어도 일반 관객들이 올린 댓글 하나만 봐도 흥미로운 표현들이 많아요."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헤어질 결심'으로 제 75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 [사진=CJ ENM] 2022.06.29 jyyang@newspim.com |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란 점도, 박해일, 탕웨이의 조합도 주목받았지만 '헤어질 결심'이라는 제목도 무언가 의미심장하다. 제목을 고른 이유와 더불어 그 제목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 영화의 톤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감독에게 직접 들었다.
"'아가씨' 때와 비슷한데 정서경 작가와 함께 각본을 쓰면서 말 하는 중에 딱 걸린 단어였어요. '여기서 해준이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는 거겠지'. 그 말을 하다가 꽂혔죠. 결심이라는 말을 쓰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결심대로 잘 될까? 관객이 그래도 생각하게 만드는 제목이고 궁금하게 만드는 말이라 마음에 들었어요. 영화의 메시지나 주제는 딱히 없어요. 개인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죠. 다만 이들의 감정은 감춰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아요. 관객은 그걸 유심히 들여다봐야 알 수 있고 그런 집중을 통해서 사람이 어떤 관계를 맺을 때 느끼는 감정을 하나씩 알아가는 거죠. 그게 이 영화를 보는 의미예요. 답답할 때도 있고 웃길 때도 있고 어쩔 수 없는 모습도 있어요. 그게 우리 모습이고 사랑할 때의 모습이죠. 개인적인 영화가 아닌가 해요."
인터뷰 도중 박 감독은 처음으로 함께한 박해일과 탕웨이에게 애정을 넘어서 존경에 가까운 감정들을 종종 드러냈다. 박해일이 연기한 신 중 많이 웃었던 장면을 언급하거나, 탕웨이가 한국어 대사의 의미를 다 파악하고 연기하고 싶어했던 일화들을 떠올리며 작업 과정 자체가 한 편의 영화같은 순간들을 얘기했다.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헤어질 결심'으로 제 75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 [사진=CJ ENM] 2022.06.29 jyyang@newspim.com |
"해준이 '내 심장을 왜 갖고 싶었냐'고 묻고 서래가 '심장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하니까 '아아아아'하고 길게 대사를 치는 장면이 웃기고 좋았어요. 딱딱하고 고상한 외면 안에, 처음으로 장난기를 드러내고 친밀해졌다고 생각하는 속내가 드러나서요. 순간 눈이 장난기로 반짝반짝할 때 '이게 박해일의 해준이구나' 실감했죠. 탕웨이씨는 언어 감각이 굉장히 좋다는 걸 사전 조사를 통해 알고는 있었어요. 한국어를 기초부터 문법부터 하나하나 배워나갔고, 대사를 소리나는 대로 발음만 해서 연기하는 건 자기 능력 밖이라고 하더군요. 선생 두 명을 붙여서 문법, 발음을 다 공부했고 공책에 한글과 중국어를 빼곡히 적어놨어요. 후시녹음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는데 그때도 정말 그 프로페셔널함에 감탄했죠."
모든 신과 대사가 박 감독이 뽑은 인상깊은 순간들이겠지만, 그는 이포 경찰서에서 재회한 해준과 서래의 심문신을 가장 좋아하는 신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품위있는' 형사가 '붕괴'를 맞는 이 영화의 매력을 천천히 곱씹게 할만한, 그만의 생각과 설명을 곁들였다.
"개인적으로 이포경찰서에서 심문 장면이 제일 좋아요. 대사를 고르라면, 탕웨이씨의 중국어 대사를 꼽을까요. 유일하게 해준이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 대사죠. '한국말로 해줘요' 라고 답답해하는데 그 통화에서 해준은 그간의 침착성과 품위를 다 잃고 다급하죠. 나중에 부하 형사한테 전화할 땐 거의 어린애 같아요. 서래 입장에서나 관객이 듣기에도 결정적인 대사가 되겠죠. 지금은 너무 이기적이고 세속적이고 경박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시대예요. 어떤 멸종 동물처럼 보기드문 기품을 가진 사람을 보여주고 싶었죠. 그렇다고 그걸 뿜뿜 자랑하면서 끝나면 재미 없잖아요. 그 사람이 어떻게 붕괴되고 품위를 어떻게 잃어버리느냐. 또 그 과정을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느냐. 그걸 인지하는 사람만이 고통스러워할 수 있는 거라 영화에서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jyyang@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