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KYD 디데이
사회 사건·사고

속보

더보기

[세월호 10주기] "울고 분노 말고, 가족영화 만들고 싶었다"

기사입력 :

최종수정 :

※ 본문 글자 크기 조정

  • 더 작게
  • 작게
  • 보통
  • 크게
  • 더 크게

※ 번역할 언어 선택

지성 아빠 문종택 감독의 다큐 <바람의 세월> 개봉

[서울=뉴스핌] 신수용 기자 = "눈 감으면 더욱 생생해지는 기억. 다녀오겠다는 아이의 뒷모습을 조금 더 오래 봐 둘 걸 그랬습니다. 딱 한 번 놓친 그 손을 다시 잡길 얼마나 원하고 바라는 지요"

벚꽃이 휘날리는 경기 안산 단원고 정문 앞. 영화는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아이들 한명 한명을 안아주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모습과 2학년 1반 문지성 양의 아버지(문종택 감독)의 담담한 목소리로 시작됐다.

◆ 아이들을 위한 영화..."우리 아이들...가만히 놓아 달라"

[서울=뉴스핌] 정일구 기자 = 영화 '바람의 세월' 문종택(오른쪽), 김환태 감독. 2024.04.08 mironj19@newspim.com

최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영화 '바람의 세월'을 만든 문종택 감독과 김환태 감독을 만났다. 세월호 유가족이 제작에 참여한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다. 문 감독은 "울고 분노하기 위해서 만든 영화가 아니다"고 말문을 열었다.

김 감독은 "김관홍 잠수사가 '아이들이 이렇게 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했다"고 말했던 것과 세상을 떠난 김종필 감독과 인연이 있었다"며 "누가 주목되거나 주인공이 되는 것들을 말고, 우리 영화, 가족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합류 계기를 얘기했다. (故) 김관홍 잠수사는 세월호 실종자 수색에 나선 뒤 트라우마와 잠수병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고(故) 김종필 감독은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과 연대해 관련 현장을 기록했다.

김 감독은 "영화에서 가장 힘들고 감정이 요동쳤던 순간이 생존 학생들이 등교하는 모습과 (세월호 유가족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가족분들을 안아주고, 이태원에 가서 '힘내라'라고 외치는 장면이었다"며 "살아온 게 미안하고, 살아와 줘서 고맙다고 이렇게 안아주는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너무도 힘들다"라고 털어놨다.

이어 "피해자가 피해자를 위로해야 하는 이 사회에서 '국가는 대체 어떤 존재인가'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분들을 이렇게 대우하는 사회에 문제의식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이 영화는 아이들을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감독들은 "우리 민지"라며 '우리'를 강조했다. 문 감독은 "'생존자'라는 세 글자가 우리 아이들에게 십자가 무게 이상"이라며 "'나만 살아왔네' 사회가 그렇게 아이들한테 만들어버렸다"우려를 표했다.

까만 니트에 왼쪽 가슴에 세월호 벳지를 달고 있던 문 감독은 "살아온 우리 아이가 있고, 그 아이들이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다"며 "'저 아이들은 그냥 가만히 놔두세요'라는 그 울림이 (영화에서) 전달됐음 좋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떨궜다.

김 감독은 "우리라는 표현과 흔들리는 장면들 등 아버님이 당사자이시기에 이런 섬세한 표현이 영상에 담길 수 있었다. 이걸 혼자 했다면 그런 것들 까지 체득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생존 학생과 우리 아이들이 같이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자막 디자인도 학생마다 다르게 했다"고 설명했다.

문 감독은 "이런 세심한 부분을 아이들이 나중에 어디선가 볼 것"이라며 "혹시 우리 아이들이 그걸 봤을 때를 생각하며 장면 하나, 글자 하나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 "진상 규명을 통해 안전 도모 됐으면"

[서울=뉴스핌] 정일구 기자 = 영화 '바람의 세월' 문종택 감독. 2024.04.08 mironj19@newspim.com

전남 팽목항(진도항)을 뒤흔들던 바람은 바램이 됐다. 2014년 4월 19일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30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평범한 학부모였던 이들이 유가족으로 투사로 변했다. 엄마와 아빠는 삭발과 단식투쟁, 삼보일배 등 거리로 나섰다.

지성이 아빠 문 감독은 2014년 여름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10년간 3654일 5000여개의 기록을 우직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2022년 김 감독과 영화 작업을 시작하며 그에게 건넨 영상은 7테라에 달했다. 이마저도 50테라에서 덜어낸 영상이다.

문 감독은 "나로서는 99.9%가 잘린 영상으로 0.1%가 그 안에 들어가 있으려나 그것도 안 될 것 같다"며 "영화를 만들려 촬영한 게 아니라, 기록하다 보면 진상 규명도 저절로 따라올 거로 생각했다"고 답했다.

문 감독은 "많은 분들이 10년이라고 말씀하시는 기간이 며칠밖에 안된 거 같다"며 "그만큼 진상 규명이 참 더디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유가족분들이 걸어온 10년의 걸음과 마음을 (영화를 통해)보여드리고 싶었다"며 "제도 개선의 싸움이고, 이를 통해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건 진상 규명"이라고 말했다.

문 감독은 "단순하게 잊지 말고 기억하자 그렇게 하면 저는 잊어주시고 기억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며 "내가 어떻게 옳게 살아갈 지, 이와 비슷한 상황일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봤음 좋겠다"며 관객에게 숙제를 던졌다.

문 감독은 젊은 세대들이 이 영화를 많이 보길 소망한다. 그는 "내가 이들 보다 갈 날이 더 빠르지 않겠냐"라며 "이 친구들이 이런 자료들을 가지고 뒤를 계속 쫓아오며 진상 규명이 되고 결국 안전이 도모되는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언론, 진실 보도와 꾸준히 관심을 갖고 약자들 옆에 있어야"

[서울=뉴스핌] 정일구 기자 = 영화 '바람의 세월' 김환태 감독. 2024.04.08 mironj19@newspim.com

언론에 대한 비판과 제언도 이어졌다. 문 감독은 "기자들이 큰 카메라를 들고 얼굴도 아니고 우는 눈동자를 찍으려 카메라를 유가족 눈 앞까지 들이댔다"며 "세월호 유가족이 우는 모습만 찍은 게 몇 년간 인터넷을 돌아다녔다"고 토로했다.

김 감독은 "약자의 편에서 진실 보도를 얼마만큼 꾸준하고 지속적으로 하느냐는 지점 같다"며 "어떤 시기에 맞춰서 따라가는 게 아니라 꾸준하게 그것들이 이어지고 그다음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좀 더 들어가고, 이런 관심을 가지고 계속 옆에 계셨으면 좋겠다"고 제언했다.

문 감독은 영화의 주인공을 '장소'로 꼽았다. 팽목항과 광화문, 단원고, 생명안전공원이 대표적이다. 그는 용산참사를 예로 들었다. 문 감독은 "그 곳에 가면 너무도 멋진 건물이 있을 뿐 어머니와 아버지, 노동자들이 투쟁했던 흔적이 하나도 없다"며 "아이들 사진만 걸어달라는 게 아니라, 함께한 시민들의 역사를 같이 기억하는 공간을 만들어 줬음 좋겠다"고 호소했다.

그는 4·16 생명안전공원 건립을 제안했다. 4·16 생명안전공원은 사업비 협의 과정에서 발목이 잡혀 거듭 지연되고 있다. 문 감독은 "우리 애들이 줄넘기도 하고 우리 지성이도 춤도 주고 자전거 타던 곳이 고향인 안산이다. 8군데로 흩어진 아이들이 당연히 와야 할 장소"라며 "안산 시민들이 책도 보고 차도 마시고 누우실 수도 있는 공감을 만들고 싶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 앞에서 와서 눈물을 흘려야 되는 장소보다, 미래 세대들이 여기 와서 같이 엄마 아빠 손 잡고 사진도 남기며 여기는 정말 안전한 공원이구나 라고 느끼는 곳이 되었음 좋겠다"고 덧붙였다.

영화는 '연대'를 통해 탄생했다. 세월호 10주기에 이르기까지 김 감독의 합류부터 촛불 시민들과 수많은 활동가들이 자리한다. 문 감독은 "아직도 일주일에 한 번씩 지금도 촛불을 들고 계시는 지역이 7군데가 있다"며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못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태원 참사와 5.18 민주화운동 유가족들을 만나 부둥켜 안고, 다른 유가족과 숱한 갈등 속에서도 함께 김장도 하고 희로애락을 나누는 모습을 비춘다. 영화 속 인터뷰에 참여한 유가족들은 '같이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영화를 통해 주어져 좋았다'는 이야기를 건넨다. 영화는 '꼭 안아주세요"라는 곡으로 끝을 맺는다.

aaa22@newspim.com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또 다른 제6사 사장 김일성의 출현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동북항일연군 제6사 사장 김일성(金日成)이 1937년 11월 13일 사살된 이후부터 한동안 이 부대에 대한 동향이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8년 봄부터 갑자기 새로운 김일성(金日成)의 움직임이 일본 경찰 정보망에 잡혔다. 신임 제6사 사장 역시 소련으로부터 파견돼 온 자였다. 그는 소련 지령으로 전임자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후임 제6사 사장 김일성(金日成)은 1939년 봄에 사(師)를 묶어서 방면군(方面軍)으로 편제를 변경하는 동북항일연군 제3차 개편 때 제1로군 제2방면군장(方面軍長)이 되었다. 소련은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이 소련을 공격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동북항일연군에 적극적인 군사 지원을 하였다. 그중에서도 소련군 내 한국·중국인 군관들에게 유격 전술을 교육하여 파견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신임 제6사(제6사는 동북항일연군 제3차 개편 때 제2방면군이 된 부대) 사장으로 취임한 김일성(金日成)은 본명이 김일성(金一星)이다. 김성주 별호와 같다. 그는 1930년 5월 30일 간도 폭동 사건 때 용정에 있었던 한인이 다니는 대성중학교 학생이었다. 이날 밤(1930년 5월 30일) 김일성(金一星)은 용정역 기관차에 불을 지르는 등의 행위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서울로 압송되기 전 탈출에 성공했다. 그 후 소련으로 건너가 적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련 공산당 지령에 따라 1938년 동북항일연군으로 파견돼 온 것이었다. [사진= AI 생성 이미지]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은 1938년 4월 26일 밤 제2방면군은 평안북도 후창(厚昌) 경찰서 부흥(富興) 주재소 대안 임강현(臨江縣) 제3구(三區) 6도구(六道溝)를 습격하였다. 병력은 약 500명이었다. 모두 개인화기를 소지하고 있었고, 경기관총 6정도 출동하였다. 총 5개 대(隊)로 나누어 나팔을 불며 공격했다. 일본인 세무서원 2명, 중국인 세무서원 1명을 현장에서 사살했다. 지역 주민 50여 명을 납치해 갔다. 현금 2천 원, 식량 1만 원 상당을 탈취하였다. 이에 일본군과 만주군은 중일전쟁 후방지역 안정화 차원에서 동북항일연군 토벌 작전을 강도 높게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군에 의한 토벌뿐만 아니라, 심리전, 교통 차단 등 다양한 봉쇄 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 1939년 봄이 되면 동북항일연군 제2·3로군의 전투력은 거의 소진돼 버렸다. 제2·3로군 중 전투력을 일부 보전한 부대는 소련으로 도주하거나, 소만 국경 지대로 은거했다. 전투력을 유지한 부대는 제1로군 뿐이었다. 이때 제1로군 사령관은 중국인 양정우(楊靖宇)였고, 부사령관은 중국인 위극민(魏極民), 사령관 비서처장 겸 군수처장은 앞서 설명한 한인 오성륜(吳成崙)이었다. 총병력은 3000여 명이었다. 제1로군은 동변도(東邊道)라 부르는 길림, 통화 간도 일대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부대 정비에 들어갔다. 이때 제3차 부대 개편을 단행하였다.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했지만, 병력 손실이 큰 데다, 추가 병력 보충이 어려웠다. 그래서 기존의 로군 아래 군(軍)을 없애고 군(軍) 예하 모든 사(師)를 통합하여 제1·2·3방면군으로 바꾼 것이다. 제1방면군장은 조아범(曺亞範), 제2방면군장은 김일성(金日成), 제3방면군장은 진한장(陳翰章)이었다. 일본군과 만주군은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1년 6개월간 더욱 강하게 동북항일연군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이때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양정우가 1940년 2월 23일 몽강현(濛江縣) 남쪽 490고지에서 사살되었다. 그는 부하 몇 명만을 거느린 채 끝까지 항전하다 죽었다. 양정우가 죽자, 부사령관 위극민, 비서실장 겸 군수처장 오성륜,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등 11명의 동북항일연군 수뇌부는 1940년 3월 사령관 양정우 사후 문제를 논의했다. 첫째 군은 대중 속으로 들어가 병력 획득 공작을 벌인다. 둘째 소부대로 분산하여 가능하면 북상하여 제2·3로군과 합류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때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은 부대를 10명 이하의 여러 개의 소부대로 나누어 북상하도록 하면서 모두 '김일성 부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에 김성주가 속한 소부대도 '김일성 부대' 명칭을 사용하면서 소련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이 무렵 일본군과 만주군은 머리를 빗는 식의 섬멸 작전을 뜻하는 빗질 작전, 쇠파리처럼 끝까지 따라붙는다는 쇠파리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제1로군 제1방면군장 조아범이 1940년 4월 8일 부대 내 한중간 민족 대립으로 한인 부하로부터 암살당했다. 제3방면군장 진한장은 1940년 12월 8일 일본군에게 사살되었다. 제1로군 사령관 비서실장 오성륜은 1941년 1월 30일 일본군에게 투항했다. 군 수뇌부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하게 무너졌다. 1941년 3월 말 기준 유기 시체 1282구, 투항 1040명, 체포 890명의 손실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은 부대를 여러 개의 소조직으로 재편하여 각자도생식(各自圖生式: 제각기 살길을 도모함)으로 도주하여 소련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 소련으로 도주한 동북항일연군은 대략 300명이었다. 주요 인물을 살펴보면, 제2로군 총사령 주보중(周保中), 제3로군 총사령 장수전(張壽錢), 제2로군 참모장 최용건(崔庸健), 그리고 문제의 김성주와 그의 처 김정숙(金靜淑)도 이들 무리에 끼어있었다. 1940년 11월이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2026-03-09 06:00
사진
배우 이재룡, 강남서 사고 뒤 도주 [서울=뉴스핌] 김가희 기자 = 서울 강남에서 교통사고를 낸 뒤 현장을 떠난 배우 이재룡이 경찰 조사에서 음주운전이 아니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8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강남경찰서는 도로교통법 위반(사고 후 미조치) 혐의로 이씨를 조사하고 있다. 이씨는 지난 6일 오후 11시께 서울 강남구 청담역 인근 도로에서 차량을 운전하던 중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은 뒤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현장을 떠난 혐의를 받는다. 이재룡. [사진=CJ E&M] 사고 이후 이씨는 차량을 자택에 주차한 뒤 지인의 집으로 이동했다가 경찰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이 실시한 음주 측정 결과 이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 정지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나타났다. 다만 약물 간이 검사에서는 음성 반응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경찰 조사에서 "운전 당시 음주 상태가 아니었다"는 취지로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차량 블랙박스 영상 등을 토대로 사고 당시 상황과 음주 여부 등을 확인하고 있다. 한편 이씨는 과거에도 음주와 관련한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2003년 강남에서 음주운전 사고를 낸 뒤 음주 측정을 거부해 면허가 취소됐고, 2019년에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강남의 한 볼링장 입간판을 파손해 재물손괴 혐의로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rkgml925@newspim.com 2026-03-08 15:03
기사 번역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종목 추적기

S&P 500 기업 중 기사 내용이 영향을 줄 종목 추적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이 내용에 포함된 데이터와 의견은 뉴스핌 AI가 분석한 결과입니다.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 매매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 및 결과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으므로, 투자 전 충분한 조사와 전문가 상담을 권장합니다.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