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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D 폴리티션 스토리] ①정청래가 말하는 '인간 정청래'…눈물까지 보인 사연은

기사입력 : 2024년07월26일 17:33

최종수정 : 2024년07월26일 17:38

정치인들의 개인적 인생 여정을 조망하는 내용의 '폴리티션 스토리'가 뉴스핌 KYD(Korea Youth Dream)의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시작됐다. 

첫 번째 게스트로는 최근 정치권의 가장 핫한 인물로 떠오르고 있는 정청래 법사위원장(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출연했다. 

정 의원은 지난 25일 뉴스핌TV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폴리티션 스토리'에서 본인의 어린시절부터 부모님과의 추억, 학원을 운영하던 시절 등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간 정청래'의 인생에 대해 자세히 털어놓았다. 

정청래 의원은 1965년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대전 보문고와 건국대 산업공학과,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북한통일정책학과(정치학 석사)를 졸업했다.

건대 재학 중 학내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학생운동에 발을 들였다. 이후 전국대학생대표협의회(전대협) 활동을 하면서 1989년 미 대사관저 점거 농성에 참여한 일로 옥고를 겪었다. 

출소 후 1992년부터 현재 자신의 지역구인 마포구 성산동에서 보습학원을 운영하다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후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에 입성한 뒤 19, 21, 22대 총선에서 당선돼 4선 중진 반열에 올랐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윤채영 의원님의 출생부터 좀 먼저 들어가볼게요.

정청래 출생의 비밀?

윤채영 출생의 비밀 있으신가요? 충청남도 금산군 출생으로 알고 있고요. 의원님이 10남매 중에서 좀 의외로 막내이시더라고요. 저 막내 좀 의원님은 좀 앞장서서 맏이 역할을 하셨을 것 같은 이미지인데 의외로 막내세요.

정청래 10남매 중에 10번째 막내. 근데 호적상에는 5남매 중에 막내 큰 형님이 살아계신데 39년생 85세 둘째 형님이 53년생 사이에 다섯을 잃었어요.
예전에는 돌 지나서 아장아장 걸어다닐 때 홍역이 와서 이렇게 죽고 홍역이 와서 죽고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다섯을 먼저 가슴에 묻고 저는 저희 큰형님이 장가 가서 첫 손주를 큰 형수가 가졌을 때 5개월 늦게 며느리보다 5개월 늦게 저를 임신해가지고 사실은 대전에 있는 산부인과에 가서 저를 안 낳으려고 지우려고 했는데 제가 좀 놔달라고 뱃속에서 생존권 투쟁을 열심히 하는 바람에 이것도 생명인데 안 낳으면 안 되지 하고 딱해서 저를 낳았다고 그랬습니다.

최연혁 6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은 대개 그런 스토리들이 가정마다 있는 것 같아요. 막내인 경우는.

정청래 제 아내도 10남매 중에 10번째 막내.

윤채영 좀 인연이신 것 같아요.

정청래 특이합니다.

윤채영 의원님이 금산군에서 이제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시다가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나오셨더라고요.
이렇게 대전으로 가신 이유가 있으세요?

정청래 원래 다 그런 거 아닙니까? 시골에 살다가 이제 도시로 가는데 저희 동네는 워낙 오지마을 산골 오지마을이라서 학생이 무슨 공부냐 이런 얘기를 실제로 많이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토요일 일요일이 제일 싫었어요.
왜냐하면 논밭에 가서 일을 해야 되니까 정말 학교 가는 게 너무 좋았어요.
일을 안 해도 되니까. 제 기억으로는 6학년 때 중학교 1학년 때 이런 시골에서 평생 내가 썩으면 안 되겠다.
대전으로 무조건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야 되겠다 소위 말해서 철이 든다고 그러잖아요.
그게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 때 그랬던 것 같습니다.

최연혁 공부를 잘하신 모양입니다.

정청래 그때는 좀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중학교 때 진짜 열심히 공부했는데 시험 공부를 하잖아요.
그러면 새벽 1시 2시 3시 막 이렇게 공부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와서 전기세 아까우니까 빨리 끄고 자라 이런 얘기 들었고 또 다음 주 시험이면 이제 그 전 주 토요일날 일요일 날은 공부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밭에 가서 일하는 대신 몰래 새벽에 일어나서 옛날에는 도시락을 변또라고 그랬습니다.
일본말로 변또에다가 꽁보리밥 넣고 단무지 고추장 넣어가지고 몰래 그걸 아침에 일찍 새벽에 그걸 제가 도시락을 싸가지고 학교로 도망을 가요.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아버지가 4km를 또 잡으러 와요.
학생이 무슨 공부냐 일하러 가자 그리고 또 끌려가서 또 일하고 그런데 이제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어요.
저희 집이 화전민 출신이거든요. 그러니까 집하고 아버지가 산에다가 불을 질러서 나무를 태워서 곡갱이로 일군 밭이 6천 평이 있었어요.
근데 그게 2km 정도 떨어져 있어요.
그러면 운반 수단이 지개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집에서 거름을 지어서 밭에다가 거름을 하고 또 거기서 곡식들이 나면 그걸 또 지게로 져서 나르고 저희 집뿐만 아니라 저희 동네 아이들은 다 지게질을 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시골 생활이 너무 힘들고 고단하고 근데 제가 쟁기질만 안 해보고 다 해봤거든요.
쟁기질은 왜 못하냐 소가 무시합니다. 어린아이 목소리로 이리야 그러면 안 갑니다.
이랴 이러면 안 갑니다. 이랴 이래야 갑니다. 그 쟁기질만 제가 못 해봤어요.
나머지는 똥장군도 저보고 뭐 다 해봤습니다. 그런데 제일 힘든 일이 있어요.
비가 갑자기 쏟아지면 물꼬를 터야 돼요. 천수답이기 때문에 또랑에 있는 물을 다 논으로 이렇게 논에 물길을 내놨는데 비가 많이 오면 논둑이 터지는 거예요.
그러면 올해 농사 다 망치는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전속력을 향해서 뛰어야 됩니다.
비가 막 쏟아지면 물꼬를 또랑 밖으로 터져야 돼요.
논으로 물이 못 들어오게. 조금만 늦으면 논둑이 다 터져버리니까 새벽 2시 3시에 초등학교 꼬마가 얼마나 잠이 많아요.
근데 깨웁니다. 그러면 비몽사몽간에 뛰어가야 돼요.
우산도 없이. 검정 고무신 신고 가거든요. 그럼 미끄러져서 검정 고무신이 벗겨져요.
그럼 양손에 검정 고무실을 들고 맨발로 뛰는 겁니다.
비는 막 쏟아지죠. 껌껌하죠. 그러면 가끔 가다가 뭐 병조각 이런 데 발이 찢어지기도 하고 제일 끔찍한 게 뱀을 밟을 때도 있었어요.

윤채영 맨발로 뛰어가는?

정청래 맨발로 뛰어가요. 전속력으로 뛰어가서 물꼬를 터주면 그때 이제 가뿐 숨을 몰아쉬면서 비를 맞고 다시 집으로 오는데 온몸에 김이 막 나요.
그러면서 이제 빗물인지 눈물인지 그랬던 적이 많죠.
지금도 가끔 집에서 잠자기 전에 누워서 그때 지게질했던 그 산길 지금은 이제 길도 다 없어졌지만 생생하게 지금도 다 기억하고 제가 만약에 그림을 잘 그리면 그걸 그림을 리얼하게 다 그리고 싶은 고단했던 나의 지게를 지고 올라갔던 길들 그려보고 싶은. 지금도 너무 선명하게 기억이 다 남아 있습니다.

윤채영 부모님이 고등학생 때 공부를 좀 잘하셨는데 어쨌든 더 좋은 대학을 가려고 의원님께서는 재수를 하신 거예요?

정청래 아니 공부를 그렇게 잘한 건 아니고 저는 초중고 문예반만 했어요.
시골이지만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된다 그래서 이제 책 읽고 글쓰고 좀 특이하게 좀 했어요.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이제 누나가 서울에 직장 다니고 있었는데 64권짜리 그때 뭐 금성출판사인지 어디 출판사인지 세계문학전집 64권짜리를 보내줬는데 누나가 한 10년 후에 얘기했어요.
그거 내가 보내준 거라고 그래서 그걸 이제 읽으면서 문학 소년이었어요.
제가 1번이 전쟁과 평화 부활, 톨스토이 스탕달의 적과 흑 뭐 이런 몽테 크리스토 백작 이런 책들, 도스프스키의 죄와벌 이런 책을 그때 다 읽었어요.
그리고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맥베드 베니스상인 이런 거 다 읽었는데 시골에서는 그런 책을 읽는 게 저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그걸 얘기해 주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애들한테 책을 읽고 저도 모르게 이런 책은 우리 시골의 아이들도 알아야 돼.
근데 그 아이들은 책이 없으니까 내가 읽고 애들한테 얘기해 줘야지 그러다 보니까 책 읽는 습관이 그때 들었어요.
누구한테 얘기해줘야지라고 읽으면 앞에 읽었던 거 기억이 안 나면 다시 읽게 돼요.
이게 책 읽는 좋은 독서 습관이거든요.

최연혁 맞습니다.

정청래 그래서 그 습관이 중학교 때 좀 들었던 것 같고 고등학교 때는 특히 이제 문학 동아리에 들어가지고 일주일에 시 한 편씩 썼습니다.
그래서 하고 대학 때 이제 학보사를 하게 되고 그런데 이게 이제 의정활동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됩니다.
이렇게 글을 자꾸 쓴다는 것은 지금도 SNS는 제가 직접 다 쓰거든요.
지금 여기도 오기 전에 지금

윤채영 하나 올리셨잖아요. 거울 셀카 하나 올리셨던데요.

정청래 추경호 원내대표가 저보고 거울 보고 좀 반성 좀 하라고 그래서 실제로 거울 전신거울 앞에 서가지고 제가 사진을 찍었어요.
추경호 원내대표 건의대로 거울 앞에 섰다. 지극히 내가 정상적인데 그래서 법사위원장 더 열심히 해야 되겠다 그렇게 다짐했다 하고 지금 페이스북도 하나 올리고 왔어.

윤채영 네 봤어요. 셀카 포즈는 좀 연구를 하셨던 거예요? 아니면

정청래 아니 이제 셀카 찍을 때 너무 위에서 찍거나 너무 아래에서 찍으면 안 되잖아요.
적당하게 말고 찍으셨더라고요.

윤채영 그래서 기자들 사이에서는 연구하신 거 아니냐 포즈를. 근데 의원님 문학 소년인데 또 이과 출신이시잖아요.

정청래 그 사연이 다 있어요. 사연이 있는데 제가 사실은 당연히 문과를 썼어요.
그 일대 근데 저희 학교가 6개 반밖에 없었는데 2개 반만 문과고 4개 반이 이과예요.
그러니까 선생님들은 그 구조에 맞춰서 이과 선생님 문과 선생님이 정해져 있지 않겠어요 제가 당연히 문과를 썼는데 문과는 경쟁률이 센 거예요.
이과로 다 보내야 되는 거예요. 고1 때의 담임선생님이 교량 선생님이었는데 저를 부르더라고요.
그러더니 위협을 하면서 남자가 말이야 이과를 가야지 무슨 문과를 가려고 밥 빌려 먹으려고 그러냐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 무서워서 그냥 이과로 썼어요.
진짜 문과로 갔어야 되는데 고등학교 때 제가 이제 문과 체질이고 또 문과 과목은 너무 이제 공부를 제가 성적이 좋았는데 이과는 너무 하기가 싫은 거예요.
이게 재수할 때도 문과로 옮길까 그런데 이제 대학을 먼저 간 친구가 야 이과에도 문과 과목이 있다.
문과 학과가 있다. 그게 산업공학과다.
그러니까 너는 그게 원래는 공업경영학과다. 이건 완전 문과다.
그러니까 이과 문과 변경하지 말고 너는 그냥 이과로 가서 이과 속에 문과 학교를 가면 된다. 그래서 제가 산업공학과를 가게 됐어.

최연혁 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윤채영 대학가서는 그래도 잘 적응을 하셨어요?

정청래 별로 공부 안 했어요. 데모하느라고.

윤채영 가셔서 학보사를 생활했는데 근데 그 배경 들어보니까 경제적으로 좀 궁핍해서 시작을 했다고.

정청래 그렇습니다. 시골에서 저희는 최종 학벌이랄까 목표가 상고 나오는 거였어요.
대학 간다는 건 상상도 못한 거였는데 어찌어찌 하다가 그 시골에 있는 제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간 거예요.
제 등록금이 대학 1학년 때 66만 원이었습니다.
66만 원이었는데 농협 빚을 냈어. 제 등록금을 내주셨어요.
아버지가 제 기억으로는 70만 원 빚을 내서 등록금 66만 원인가를 내고 나머지 돈을 저한테 주셨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학교를 한번 가보자. 그래서 이제 대학을 와서 이제 등록을 하고 등록하면 이제 교양서적 이런 걸 받잖아요.
근데 책 살 돈이 없어요. 그래서 대학 때 제가 돈으로 4학년 때까지 책을 사본 적이 없습니다.
그게 다 빌려서 보고 복사해서 보고 그래서 아마 대학 4년 졸업하면서 입학식 때 받은 책 말고 책 한 권도 못 사본 사람은 저밖에 없지 않을까 힘들었어요.
사는 게. 근데 시골에서 이제 대학을 갔는데 그래도 부모님께 기쁨과 선물을 드리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세 가지를 하고 싶었어요. 1학년 때 시골 촌놈이 왔는데 그래도 부모님께 기뻐하시도록 해야 되겠다.
그래서 과대표에 도전했어요. 입학식 직후에 그래서 제가 과 대표가 됐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편지를 썼어요. 그래서 이 시골 촌놈이 서울에 와서 어머니 아버지 과대표가 됐습니다.
되게 좋아하셨어요 과 대표가 됐어요. 그리고 학보사 기자에 제가 도전했어요.
학보사 기자를 하면 조금 월급이 나왔어요.

윤채영 얼마정도.

정청래 그리고 제가 3학년 때 5만 원인가 5만 5천 원 나오고 3학년 때는 등록금 반액이 면제가 됐습니다.
그리고 1학년 때는 이제 월급이 없었고 2학년 때부터 정식 기자가 되고 1학년 때는 견습기자 취재 기사 쓰고 이렇게 쓰면 원고료를 조금씩 줬어요.
그래서 그걸로 간신히 연명을 했어요. 그리고 대학로에서 누나 직장 다니는데 자취를 같이 했는데 집에 갈 차비가 없으면 학보사 편집실에서 몰래 숨어서 자기도 하고 그리고 차비가 없을 때도 있었어요.
그러면 대학로까지 걸어갑니다. 그 차비를 빌리면 되는데 친구들한테 자존심상 못 빌리겠더라고.

최연혁 그렇죠.

정청래 내가 돈이 많으면 여유가 있으면 없을 때도 있으니까 빌릴 수도 있는데 워낙 맨날 없이 지내니까 차비가 없으면 차비가 없다고 돈을 차비를 빌리는 게 너무 자존심이 상하더라고.
그래서 이제 학보사도 이제 합격을 했어요. 그래도 부모님한테 또 편지를 했죠.
학보사 기자가 됐다고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가 너무 좋아했어요.
그리고 그때는 제가 대학 1학년 때 문무대 2학년 때 전방 입소를 했습니다.
대학생들이 그래서 문무대에 갔어요. 문무대에 입소를 일주일 동안 했는데 5개 과가 모였는데 거기서 중대장을 뽑는다는 거예요.
누가 중대장 할 거냐고 이제 손 들었어요. 그랬더니 구령을 하라고 그러더라고.
열중 쉬어 차렷 이거 이제 중대장이 그 구령을 해야 되니까 그런데 제가 목소리가 굉장히 큽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도 제가 몇십 명을 다 제압합니다.
목소리로 그랬더니 열중샷 차례 열중 샷 이거 저 이거 했더니 제 목소리가 제일 컸어요.

윤채영 마이크 없이요?

정청래 그래서 제가 중대장이었어요. 문무대 나올 때 퇴교할 때 제가 최우수상도 받고 메달도 받았어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집으로 갔습니다. 제가 여름방학 때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한테 드리고 제가 5개 학과의 총 대장이었습니다.
중대장 했습니다. 그래서 메달 드리고 이렇게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과대표를 하든 뭐 문무대 입소 중대장을 하든 학보사 기자를 하든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때는 그게 다였어요.
그래서 세 가지 목표를 1학년 때 다 이룬 거예요. 촌놈이 서울 생활하면서 성공적인 소프트 랜딩을 한 거예요. 일종의 나름대로 재밌게 살았어요.

윤채영 열심히 하셨던 것 같아요.

최연혁 말씀을 들어보니까 항상 부모님 아버님 말씀하시면서 항상 그 생각을 하시는데 효자이셨던 모양입니다.

정청래 효자는 아니죠. 제가 불효자죠. 왜냐하면 학생 운동한다고 4번 잡혔죠.
두 번 감옥 갔죠. 그리고 저 두 번째 감옥 갔을 때 어머니가 면회 왔다가 충격받고 3일 후에 쓰러지셔서 이제 못 걸으시고 누워 계시다가 6년 후에 돌아가시고 있기 때문에 이제 효자는 아닌데 중학교 때 계속 쓴 일기장이 지금도 있거든요.
근데 일기장은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습니다. 오늘도 내가 또 일을 하러 가야 된다니 나는 공부하고 싶은데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데 일을 시킬까 공부를 안 시키고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면 나한테까지 이런 중노동을 시킬까 이런 시골을 탈피해야지.
그러면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어. 내가 대학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오고 27살 때부터는 내가 막내지만 부모님을 모셔야지 이런 일기를 계속 쓴 거예요.

윤채영 일기장 지금 집에 갖고 계신 거예요. 그거 저희 좀 보여주시면 안 돼요?

정청래 제가 이렇게 거침없이 정청래라는 책에 보면 그 일기가 쭉 이제 게재했는데.

윤채영 아 거기 있구나.

정청래 게재를 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그걸 보고 교장 선생님한테 얘는 상을 줘야 된다 그래서 없던 상을 만들었어요.
효행일기상이라고 효행일기상이 제가 한 번 받고 없어진 상입니다.
저희 중학교에서 그래서 상을 받았어요. 근데 그때 선생님이 그 말씀을 하셨어요.
너는 진짜 착한 아이라고 그리고 부모님 생각을 이렇게 하냐고 너는 철이 들었다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뭐라 그럴까 삐뚤어지지 않은 게 참 다행이고 항상 이렇게 불만이 많았어요.
토요일날 일요일날 공부 못하게 하고 일 시키는 걸.
근데 이상하게 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은 없었어요.
한 번도 제가 재수할 때도 담배를 안 피웠거든요. 보통 당구치고 그렇죠 술 먹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이거 보면 실망하실까 그래서 대학교 2학년 때 담배도 처음 배웠어요.
1학년 때도 안 피웠습니다.

최연혁 문무대에 가서 많이들 피는데 말이죠. 그때도 안 핀 모양입니다.

정청래 우리 어머니가 실망하실까 봐. 그래서 그 고등학교에서 학력고사 끝나고 보통 나이트 클럽도 가고 그러지 않습니까? 저는 안 갔어요. 친구들이 막 가자는데 우리 어머니가 또 얼마나 실망하실까.

최연혁 그때는 돈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겠고요.

정청래 친구들도 이제 돈 대주는 데도 안 갔어요.

윤채영 의원님 근데 그 교도소 생활 같은 경우에는 한 번 갔다 왔다가 두 번 갔을 때 어머니께서 굉장히 충격을 받으셨다고.

정청래 네 그렇습니다.

윤채영 두 번 가서 그러신 거예요? 아니면

정청래 이거 얘기하다가 또 눈물 날지 모르는데 강연 때 제가 많이 이제 쓰는 건데 짧게 말씀드리면 큰 형님부터 지금 살아계신 둘째 형님 사이에 다섯을 잃었고 그리고 6 25 때는 이제 대둔산이 높습니다.
산 게 즐기니까 빨치산이 많아요.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 생과 사가 낮과 밤이 바뀌면서 왔다 갔다 하거든요.
굉장히 똑똑했어요. 어머니가 많이 알고 그리고 정무적 감각이 뛰어납니다.
그러니까 국군 인민군하고 똑같이 대했대요. 안 죽으려고 인민군을 도우면 국군이 와서 죽이고 국군을 도우면 인민군이 와서 또 뭐라고 하고 그러니까 그랬는데 어찌된 일인지 인민군들이 생각할 때는 국군 편을 더 든다고 생각했나 봐요.
해가 뉘엿뉘엿지면 인민군들이 산에서 내려오는데 아버지를 끌고 간 거예요.
집 앞에 논바닥에서 인민재판을 했어요. 근데 사형 총살형 직결 처분을 받은 겁니다.
아버지가 그래서 저희 동네에 인민군 총살장이 있거든요.
저희 어머니가 얼마나 놀라고 울었겠어요.
그 남편 끌려간 뒷모습을 보면서 거기 가면 그다음 날 이제 시신 수습하러 가야 되고 걸어 나온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버지가 밤 10시쯤에 걸어서 나왔어요.
그런데 저희 어머니 판단이 굉장히 정확했죠. 신발 벗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 형님 아기 깨워서 업고 솥단지 하나만 딱 머리에 이고 4km를 야간 산행을 합니다.
그리고 지서에 가서 자수를 해요. 우리 남편이 인민군한테 끌려가서 인민재판 받고 총살형 선고받아서 끌려갔다.
살아서 돌아왔다. 근데 우리 남편이 목숨만은 부지하려고 인민군한테 협력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수하러 왔다. 지서에서 안 믿는 거예요.
이걸 이중 스파이가 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그때 했던 말 우리 남편이 신발도 벗지 않고 왔다.
그래서 어머니가 신발도 벗지 말라고 한 거예요. 순간 판단한 거예요.
그래서 신발을 실제로 안 벗고 자수하러 왔으니까 믿어준 거예요.
그래서 자수해서 살은 거예요.
저희 집이 저희 어머니는 다섯 아기를 묻으러 아버지가 이제 애를 안고 산으로 가잖아요.
묻으러 근데 아버지가 어디다 묻었는지를 한 번도 얘기를 안 했대요.
그래서 애가 어디 묻혀 있는지 어머니는 몰라요. 아버지만 아는데 아버지가 평생 비밀로 했나 봐요.
아 힘들어 이런 얘기하면. 

정청래 그러니까 이제 제 짐작에는 아버지가 왜 얘기를 안 하셨을까 그러면 거기 찾아가서 울까 봐 얘기를 못하는 거예요.

최연혁 여전히 그 그때의 아픔이 생생하게 아주 그대로 내 머리와 가슴 속에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정청래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제 서울에 있는 대학 서울대를 갔어요.
동네는 막 난리가 났고 좋아하고 막 이랬는데 제가 이제 첫 번째 수배를 받았습니다.
88년도에 조국통일 특별위원장 가자북으로 오라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그래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이제 수배를 받았는데 수배를 받으니까 학교 밖에도 잘 못 나가고 그래서 밖에 나가려면 그때 빡빡머리니까 삭발 투쟁도 하고 막 이랬으니까.
그래서 그때 가발 쓰고 다녔어요.

윤채영 아 진짜요 머리를 밀고?

정청래 가발 쓰고 안경도 끼고 꼭 여학생하고 같이 다녔어요.
이렇게 위장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제 갔다가 일 보고 학교 들어올 때도 갑자기 툭 담 넘어서 뛰어오고.

윤채영 위원장 하던 시절 말씀하시는 거죠?

정청래 그렇게 석 달간 이렇게 수배 생활을 했는데 학교에서 연합집회가 있어가지고 한 2~3천 명이 모였는데 너무 총학생회 소파에 자니까 허리가 아파가지고 이제 온돌방에 자고 싶어가지고 3천명 연합제피가 있어서 여기에 내 몸을 숨겨서 나가면 되겠다.
근데 프락치도 몸을 숨긴 거예요. 제 뒤를 따라온 거예요.
몰랐죠 프락치가 있는지 그래서 후배 자취방에 갔는데 1시에 안기부가 덮친 거예요.
저를 덮쳐가지고 저는 이제 끌고 갔는데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기더라고요.
그리고 물부터 틉니다. 수돗물 호텔방 저는 물고문 시키는 건가 나중에 물고문은 이제 저는 안 당했는데 수건으로 눈 가리고 손 뒤로 결박하고 4시간 동안 맞은 것 같아요.
제가 지금도 이렇게 용감하게 사는 이유가 그때가 가장 인생에서 비참했던 때인데 한 10명 정도 건장한 안기부 요원들한테 이제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갔으니 얼마나 이게 공포스럽겠어요.
그런데도 제가 정신 승리를 했어요.
아프다고 울지 않기 그리고 봐달라고 사정사정하지 않기 그리고 구만 때리라고 애원하지 않기 그래서 때리고 벽에 구석에 가서 처박혀 있으면 엉금엉금 기어와서 방 가운데 다시 또 앉아 있습니다. 또 때리라고.

윤채영 저는 궁금한 게 그 당시에 어떻게 그런 애국심 혹은 그 자긍심을 갖고 그런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가 궁금해요. 그렇게 내 목숨까지 위협하면서.

정청래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반공소년이었거든요. 근데 이제 학보사 하면서 의식화가 된 거죠.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 너무나 충격이었고 저희 세대는 다 그랬어요.
광주 5.18 항쟁 비디오 보면서 실제로 대한민국 군인들이 막 대검으로 여자들 찌르고 그런 게 적나라하게 다 나오거든요.
눈으로 볼 수가 없어요. 내가 체제 내화됐던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까지 박정희 정권이 전두환 정권이 국민들을 학살하고 막 이랬던 정권이었던 거예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내 형제 내 누구도 다 이렇게 당할 수 있는 거잖아요.
독재 정권이라는 게 그래서 이거는 안 되겠다 이게 사명감이 생긴 거고 역사 의식이 생긴 거죠.
그래서 감옥은 이제 서울구치소에 사는데 우리 교수님 잘 아시겠지만 우리 윤 기자는 기억을 못할 수도 있고. 88년에 오공청문회 광주 청문회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때 노태우 정권이 완전히 뒤로 밀려버리니까 화해의 제스처로 감옥에 있는 학생들을 다 풀어줬어요.
그래서 석방이 됐어요. 제가 그러니까 이제 석방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시골에서 인천에 있는 누나 집으로 와 있더라고요.
갔더니 어머니가 6.25 때 아버지한테 신발 벗지 마세요 했던 거하고 똑같이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신발 벗지 마라. 아니 석방돼서 왔는데 어머니가 신발 벗지 말라는 거예요.
들어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순간 이게 뭐지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쟁반에다가 생두부 두 모를 갖고 오더라고 이걸 먹고 신발을 벗어라 그래서 한 번은 먹었어요.
한 번은 먹었는데 두 번째는 못 먹겠더라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우시면서 입을 벌려서 그걸 다 넣으시더라고 두 번 다시 감옥 가지 마라.
그래서 두 모를 먹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또 간 거예요. 1년 후에 그러니까 불효자죠.

윤채영 그래서 부모님만 생각하시면 좀 울컥하시는 거구나.
여기서 좀 막간으로 MBTI 제가 검색해 보니까 ENFP.

정청래 맞아요.

윤채영 연예인으로 따지면 BTS에 RM이라고 리더가 있거든요. 맞는 것 같으세요?

정청래 그렇게 틀릴 것 같지는 않아요. 그게 왜냐하면 제가 이렇게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야 이놈 자식아 노래 좀 그만 부르고 다니라고 근데 이제 저는 이제 막 그 테이프로 나오거든요.
카세트 테이프 라디오 낡은 라디오에 있으면 그걸 노래를 다 외워요.
제가 그래가지고 우리 집 앞에 바로 저기 산동네니까 산이 있거든요.
앞산 거기에 큰 둥구나무가 있었어요. 그럼 둥구나무 위에 올라가가지고 신곡 발표를 제가 이렇게 많이 했어요.

윤채영 신곡 발표요?

정청래 유행가 신곡 나오면 그러면 이제 다 들리거든요. 그러면 거기다 대고 막 노래를 불러요.
막 그러면 이제 동네 사람들이 막 잘한다고 박수를 치는 분도 있고 우리 어머니는 창피하다고 노래 좀 그만 부르라고

윤채영 누구 끼를 물려받으신 거예요?

정청래 모르겠어요. 그건 그래서 제가 대학교 1학년 학생운동권 하기 전까지 히트곡은 제가 다 부를 줄 알아요.
지금은 이제 잘 안 가는데 초선 때만 해도 노래방 많이 갔어요.
제가 왜냐하면 노래를 제가 한 700~800곡 정도 부를 수 있어요.
노래방 가면 아무거나 이렇게 펴고 그냥 노래를.

윤채영 제일 좋아하시는 곡이 뭐예요?

정청래 제가 원래 18번은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로인데 그걸로 하다가 너무 꺾기를 내가 많이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좀 듣기 안 좋다고 그래서 하남석의 밤에 떠난 여인을 18번으로 하다가 이제 정치를 하면서 노래 부를 기회가 많아요.
동별로 무슨 망원동 성산동 주민 노래자랑 하고 그러면 거기에 또 tpo에 맞게 또 노래를 해야 되잖아요.
근데 이제 마을 주민들이 유치원생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내 나이가 어때서예요.

윤채영 저도 좋아해요.

정청래 그래서 내 나이가 어때서를 많이 부르고 가끔 가다가 조광조에 만약에도 부르고 상황에 따라 이제 곡 선택을 달리하거든요.
하여튼 그래요. 저도 MBTI 이거 봤는데 솔직하게 적잖아요.
이렇게 그러다 보니까 ENFP가 나오는데.

윤채영 직접 MBTI 검사를 하신 거죠? 그게 나오신 거죠?

정청래 ENFP가 나왔어요.

윤채영 학원 이야기를 좀 빼놓을 수가 없어서 그 마포 성산에서 길잡이 학원을 차리셨잖아요. 왜 거기에 차리게 됐는지.

정청래 재수 때 동기가 있어요. 학원에서 이제 좀 공부 좀 했던 친구들.
그래서 나중에 우리가 대학 나오고 같이 뭘 하자 이렇게 도원결의 비슷한 걸 했어요.
3명이었는데 저는 이제 감옥 갔다 오고 그 친구도 이제 군대 갔다 오고 뭐 이러면서 사실 우연히 이렇게 만났어요.
제가 조그마한 학원을 강사를 하게 됐어요. 그때 인연이 됐던 재수할 때 알았던 선배 그리고 두 친구를 다 학원을 끌어들였어요.
근데 그 학원에서 같이 일을 못 하게 됐어요. 근데 책임지는 애들이 생긴 거예요.
그 애들 책임지려고 처음에는 공부방 이런 걸 하려다가 그게 안 돼가지고 학원을 차리게 된 거예요.
처음부터 학원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또 이제 열심히 했고 그러다 보니까 평이 좋고 그래서 이제 엄마들이 이제 애들을 많이 보내준 거예요.

윤채영 100여 명 정도 있었던 거예요?

정청래 처음에는 8명인가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이제 점점 늘고 그래서 IMF 때 성장을 많이 했죠.
IMF 때 왜냐하면 IMF가 되니까 엄마들이 이제 애 학원을 못 보내겠다고 그러면 제가 학원을 오시라고 그래요.
진짜 돈 때문에 그러시냐 학원비 때문에 그렇대요.
그러면 그냥 다니시라고 그래서 제가 체크를 하라고 그랬어요.
전액 면제 반액 면제 10만 원 면제 그건 엄마가 자율적으로 선택하세요.
그대로 다 해드렸어요. 그래서 그게 한 달에 몇천만 원 됐어요.
그런데 엄마들이 이제 고맙잖아요. 그리고 미안하잖아요.
그 옆에 있는 엄마를 설득해서 한 애를 또 데리고 와 그러다 보니까 면제해준 금액의 2배가 매출액이 올라가더라고요.
IMF 97년도에 맞고 3년 동안 학원이 500% 성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때도 스파르타식 학원 그렇게 해서 이제 엄마들이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죠.
저 학원을 보내면 성적이 무조건 올라 실제로 그랬고요.
진짜로 엄청 올라왔고요. 우리 학원에 온다고 생각하면 애들이 이미 공부할 마음을 먹고 와요.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요. 소문이 그렇게 나고 이미지가 돼가지고 그래서 공부를 하고 싶지 않은 애들은 안 왔어요.
굳은 결심을 하고 그런 애들만 왔기 때문에 당에 이제 분위기도 그렇고 그래서 실제로 성적을 잘 냈고요.
그런데 이제 제가 학원을 하면서도 참 아까 조국 통일 이런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학원에 있는 모든 사진 걸개 그림 그림 액자 이런 건 다 백두산 천지로 통일했어요.
그래요. 민족을 생각하는 학원 큰 꿈 작은 실천의 배움터 길잡이 학원 그래서 우리는 통일을 생각하는 학원이다.
일관성 있게 제가 이제 한 거죠. 그래서 제가 사재를 털어서 7월 28일부터 8월 2일까지 4박 5일 휴가 기간이잖아요.
그때 중2부터 고2까지 백두산 제가 여행을 시켰습니다.
제 돈으로 애들 20명을 분단 조국의 현실을 봐라 그래서 갔다 오면 기행문도 쓰게 하고 그래서 그런 것도 했어요.
제가 왜냐하면 그리고 애들한테 정신 교육도 많이 했는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나와서 높은 지역에 가서 아랫사람 괴롭힐 생각이면 공부하지 마라 그랬어요.
제가 공부를 해서 높은 자리에 간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져야 될 사람이 많다는 거고 리더가 된다는 것이고 리더는 많은 사람들에게 솔선수범해야 된다.
그게 아니고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서 높은 자리 가서 아랫사람들을 괴롭힐 생각이라면 공부하면 안 된다.
그렇게 애들한테 정신 교육을 제가 진짜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원 사업을 했던 거는 굉장히 지금 생각해도 제가 좀 잘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ycy1486@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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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이낙연, 대선 출마 시사 [서울=뉴스핌] 이재창 정치전문기자 = 이낙연 전 국무총리는 24일 자신의 거취에 대해 "어느 것이 이 시점에 국가에 더 보탬이 될까를 판단해서 늦기 전에 결정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 전 총리는 이날 뉴스핌TV와의 특별 인터뷰에서 "출마를 하건 누군가를 돕건, 아니면 그것도 하지 않건 몇 가지 선택지 중에서 잘 선택을 하겠다"며 이 같이 말했다.  [서울=뉴스핌] 이낙연 전 국무총리 이 전 총리는 "국민적 정당성을 가진 국회와 대통령이 마주 달리는 기차처럼 충돌해서 파멸이 온 것"이라며 "이것을 빨리 극복하기 위한 개헌을 주장했지만 민주당에서 개헌을 못하겠다고 하면 공수가 뒤바뀐 내전 상태가 계속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불행이 뻔히 보이는데도 이대로 가자는 건 불을 보고 덤벼드는 불나방 같은 어리석은 처사"라고 비판했다.  이 전 총리는 "국민의힘은 결연함이나 절박함이 보이지 않고 웰빙을 위해 사는 사교 클럽 같고 민주당은 대중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자기들만의 성에 갇혀서 희한한 짓들을 하는 사교집단 같다"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대한민국은 침몰할 것이다. 우리 국민들께서 혁명적인 결심을 좀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전 총리는 이재명 민주당 경선 후보의 선거법 위반 사건과 관련해 "법원의 결정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파기환송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며 "여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와의 일문일답] -(이재창 정치전문기자) 안녕하십니까? 저는 뉴스핌의 이재창 정치 전문 기자입니다. 오늘은 특별 인터뷰로 준비했습니다. 이낙연 전 총리님 모시고 조기 대선 정국과 한국 정치의 병폐, 나아갈 방향 그리고 개헌 문제 등 다양한 정국 현안 문제에 대해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낙연 전 총리) 네 감사합니다. -(이 기자) 요즘 화제가 된 총리님 유튜브 영상으로 얘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이 총리님이 개헌연대 국민회의에서 한 연설이 담긴 유튜브 영상이 오늘 제가 들어오기 전에 보니까 113만을 돌파했습니다.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요. 총리님도 놀라지 않으셨어요? -(이 전 총리) 놀랐어요. 바로 첫날 50만 명을 돌파하길래 이게 무슨 일인가 했죠, 굉장히 어리둥절했습니다.제가 처음 한 얘기도 아니고 평소에 계속 해 왔던 얘기인데 그것이 좀 정리돼서 알려지게 되니까 많은 관심을 받게 된 것 같아요. 우리 국민들이 어떤 걱정, 어떤 목마름이 있길래 저같이 보잘것없는 연설에 이렇게 많이 관심을 보여주셨는지 감사하고 또 책임도 많이 느낍니다. -(이 기자) 그날 연설에서 정치 개혁과 사회 통합 그리고 위기 극복 방안 등 상식적인 말씀을 하신 거였는데 그 연설에 왜 그렇게 대중이 좀 열광했다고 보시는지 궁금하네요. -(이 전 총리) 상식에 목말라 계셨던 것 아닌가 싶어요. 대중들이 다들 느끼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현실 정치에서는 자기 쪽은 잘한다고 하고 상대방만 욕하고 있잖아요. 국민들은 양쪽 다 큰일 났다고 생각하는데 정치에서는 그렇지 않거든요. 뭐랄까요? 갭이랄까 괴리가 있어 제가 말씀드린 것이 많은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데 기여한 것 같아요. -(이 기자) 위기 극복과 정치 개혁, 사회 통합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라면 힘을 합하겠다, 협력할 수 있다 고 개헌 연대나 제3지대 연대를 시사했는데 어떤 특별한 구상을 가지고 계신지요? -(이 전 총리) 그날 얘기를 했었지요. 위기 극복, 정치 개혁, 사회통합 이 세 가지의 과제를 말씀드리면서 각 과제마다 두 가지씩의 구체적인 과제 를 말씀드렸어요. 위기 극복에서는 첫째는 대미 관세 협상을 포함한 주변 4강국과의 관계 안정화 그리고 또 하나가 사법부의 신뢰 회복, 두 번째 정치 개혁은 개헌과 양당의 현재 행태에 대한 비판 그걸 고쳐야 한다. 세 번째 사회통합에서는 통합형 지도자가 필요하고 통합형 정치가 필요하다, 두 가지씩 주었는데 구체적인 안을 가지고 얘기가 진행되길 바랍니다. 그냥 누구니까 도와달라 누구 미우니까 도와달라, 그런 식의 이합집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기자) 이재명 민주당 경선 후보도 강하게 비판하셨죠. "방탄 외에 3년간 한 일이 뭐냐"고 강하게 비판하셨는데요. -(이 전 총리) 방탄 말고 딴 것도 했겠죠. 그런데 방탄을 위해서 워낙 기상천외한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을 하다 보니까 그것만이 국민들 기억에 남게 되는 거잖아요. 한 세 가지를 말씀드리면 하나는 입법 폭주가 있어요. 허위사실 공표죄가 문제가 되니까 그건 뭐 선거법에서 빼버리자라든가 또는 배임죄를 없앤다거나 제3자 뇌물죄가 어떻다든가 이런 식의 과잉 입법 그리고 예산 삭감도 액수 자체는 4조밖에 안 되지만 하필이면 대통령실 검찰 경찰 감사원의 특활비 특공비 이것만 전액 삭감했어요, 굉장히 기분 나쁘게 하는 거잖아요. 일부러 의도했던 것처럼 그렇게 비친단 말이에요. 게다가 뭐니 뭐니 해도 30번에 육박하는 탄핵 시도, 이건 완전히 정부를 마비시키는 결과까지 가져올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이 워낙 강렬하게 인상에 남고 또 국민들의 우려를 자아내다 보니까 다른 것이 덮인 거지요. 그래서 탄핵 말고 국민을 위해서 한 일이 뭔지 스스로 설명해 봐라 하는 질문을 했었죠. -(이 기자) 대법원에서 이재명 민주당 후보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 전원합의체에 회부하자마자 회의를 계속 연이어서 열고 있어요. 일각에서는 재판에 속도를 내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있는데요. 대법원 확정 판결이 선거전에 나올까요? 그리고 그게 대선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전 총리) 제가 선거법 재판 2심에서 무죄가 나온 뒤에 대법원이 전원합의체에 회부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글을 쓴 적이 있어요. SNS에 발표했는데 그대로 됐습니다. 그래서 일부 네티즌들은 제 예언이 적중했다고 그러는데 점쟁이는 아니고요. 민주당에서는 조희대 대법원장께서 왜 정치에 관여하려고 하느냐 이런 식으로 경계망을 치고 있죠. 제가 보기에는 이런 것 아닌가 싶어요.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존경이 무너졌거든요. 그것을 회복해 놓고 떠나야겠다는 대법원장님 나름의 절박한 마음이 있었지 않나 싶어요. 정치에 또는 선거에 영향을 안 주는 것도 미덕일지 모르지만 그런 자세 때문에 사법부 불신이 이렇게 생긴 것 아니에요. 특히 조희대 대법원장님 전임 대법원장 시절입니다마는 대법관 매수 의혹이 번졌는데 아무 조사도 없이 그냥 흐지부지 넘어갔단 말이에요. 이런 것들이 쌓여서 법원의 신뢰가 많이 떨어졌다. 특히 가까이서 보면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대통령의 진퇴 파면 여부를 상당히 신속하게 절차적인 시비를 받아가면서까지 8 대 0 전원일치 파면이라고 결정해서 굉장히 국민들의 수긍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헌재에 비하면 대법원은 많이 점수를 까먹었어요. 그동안에는 정치적 사건만 놓고 보면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대통령 파면, 법원은 이재명 대표 심판 이런 일을 맡았다. 그러면 법원 쪽은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고 질척거리는 그리고 간간히 나오는 판결이 이상하다 이런 것들을 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마도 대법원장님 입장에서는 떨어진 사법부의 위상을 회복해 놓고 떠나야겠다 이런 생각을 가졌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제가 법원의 일을 함부로 예측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니지만 파기환송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기자) 만약에 파기환송이 나온다면 선거에 영향을 미칠까요? -(이 전 총리) 여론에는 영향을 주겠죠. 그러나 출마 자격을 당장 빼앗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법원으로서는 그 선으로 가지 않나 싶어요. 그런데 이제 고민이 있습니다. 파기환송이면 다시 고등법원 갔다가 다시 대법원까지 올라오잖아요. 그러면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무죄 추정이라고 그럴 거란 말이에요. 이 무죄 추정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무죄 추정 말하는 거 좀 염치없는 짓 아닌가요? 과거에는 기소만 돼도 출마를 못 한다거나 1심 유죄 판결 받으면 출마를 못 한다거나 이랬었어요. 그것이 그 당시에 무죄 추정을 몰라서 그랬겠습니까? '일반 국민들보다 더 높은 도덕성을 갖겠습니다' 이런 다짐 아니었겠어요? 그런데 그냥 재판을 마냥 미루면서 무죄 추정을 가지고 영업을 한단 말이에요. 그건 정말 염치없는 짓이라 생각해요. 원래 무죄 추정이라는 것은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데 권력자들이 무죄 추정을 가지고 그 방탄을 삼으려고 그러는 건 거듭 말씀드리지만 몰염치한 짓이다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이 기자)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실용주의를 강조했습니다. 자기는 대통령이 되면 이념에서 탈피하겠다 이런 말씀도 하셨고요. 진보 보수 가리지 않고 장관도 기용하겠다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이 전 총리) 그분의 말씀은 잘게 떼에서 보면 다 그럴싸한데 모아서 보면 앞뒤가 안 맞아요. 예를 들면 친일파도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는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헌법재판관들 누구 누구 을사오적 되지 마라 또 조금 마음에 안 들면 이완용이다 이렇게 몰아가고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또 친일파 문제 삼지 않겠다 그러면 어느 쪽 말을 믿어야 되는 것이냐 그런 의문이 생기는 것이고요. 그리고 또 하나 민주당 내에 극좌 세력을 공천으로 다 정리했다 이런 비슷한 말을 했다는 건데 그건 또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그 비명횡사한 사람들이 더 합리적이고 중도적일 겁니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뒤집어버리잖아요. 안타깝죠. 세금은 깎아주겠다고 하면서 돈은 많이 풀겠다고 말한다든가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얘기거든요. -(이 기자) 문재인 전 대통령이 기소됐어요. -(이 전 총리) 안타깝지요. 저는 결백하시리라 믿지만 꽤 오래된 일이 이제 하나씩 진행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마는 현행 헌법 생긴 뒤로 8명의 대통령이 있었거든요. 8명 중에 4명이 감옥 갔고요. 2명은 아들이 감옥 갔고요. 한 분은 퇴임 후에 검찰 수사를 받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고 그런 불행한 일을 겪지 않은 단 한 분의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이었는데 그분마저 이렇게 되는 게 굉장히 안타깝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기자) 지난 3년간 정치가 극단적인 대결로 치달았습니다. 민주당은 압도적 의석을 앞세워 법안과 탄핵 등을 막 밀어붙였죠. 여권은 대통령 거부권으로 맞서는 악순환이 계속됐어요. 이런 대결 정치가 결국은 대통령 비상계엄과 탄핵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 전 총리) 그렇죠. 쉬지 않고 윤석열 대통령을 압박했죠. 거대 야당이 그 방법은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과잉 입법 또 무리한 예산 삭감 또 줄탄핵 이런 것 등등으로 쉬지 않고 압박을 했는데 그런다고 해서 계엄으로 대처한 것은 그분의 미숙함이고 어리석음이지요. 대통령도 뭔가 망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오판을 한 걸로 보이는데요. 하여튼 그 결과를 놓고 보면 이런 사태 불행한 사태가 왔어요. 간단히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국민적 정당성을 가진 두 권력기관이 충돌한 거지요. 국회도 국민이 투표로 뽑은 거고 대통령도 국민이 투표로 뽑은 건데 둘이서 마주 달리는 기차처럼 충돌해가지고 이런 파멸이 온 거지요. 이것을 빨리 극복하기 위해서 저는 개헌을 주장했습니다마는 민주당에서 개헌을 못하겠다 그러면 이런 상태를 계속 끌고 가자는 얘기예요.잘못하면 공수만 바뀐 내전 상태가 계속될 수도 있다 그런 얘기 아니겠어요? 그런 불행이 뻔히 보이는데도 이대로 가자는 건 불을 보고 덤벼드는 불나방 같은 어리석은 처사지요. 그래서 이 기회에 말씀드리면 그런 불행을 끊기 위해서라도 개헌과 새로운 체제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 기자) 지금 대선전이 한창입니다. 민주당은 이재명 경선 후보가 거의 90% 안팎의 득표율로 사실상 후보 확정 수순으로 들어가는 거 아닌가 이런 느낌이고요. 국민의힘은 이제 4강이 결정된 상황인데 당내 일각에서는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출마해야 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어요. 모두 비정상적으로 보입니다. -(이 전 총리) 양당이 모두 굉장히 병적인 거예요. 좀 과장되게 비판을 하겠습니다. 양쪽 다 사교하고 관계돼요. 국민의힘은 사교 클럽 같아요. 민주당은 사교 집단 같아요. 사교의 한문이 틀릴 겁니다. 예컨대 국민의힘은 뭐 결연함이나 절박함이 보이질 않아요. 그냥 정치 자영업자들 그때그때 생계나 웰빙을 위해서 보따리 싸가지고 왔다가 때 되면 돌아가는 그런 식이예요. 민주당은 일반 대중의 생각이나 감각과는 동떨어진 자기들만의 성에 갇혀서 희한한 짓들을 하고 있잖아요. 그런 것이 계속되면 불행은 계속될 것이고 대한민국은 침몰할 거예요. 이번에 대선을 기해서 우리 국민들께서 혁명적인 결심을 좀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떤 분들은 그걸 중도 혁명이라고 표현하던데요. 이름이 뭐든 간에 극단을 배제하고자 하는 혁명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기자) 이번 대선에서 역할을 하실 생각이 있습니까? -(이 전 총리) 뭔가 국가에 보탬이 되길 바랍니다. 개인적으로야 그냥 놀아도 좋은 나이가 됐다고 생각합니다마는 국가의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이런 위기를 보고도 외면하고 혼자 안일함을 추구하면 그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뭔가 국가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기자) 국가적 위기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이제 파탄 난 정치가 아닐까 싶은데요. 근본 원인은 뭐라고 보십니까? -(이 전 총리) 올해 들어서 국제적인 평가가 이렇게 나왔어요. 미국의 포브스가 세계 각국의 국력 평가를 했는데 대한민국이 6등으로 나왔거든요. 1등 미국, 2등 중국 3등 러시아 4등 독일 5등 영국 6등 대한민국 7등 프랑스 8등 일본 9등 아랍에미리트 연방 연합 10등 이스라엘 이렇게 나왔을 거예요. 그건 해방 이후 80년 동안 온 국민들이 피땀 흘려서 이룩한 아주 금자탑 같은 성취죠. 그런데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산하 기관인 EIU가 해마다 각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평가하는데 문재인 정부 후반기에 우리가 완전한 민주주의 라고 평가받았는데 이번에는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평가받았어요. 그 당시에 문재인 정부 후반기에는 아시아에서 대한민국 민주주의 수준을 1등으로 뽑았는데 지금은 일본이나 대만한테도 밀리는 걸로 나옵니다. 또 하나가 스웨덴 예테보리 대학 산하에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가 각국의 민주주의를 평가했는데 대한민국은 독재가 진행되는 나라로 분류해 놨어요. 이걸 다 합치면 국력은 세계 6위인데 민주주의도 떨어지고 독재가 진행된다. 이 얘기는 지난 80년 동안 국민들이 피땀 흘려서 이룩한 이 성취를 정치가 허물어뜨리고 있다는 얘기가 되겠죠.  작년 가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으신 3명 중에 한 분의 책에도 한국 얘기가 많이 나와요. 그분이 이랬어요.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양대 정당이다. 도무지 타협할 줄 모르고 극단으로 가는데 왜 그러냐하면 양당 모두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기 마련인데 둘이 섞어놓으면 강경파가 이겨요. 양쪽 다 강경파가 이기다 보니까 강대강의 충돌만 생기잖아요. 그래서 이걸 정치인들의 각성으로 개선한다는 건 백일몽 같은 얘기일 거고요. 다당제로 가야 됩니다. 그래서 어느 쪽이든 마음대로 못하고 제3세력, 제4 세력의 동의를 얻어야만 정치가 이루어지게끔 하면 극단 대결의 정치는 끝날 수 있을 거예요. 삼김 시대, 그게 13대 국회일 겁니다. 4당 체제였는데 그때가 안건 합의 처리 비율이 가장 높았어요. 김재순 국회의장이 '이것은 황금 황금분할이다' 이렇게 표현할 정도였거든요. 안철수 씨 국민의당에 있었을 때 3당 체제, 그때도 합의 처리 비율이 높았어요. 그런데 이제 양당 체제가 되고 어느 한쪽이 지나칠 만큼 거대한 의석을 갖게 되면 힘을 주체를 못하고 힘을 써요. 그러다 보니까 날치기가 나오고 무리한 법이 나오고 그래서 정부는 또 거부권으로 대응하고 거부권이 30번이 넘었을 겁니다. 이게 말이 안 되죠. -(이 기자) 한때 안철수 의원이 주도한 국민의당이라는 게 있었잖아요. 의석 40여 석 가까이 좀 얻은 적이 있죠. 호남에서 돌풍도 일으켰고요. 안건 처리 비율도 높았다고 하는데 국민들이 왜 이렇게 양당에 집착을 했을까요? -(이 전 총리) ox 문제에 지나칠 만큼 익숙해진 거죠. 아군과 적군으로 구분하고 마구 증오하고 적대하는 그런 문화가 생기면 그 어느 쪽엔가 속해서 가는 것이 편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좀 중재하려는 사람들을 무슨 회색분자다 사쿠라다 이렇게 모멸을 해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대한민국 정치는 영원히 타협도 없고 그냥 강대강의 대결만 생긴다는 얘기인데 그 점에서는 우리 언론이나 우리 국민들도 조금 생각을 바꾸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자) 요즘 정치가 3김 시대보다도 훨씬 못한 퇴보를 거듭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이 전 총리) 그렇습니다. 3김 시대는 정치가 참 좋았었죠. 그때는 좋았는데 왜 지금은 나쁜가, 역시 리더십이죠. 지도자가 어떤 분이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 덕을 많이 봤죠. 그쪽에서 많이 죽을 쓰니까 이쪽의 잘못이 덮여지는 그래서 적대적 공생 관계라는 말도 있었는데 그런데  덕이 아니라 부담도 생겼을 거예요. 윤석열 정권을 겪고 나서 많은 국민들은 지도자가 어떤 사람이냐는 게 굉장히 중요하구나 이걸 깨닫게 되신 것 아닌가 싶어요. 제가 최근에 그런 말을 하는데요. 어떤 친구가 저한테 해준 소리예요. 대한민국이 제대로 되려면 보수는 보수해야 되고, 진보는 진보해야 된다, 그 말을 하더라고요. 무슨 얘기냐면 보수라는 게 지키는 건데 과거에 좋았던 것도 지키지 못하고 모두 파괴해서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나쁜 것만 더 득세하고 있다. 그래서 보수는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가치 이런 걸 지켜라, 그게 보수고 진보는 그들이 먼저 진보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퇴보하고 있지 않냐, 당신들부터 진보해 봐라 그 얘기입니다. 그럴싸한 말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이 기자) 제가 언젠가 보수쪽 4선 5선 중진 의원들께 보수의 가치가 뭡니까? 답을 못해요. 보수의 가치를 모르는 분들이 보수 세력의 중심에 있으니 보수의 가치가 지켜질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전 총리) 그렇죠. 보수는 품격 신뢰 이런 것이겠죠. 미국에서 재미있는 조사가 한 번 있었어요. 길을 걸어가는데 어떤 어려운 사람이 도움을 청한다. 그 사람을 보수가 더 잘 도울까? 진보가 더 잘 도울까, 이런 조사를 했는데 보수가 더 잘 도운다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어요. 저는 뜻밖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조사 결과에 대한 해설을 보면 진보는 이렇게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국가가 할 일이지 왜 내가 하냐라고 생각하고 보수는 이건 개인의 문제다. 내가 돕겠다 이렇게 한다는 거예요. 뭐든지 좋습니다. 좋았던 것은 지키고 퇴행적인 것은 시정하고 이래야 발전이 있을 텐데 그냥 눈앞의 이익에만 매몰되고 특히 선거에 뭐가 더 이익이냐 이것만 생각하다 보면 한없이 상대 측을 적대하고 증오하고 모멸하고 이런 유혹을 떨칠 수가 없을 거예요. 그거 안 되려면 뭔가 좀 온건하고 합리적인 세력들이 있어야 되는데 그걸 죽이고 있지 않습니까?네 -(이 기자) 보수의 가치는 자유고 진보의 가치가 평등이죠. 그래서 보수는 자유시장 경제, 선택적 복지, 능력에 따른 기회 평등 등을 추구하고 진보는 평등이다 보니까 경제 민주화, 보편적 복지, 평준화 교육을 추진하잖아요. 그런데 보수는 그런 자유의 가치를 좀 많이 망각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고요. 정치가 올바로 굴러가려면 양날개가 온전해야지 나를 수 있는 건데 한쪽 날개가 망가지면 다른 쪽 날개도 망가져 파탄 나는 거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 정치가 그런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전 총리) 맞아요. 자유 말씀을 하셨는데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자유를 무지하게 여러 번 외쳤지만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니까 공허하게 끝나버린 거죠. 공연이 이념 전쟁만 불러일으키다가 끝나버린 것 아닙니까? 그래서 보수건 진보건 대단히 죄송한 얘기지만 공부 좀 해야 돼요. -(이 기자) 총리님은 요즘 술 드세요?  -(이 전 총리) 전혀 한 방울도 안 한 지가 한 9개월 정도 됐습니다. 건강상의 이유인데요. 제가 술 안 마시니까 국가 경제가 더 나빠진 것 같아요. 제가 2년 7개월 13일 국무총리 하면서 끝날 때쯤 막걸리협회 감사표를 받았잖아요. 밖에 나가서 자기 돈 내고 먹는 것은 통계로 안 잡히는데 총리 공관에서 예산으로 막걸리를 사오는 것은 통계에 다 잡히거든요. 통계에 잡힌 것만 보니까 막걸리를 2년 7개월 동안 99종류 6971병을 마셨더라고요. 행사용이지요. 그래서 그 업계에서는 굉장히 초기부터 유명해졌어요. -(이 기자) 제가 왜 이 질문을 드렸냐면, 요즘 여야 국회의원들이 밥도 같이 안 먹는답니다. 술은 고사하고 밥도 같이 안 먹으니 정치가 풀리겠습니까? 일각에서는 같은 당에 있어도 계파가 다르면 밥도 안 먹는대요. 정치가 망가진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아닌가 싶습니다. -(이 전 총리) 그렇습니다. 제가 초선 재선할 무렵만 해도 국회 국정감사가 특히 야간에 많은데요. 그게 끝나면 밤 10시든 11시든 한잔씩 하고 헤어지거든요. 그냥 삼삼오오 이렇게 어울리는데 당과 관계없이 제일 선배가 술값 내주고요. 그리고 이 의원 오늘 좋았어 뭐 이렇게 칭찬해주면 좋잖아요.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된 거 참 안타깝지요. 제가 총리할 때 야당 지금 국민의힘이죠. 야당이나 여당이나 원내대표의 임기가 1년이라서 원내대표가 바뀌면 그 원내 부대표들도 바뀌어 가지고 10여 명씩의 단체가 생기잖아요. 민주당은 제가 초청하면 다 오셨는데 국민의힘은 2년 7개월 동안 원내대표가 세 분 나왔어요. 김성태 원내대표만 저의 초청에 응해주고 나머지 두 분 얘기할까요? 나경원 정우택 원내대표는 거절해 버리더라고요. -(이 기자) 그게 그렇게 힘든 걸까요? 이런 퇴행적 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사실 정치 개혁이라는 게 너무 공허한 얘기가 될 것 같아요. 밥도 못 먹는데 무슨 쟁점 현안에 대해서 절충하고 타협이 되겠어요? -(이 전 총리) 지금 양당제인데요. 저는 4당 체제쯤 됐으면 좋겠어요. 보수도 온건파 정당이 생기고 진보도 합리적인 정당이 생기고 그래가지고 완충지대가 있으면 좀 나아질 것 같다 생각하고요. 총리가 저녁 먹자는데도 안 오는가 그런 것을 죄악시하는 문화가 있어요. 자기들끼리만 어디 우물에 갇힌 것처럼 자꾸 생각을 그쪽으로 몰아가고 자기들끼리 또 확인하고 그러니까 점점 더 괴상해지는 거죠. (하)편에서 계속   leejc@newspim.com 2025-04-24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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