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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D 폴리티션 스토리](상) 박용진 "역사 잃은 지혜,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 술수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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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전북 장수 출신, "학업에 열중 안했지만 나서는 아이"
전교조 결성 당시 고등학교 세 차례 교내 시위 주도, "가장 큰 충격"
학생 운동 거쳐 진보정당 운동, 민주당에서도 소신 지켜

[서울=뉴스핌] 채송무 기자 =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이 뉴스핌 KYD(Korea Youth Dream) '폴리티션스토리'에 출연해 어린 시절과 정치 입문 과정 및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박 전 의원은 14일 오후 유튜브 채널 '뉴스핌TV'를 통해 공개된 폴리티션스토리에서 어린 시절에 "막 나서는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학업에 열중하지는 않았지만 친구 관계는 좋았다"고 말했다.

박 전 의원은 고교 시절 은사였던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이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당시 구속된 이후 세 번의 교내 시위를 주도한 것에 대해 "저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최장수 대변인이었던 본인의 마지막 논평이었던 '역사 없는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는 문구에 대해 "그런 원칙을 잘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1971년 전라북도 장수 출신으로, 집성촌이 있는 장계면에서 거주하다가 부친의 근무지 이동에 따라 전주시 태평동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진북초등학교를 다니다 1979년 부친이 서울로 이동하면서 서울화계초등학교에 전학해 졸업했다. 이후 신일중학교, 신일고등학교를 거쳐 현재까지 서울 강북을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다.

[서울=뉴스핌] 채송무 기자 =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 2025.01.13 dedanhi@newspim.com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당시 그의 은사였던 이수호 선생이 구속된 이후 세 번의 교내 시위를 주도했고, 1990년 성균관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한 이후 1991년 대학 선배인 김귀정 씨가 시위 도중 숨지는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1994년 성균관대학교 총학생회장, 이후 서총련 산하 북부총련 의장직을 역임했다.

전역 후 진보정당 건설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정치부장과 1997년 9월 국민승리21의 언론부장 등을 지냈고, 대선 이후에도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와 함께 진보정당 운동을 이어갔다. 2011년 진보대통합 논의가 확발해진 이후 야권대통합을 주장하면서 민주당에 합류했다.

2011년 9월 '혁신과통합' 상임운영위원을 맡았고, 이후 20대와 21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이건희 삼성회장의 차명계좌 문제와 현대자동차 문제를 지적해 리콜 결정을 이끌고 유치원 3법 등의 성과를 내면서 의정 활동으로 눈길을 끌었다. 

다음은 박 전 의원과의 폴리티션 스토리 인터뷰 전문이다.

-(채송무 기자, 이하 채 기자) 안녕하세요. 정치인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살펴보는 kyd 방송의 폴리티션 스토리. 저는 진행을 맡은 정치부 채송무 기자입니다. 옆에는 함께 진행을 맡아 주실 스웨덴 린넨대의 최연혁 교수님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연혁 교수, 이하 최 교수) 안녕하십니까?

-(채 기자) 오늘은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님을 모시고 정치 역정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용진 전 의원, 이하 박 전 의원) 예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교수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채 기자) 의원께서는 그동안 진보 정당 활동과 민주당에서도 오랜 기간 진보의 그 소신을 지켜오신 정치인이십니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쌓여 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린 시절에 어떤 소년이었나요.

▲(박 전 의원) 약간 이렇게 막 나선다 라고 해야 될까요. 친구들이 볼 때는 약간 꼴뵈기 싫은 아이일 수도 있고요. 예를 들면 봄이면 선생님을 조르고 애들 선동해서 야외 수업하도록 하고 첫 눈 오면 수업 땡땡이 치고 선생님 첫사랑 이야기 해달라고 조르고. 교실 분위기를 학구적이지 않게 만드는 데 앞장섰던 사람인 것 같아요.

생활 기록부를 보면 리더십이 있고 이렇게는 쓰여져 있더라고요. 학업에 열중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고, 친구 관계는 다 좋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사는 것이 순탄치 않아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7년 6월 항쟁 과정이어서 사회 변화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많았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최 교수) 장수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바로 서울로 전학을 온 케이스였는데요. 지금 살고 계신 곳에서 오랫동안 계셨더군요.

▲(박 전 의원) 아버지가 경찰이셨어요. 당시 서울에 인구가 펑펑펑 늘어나고 있을 때잖아요. 경찰서를 새로 지어서 전국에서 인원을 차출하셨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보면 운 좋게 서울로 오시게 된 것이죠. 아버지 때라서 온 가족이 서울로 왔구요. 장수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입학은 전주에서 입학을 했어요. 전주 진북 초등학교라고 유명한 학교가 있습니다. 전주 진북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서울 화계 초등학교를 2학년 때 전확을 왔어요.

그 동네에서 화계초등학교, 신일중학교, 신일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교도 제알 가까운 곳이 성균관대학교더라고요. 군대도 갔다 오고 결혼도 거기서 하고, 아이도 거기서 낳고 국회의원도 거기서 하고 지금도 그냥 계속 살고 있어요.

-(최 교수) 각자마다 어렸을 때의 인생 스토리가 하나씩 있거든요 기억에 남는 사람 혹은 이벤트가 있을까요.

▲(박 전 의원) 공부를 별로 안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아마 중학교 때부터 반장도 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부학생회장이 되고, 사실상 총학생회장 역할을 다 했어요. 임기를 마치고 나도 이제 공부하자 했을 때 1989년도에 전교조가 결성이 된 것이에요. 전교조 결성 한 달 전부터 낌새는 알았고, 학생회 활동도 했었고, 부학생회장으로 역할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전교조를 지지하고 호응하는 액션을 해보자는 제안이 안팎에서 많이 왔었어요. 당시 전교조 위원장도 하고 민주노총 위원장도 했던 이수호 선생님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이셨어요.

친구들한테 선생님을 지지하기 위한 보호하기 위한 무엇인가를 하자고 타협안을 제시하고 선생님들이 교무회이하실 때 자율학습 시간 30분 동안 아이들을 다 밖으로 끌어내서 집회를 하기로 한 거죠. 이제 그렇게 하려니까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고요 방송반 반장을 불러다가 '너 방송반 열쇠 있지 그 스위치 켤 수 있지'를 다 물어보고 그때 고3 학생회장한테는 이러이러한 내용의 성명서를 쓰도록 해서 읽도록 하고 또 각 반의 반장들하고는 몇 시 몇 분에 이 방송이 나오면 그걸 신호로 '다 나와라'고 했어요.

30분 안에 이것을 다 만들어 내야 되는 일이잖아요. 그거를 했던 과정이 되게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지금도 친구들하고 만나면 그때 얘기해요. 어떤 느낌이었는지 얼마나 두렵기도 하고 흥분됐었는지를 이야기하고 '박용진 다시 봤다'고 하는 친구들도 많았어요. 그런데 당황했어요. 어쩌면 이렇게 친구들이 일사분란하게 다 같이 움직이나. 짜기는 같이 짰지만 5분, 10분 안에 1200명이 싹 다 교문 앞으로 소리 소문 없이 움직인 것이에요.

1200명이 다 교문 앞으로 모여서 교무실에서 선생님도 몰랐대요. 수위 아저씨가 교무실로 연락해서 그때서야 선생님들이 쫒아나오셔서 '들어가라'고 난리가 났었죠. 전교조 결성이 일요일이었는데 저희가 월요일 아침 8시에 집회를 했거든요. 전교조 결성을 지지하는 고등학생의 첫 번째 집회로 기록돼 있어요. 교내 시위를 두 번 더 했었어요.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죠. 저한테는 가장 큰 충격이었고요.

-(최 교수) 고등학교 때부터 정치에 입문을 한 셈이네요.

▲(박 전 의원) 그게 무슨 정치겠어요. 그냥 해야 하니까 한다는 느낌이었고요. 저희가 아들이 셋이어요. 큰 형 두 분과 저, 밑에 여동생이 있는데 아버지는 딸을 갖고 싶어하셨는데 계속 아들만 나오니까. 그런데 셋째 아들이 늘 말썽인 거에요. 형들은 다 같이 신일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얌전하고 학교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공부 잘하고 했는데 저만 유독 튀고 그러니까 어머니 부탁이 '제발 졸업만 해라'고 부탁하셨어요.

학교에서도 그렇고 외부 압력이 들어와서 '이런 식으로 하면 졸업 못합니다'는 위협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검정고시 치죠'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어머니가 전라도 표현으로 기함을 하시면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가서 데모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대학을 가서 데모하니까 '데모 그만해라'고 그러시긴 했는데 아무튼 부모님 속 썩이는 일들은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채 기자) 대학 시절에도 학생 운동을 하셨잖아요. 의원님이 학생 운동을 하던 시기는 약간 쇠퇴기에 빠지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당시 학생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박 전 의원) 그때는 전대협 세대에서 한총련 세대로 바뀌었어요. 전대협과 한총련의 가장 큰 차이는 전대협은 그야말로 국가와 민족, 민중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지를 고민하기 위한 대표자들의 회의인데 한총련은 그야말로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라고 이야기를 해서 대학생으로서 찾아야 할 권리, 자신의 위무 등을 잘 성실하게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냐라고 하는 학생회 본연의 역할에 집중하자. 대학 발전과 교육 재정의 확보, 이런 쪽에 집중하자고 더 넓기도 하고 문턱이 낮은 단체를 지향했어요. 이미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에요.

학생들이 투표로 정치 권력을 견제하거나 바꿀 수 있다라는 것을 국민들이 알고 있는 마당에가두투쟁, 돌멩이와 화염병이 난무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의사를 전달할 필요는 이제 없다고 다들 느끼고 있었던 시절인데, 이상하게도 다른 거는 다 앞서가던 학생운동 세력이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뒤진 거죠. 나만 옳다고 생각하고 이 변화가 두렵기도 하고 '이것은 가짜다 우리가 속지 말아야 된다'라고 하는 자기 아집이 교차되고 있었던 시절이에요.

제가 총학생회장이 되니 1 2학년 때 봤던 그런 학생들이 아니고 그런 정국이 아닌 것이에요 대통령도 노태우에서 YS로 바뀌었고요. 야당은 큰 소리치고 국민들도 투표로 여기도 혼냈다 저기도 혼냈다를 몇 번 해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대한 고민을 꽤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총학생회장을 하는 중에는 답을 못 얻었고 오히려 군대를 가서 느꼈거든요. 평범한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대학 1학년이 되자마자 온 혹은 대학을 다니지 못하고 바로 직장을 갔던 친구들과, 저보다 나이 어린 친구들과 같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제가 5학년을 하다가 군대를 가서 25살에 갔으니까. 20살, 21살로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이 나보다 고참인데, 이들이 하는 고민을 들어보면서 '세상이 달라지고 있고, 이들의 고민은 되게 구체적인데 나는 추상적인 것만 이야기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학생 운동하다가 총학생회장을 하고 잡혀자기도 하고 구속도 됐잖아요. 군대를 안 가도 됐어요. 빠질 방법이 여러 개가 있었죠.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또 '제발 군대는 좀 가라'고 하셨어요. 웬만한 부모님들은 군대 안 갈 수 있으면 안 가게 하려고 그러셨는데 우리 어머니는 그런 것이 아닌 거야.

큰 아들 군대 갔다 왔지, 작은 아들도 갔다 왔지, 그래서 아들 군대 보내면서 서운하고 아련한 것은 다 겪어본 것이에요. 뭐라고 하시냐면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테니까 마지막 효도한다고 생각하고 군대 가라"는 거에요. "나 군대 안 갈 방법이 많은데"라고 했더니 "아 시끄러워. 군대 갔다 와"라고 해서 갔는데 생각해보니까 어머니 말씀 듣기를 잘한 것 같아요. 정치하면서도 떳떳하기도 하고 군대를 가서 오히려 못 봤던 것을 많이 봤거든요.

저는 되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하고 에너지가 좀 넘치는 타입이거든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라도, 감옥에 들어갔어도 늘 즐거웠어요. 즐겁고 매일매일 바쁘게 움직이고 아침 6시에 일어나서 할 일을 제깍제깍 다 해내면서 살았고, 군대에서도 그랬던 것 같아요. 군대에서도 적극적으로 하고, 못 봤던 것, 잘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을 만나고, 저보다 어린 사람을 상관으로 모시면서 당하는 수모나 이런 것들도 저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승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군대에 가서 학생운동에 대한 정립,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가다듬었던 것 같아요.

-(최 교수) 중요한 고비고비마다 어머님의 역할이 크셨는데 아버지의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박 전 의원) 불편했죠. 아버지는 대공과 형사도 하셨는데 아들은 데모해요. 총학생회장이에요. 이른바 운동권 우두머리야. 제가 처음 총학생회장 당선되고 학교 총장과 저녁 자리가 있지만, 관할 경찰서 서장과도 식사 자리를 한번 하더라고요. 동대문경찰서 서장과 자리를 했는데 제가 "윗사람들에게 좀 전해줘라. 나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혹시라도 피해를 보거나 괴롭힘을 당하거나 하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것"이라고 엄포 비슷한 것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나요. 그런데 아머지는 평범한 경찰 공무원으로 지내셨는데 제가 처음 총학생회장을 하다가 노동자들 파업 지원 투쟁을 하다가 잡혀간 거였어요.

장안동 대공분실, 남영동은 유명한데, 장안동에도 그런 시설이 있는데 거기서 사장님으로 표현되든지 대표로 표현되는 분이 있었는데 아마 경찰서장쯤 되는 모양이에요. 무역상사로 외부는 위장이 돼 있고요. 거기 가서 조사를 한참 받고 있는데 잠깐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사장 대공분실장이 가운데 앉고 소파가 있는데 아버지가 그 앞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계시더라고요. 제가 들어왔는데 아버지가 이 사람한테 허리를 계속 조아리면서 "죄송하다. 자식을 잘못 가르쳐서 이렇다"고 순간 아버지한테 미안한 것도 있는데 막 화를 냈어요.

아버지께 "아버지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이 사람한테 아버지가 이렇게 조아리고 계시냐"고 했더니 "용진아 앉아라"고 하셨어요. 저한테 별로 따뜻한 분은 아니셨거든요. 아들 둘이 있으니 셋째가 눈에 보이시겠어요. 밑에는 딸이 또 있으니까 막내 아들이 눈에 보이시겠어요. 그냥 집에나 들어오고 밥이나 먹고 다니면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셨던 것 같고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날 그 사람한테 조아릴 때 너무 속이 안 좋았고, 가시다가 저랑 헤어지는데 주머니에서 3만원을 꺼내서 딱 주셨어요. 그때 3만원은 아버지의 일주일 용돈이었을 것이에요. 이걸 주시면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시더라고요. '매 맞지 마라. 괜히 골병 든다' 그리고' 밥 굶지 마라'. 그러고 가시더라고요. 한참을 혼자 울었네. 그리고 이제 서울 구치소로 넘어갔을 때 아버지가 면회를 오셨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아버지가 나가시더라고요. 그리고 어머니랑 이야기하다가 다음 면회 때 어머니가 오셔서 "어제 아버지가 오셔서 파란색 수위를 입은 것을 보고 눈물이 나서 나갔다"고 그러시더래요.

나가서 우셨다고 그래서 "왜요"라고 했더니 당신이 죄 지은 사람들을 잡아다 감옥에 넣고 나면 그 옷을 입고 다시 경찰서에 가서 조사 받는 모습을 봤는데 당신 아들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 옷을 입고 있나 싶으니까 화도 나고 내가 왜 경찰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셨대요. 그래서 나와서 막 우셨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지금은 아주 효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때 불효를 많이 해서 너무 죄송하고, 아버지 사랑합니다.

-(최 교수) 말씀을 아주 잘하시는데 어디서 배우셨나요. 아니면 어릴 때부터 좌중을 이끄는 능려깅 있었나요.

▲(박 전 의원) 대변인은 5년을 했어요. 우리 정치사에서 최장수 대변인일 거에요. 민주노동당에서 3년, 민주당에서 2년을 했는데, 민주당에서 2년 한 것도 기록이었어요. 김대중 대통령 이후에 배지를 달지 않은 당 대변인을 2년 동안이나 했는데 그 동안 대표가 엄청 많이 바뀌었어요. 당 대표가 10번 바뀌는 동안 계속 당 대변이었어요. 다른 대변인은 계속 바뀌었는데 기자들이 박용진은 바꾸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기자들하고 인연도 깊고, 험난한 시절을 같이 겪으면서 큰 대과 없이 말 실수 없이 했던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요.

대변인들이 사실 파리 목숨이거든요. 말 한 마디 잘못하면 휙 하고 날아가는데 그런 무리함이 없었던 것은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요. 말을 잘하고 말고는 스타일이었겠죠.

부모님이 물려주신 성격상도 있는 것 같은데 제가 감옥을 좀 오래 갔었어요. 나중에는 2년 3개월 동안 있었는데 그때도 계속 독방이었어요. 하루에 편지지로 A4 용지 정도로 치면 거의 3장을 앞뒤로 빽빽하게 채워서 편지를 쓰거나 일기를 써서 밖으로 내보냈어요. A4용지로 보면 한 7장을 쓰는 것인데 어떤 내용으로 채울것인지를 머리 속에 정리해놓고 한 번에 쭉 써 내려가는 과정이 매일매일 훈련을 했다고 봐야해요. 아주 작은 일을 묘사하는 훈련도 되더라고요.

제가 결혼하고 6개월 만에 잡혀가서 감옥에서 2년 3개월 있다 나왔거든요. 와이프한테 얼마나 미안해요. 매일매일 반성문을 와이프에게 써서 보냈는데 매일 사랑해요. 미안해요 이야기만 쓸 수는 없으니까 '내가 혼자 방에 있는데 거미 한 마리가 지붕에서 내려와서 집을 짓는 과정을 쭉 지켜보는 거에요. 거미줄에 햇살이 스쳐지나가고 먼지가 흩날리는 과정, 겨울해와 여름해의 비교, 아침 공기에 까치가 날아가는 모습, 까치가 바람을 타는 모습을 혹시 보셨어요? 바람을 타면 그네를 타는 것 같아요. 까치가 바람을 거슬러 가는 것을 보면서 '까치가 오늘 그네를 타네요'라고 쓴다거나 작은 푷션을 미세하게 쓰려고 하는 과정이 필력에는 도움이 크게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논평을 쓸 때도 길게 안 쓰고 어떤 때는 짧게 해버렸어요.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호가 일해에요. 날일 자에 바다 해자인데 그분의 고향인 합천에서 공원이 지금도 있다고 해요.

그 공원이 일해공원으로 이름을 짓고 비석을 세운다고 했는데 다른 당에서는 군사 반란 수괴에 공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역사적인 반동행위라고 내는데 제가 냈던 논평을 '일해라고 한은 말은 횟집에나 어울린다'는 것으로 끝났어요. 더 욕할 필요도 없고, 일해라고 하는 말을 공원에 붙이지 말라는 걸로 그냥 끝났어요. 간략하게 하는 연습을 그때 감옥에 있을 때 했어요. 가장 힘들고 어려워도 나주에 다 좋게 해석하고, 그러려고 되게 노력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최 교수) 역사 잃은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는 말을 남기고 이런 말을 남기고 대변인직을 내려놓았습니다.

▲(박 전 의원) 말이 멋있잖아요. 원래는 원문이 뭐냐면 '역사 잊은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잃은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예요.그런데 제가 쓸 때는 둘 다 없는 것으로 맞췄어요. 그래서 역사 없는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 없는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가 됐는데 이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1988년에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사계절 출판사에서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 광고를 지하철에 이렇게 붙여놨어요. 그 옆에 카피가 딱 그거였어요. '역사를 잊은 지혜는 잔꾀로 흐르고 민심을 잃은 정치는 술수로 흐른다'고. 우와 가슴에 확 박히더라고요. 좋은 말이야 하고 기억을 하고 있었어요.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갈 때 그것을 딱 내걸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역사와 민심 팀이에요. 그리고 평생 그것을 했어요. 역사와 민심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나는 그냥 술수와 잔꾀로 흘러갈 거야. 그렇게 하면 안 돼. 원칙 잘 지켜야 돼. 이런 생각을 늘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민주당으로 와서 2012년에 당대표 선거를 나갔어요. 한명숙, 박지원, 이인영, 박영선, 김부겸 문성근 이렇게 출마를 했어요. 이렇게 짱짱한 분들과 했는데 제가 컷오프를 통과했어요. 중앙위원회에서 박용진이 5등으로 통과했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결과는 안 알려주지만 박용진이 최고위원은 되겠구나 하고 난리가 한번 났었는데 그때 궁금해지더라고요. 이 카피 내용이 책 안에 있는 줄 알았더니 없어요. 그래서 사계절 출판사에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자기도 모른데요. 사장님이 아실까요 했더니 연결을 해주더라고요.

그때가 2012년인데 제가 상황을 설명하고 제가 누구라고 했더니 '어떻게 그것을 기억하시냐'고 그러는데 "남편이 원래 사장이었는데 돌아가셨대요. 그리고 대표를 맡으셨는데 남편이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을 발행하실 때 그냥 거기다 쓴 카피였대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글을 뽑아내셨는지 모르겠다. 어디서 보신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자기는 모르고 아마 남편이 본인이 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그 문구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박용진 쓴 걸로만 나와요.

아마 사계절 출판사 사장님이 처음 쓰셨을 것 같아요. 말씀 그대로 저는 역사와 민심을 가지고서 정치를 해야지 잔꾀와 술수를 부리면 지금 당장은 어떻게 보면 살아날 수 있다고 봐요.지금 당장은 배지 잃지 않고 뭐 재선 3선 4선 5선 6선 선수는 쌓여 나갈 수 있겠죠. 그런 선수가 쌓이면 뭘 합니까. 잔꾀와 술수로 평가돼 버리면 끝이지. 어릴 때 고등학교 2학년 때 봤던 글귀를 지금까지 잊지 않고 계속 해가고 있어요.

-(최 교수) 그 말의 출처에 대해서는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dedanhi@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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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가 '조선'인가 호칭 논쟁 [서울=뉴스핌] 김현구 기자 = 최슬아 숭실대 교수는 29일 "북한이라는 호명이 상대방을 한반도의 일부처럼 위치시킨다면 조선이라는 호명은 하나의 독립된 행위자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최 교수는 "북한을 인정해야 된다는 주장은 어떤 온정적인 제안이 아니라 상대를 인정함으로써 불안을 낮추고 관계를 보다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굉장히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정치학회(회장 윤종빈)는 이날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평화 공존을 위한 이름 부르기:북한인가 조선인가' 주제로 특별학술회의를 열었다. 통일부는 관련 논의를 공론화한다는 취지에서 이번 학술회의를 후원했다. 사회를 맡은 권만학 경희대 명예교수는 "호칭은 기본적으로 식별 기능을 갖지만 정치적 호칭이 되는 순간 이데올로기를 담게 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북한은 '대한민국'을 공식 명칭으로 부르며 남쪽을 외국으로 재정의했다"면서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북한' '북측'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며 토론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 들어서며 도어스태핑을 갖고 최근 북한 '핵시설' 발언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뉴스핌DB] ◆ 김성경 "호칭은 분단 산물…'조선' 관계 전환 출발점" 김성경 서강대 교수는 "북한이라는 호명은 비공식적·약칭적 표현이지만 분단 80년 동안 누적된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이라면서 "북한을 계속 북한이라고 부르는 한 우리 안에 북한이 계속 갇힐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학계에서는 (북한을) 조선, 북조선으로 부르는 경향이 좀 있었다"며 "남과 북의 국가 정체성이 이미 상당히 공고화돼 있는 현 상황에서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 맺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북한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 평화공존이나 통일에 더 도움이 된다는 논리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통일은 남북이 서로를 인정 존중하고 그 맥락 안에서 관계를 맺고 남북 주민이 통일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제시했다. ◆ 권은민 "국호 사용, 국가 승인 아냐…정치가 먼저, 법은 따라간다" 권은민 김앤장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는 'DPRK'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꼭 국가 승인이나 정부 승인을 구성하지는 않는다"면서 "국가 승인은 정치적 행위이고 국가 의사 표시다. 그렇게 부르더라도 국가 승인과는 무관하다라고 선언을 하면 정리가 되는 문제"라고 진단했다. 권 변호사는 "남북관계는 법률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정치의 영역에 가까운 것 같다"면서 "과거에도 정치가 큰 틀을 규정하고 법과 제도가 따라가는 변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권 변호사는 "남북 기본합의서 제1조는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돼 있다"면서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이 그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권 변호사는 "국호 사용은 상호 주권을 존중하는 취지의 기존 합의를 계승하는 것"이라면서 "당사자 표기는 상대방이 원하는 공식 국호를 불러주고 그것이 국가 승인은 아니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면 된다"고 제언했다.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이 군수공업을 담당하는 제2경제위 산하 중요 군수공장을 방문했다고 관영 조선중앙통신이 12일 보도했다. 사진은 김정은이 이 공장에서 생산된 권총으로 사격하는 모습. [사진=북한매체 종합] 2026.03.12 yjlee@newspim.com ◆ 이동기 "독일도 경멸적 호칭 쓰다 공식 국호 전환…출발은 이름" 이동기 강원대 교수는 "서독은 동독을 경멸적 표현으로 불렀지만 긴장이 격화되면서 더 큰 평화 정치에 대한 구상이 폭발했다"면서 "국제 환경이 좋지 않을수록 평화 화해 논의가 공존에 대한 요구나 필요를 폭발할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독일 정치권에서는 헤르베르트 베너 전독문제부(통일부) 장관이 가장 먼저 동독 공식 국호를 사용했다"며 "당시에는 언론의 융단 폭격을 받았지만 시간이 해결해줬다. 국제법적으로는 여전히 인정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국가로 승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원칙을 고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인내만으로도 부족하다"면서 "결국 원칙 고수와 실용주의가 결합하는 모든 출발은 국호의 제대로 된 호명이고,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근본 전환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 "호칭 변경, 굴복 아닌 공존 가능성 넓히는 정치적 전략" 패널 토론에서 전문가들은 조선 호명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제시했다. 김태경 성공회대 교수는 "젊은 세대에는 '둘의 우리'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점"이라며 "우리가 조선을 일종의 주권 국가로서 인정하는 과정은 결국 우리에 대한 자기 인정과 그들에 대한 인정이 같이 결합되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김주희 국립부경대 교수는 "핵심은 인정과 통일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라면서 "실질적으로 가는 데 있어서는 담론과 제도, 정치 차원에서의 접근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 교수는 "호칭을 바꾸는 것은 굴복이 아니라 적대를 줄이고 공존의 가능성을 넓히는 하나의 정치적 전략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hyun9@newspim.com 2026-04-2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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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알發 쇼크에 리츠업계 초긴장 [서울=뉴스핌] 정영희 기자 = 국내 1호 해외 부동산 공모 리츠인 제이알글로벌리츠가 자산 가치 하락과 유동성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상장 리츠 가운데 사실상 첫 디폴트 사례가 발생하면서 시장에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다만 업계에서는 이번 사안을 개별 리츠의 리스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며, 전체 시장으로 확산되는 시스템 리스크 가능성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정부는 관련 시장에 대한 긴급 점검에 착수하는 한편, 필요 시 유동성 지원과 함께 구조 개선을 병행하는 등 시장 안정화 대책을 추진할 방침이다. [AI 그래픽 생성=정영희 기자] ◆ 무너진 해외 부동산 가치…유동성 위기 예견됐나 30일 리츠업계에 따르면 제이알투자운용의 기업회생 절차 돌입으로 인해 투자자들의 긴장감이 시장 전반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국내 대형 독립계 리츠 자산관리회사인 제이알투자운용이 2020년 국내 최초로 유가증권시장에 안착시킨 해외 부동산 공모 리츠다. 벨기에 브뤼셀 중심부에 위치한 파이낸스타워와 미국 뉴욕 맨해튼의 498세븐스애비뉴 등 대형 상업용 오피스 빌딩을 기초 자산으로 편입해 운용해 왔다. 그러나 금리 상승 등의 영향으로 벨기에 브뤼셀 파이낸스타워 가치가 떨어지면서, 단기사채 400억원을 상환하지 못해 지난 27일 서울회생법원에 회생 절차 개시를 신청했다. 한국거래소는 전일 매매 거래를 정지하고 관리종목으로 지정했다. 이번 사태는 어느 정도 예견된 수순이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제이알글로벌리츠는 지난 1월 12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공시했으나 해외 자산의 감정평가서 수신 지연 등을 이유로 한 달 만인 2월 이를 자진 철회했다. 핵심 자산인 벨기에 파이낸스타워의 감정평가액이 급락하면서 현지 대주단과 약정한 담보인정비율을 초과했다. 임대료 등으로 발생한 현금 흐름을 대출 상환에 우선 충당하도록 묶어두는 캐시트랩(Cash Trap, 현금 동결)이 발동되더니 기업회생으로 이어졌다.  박광식 한국기업평가 수석연구원은 "올 들어 차입 만기 도래에 따른 차환 부담이 지속되는 가운데 환헤지(환율 고정 상품) 정산금 명목으로 약 1000억원의 추가적인 자금 조달이 시급하다"며 "캐시트랩 해소를 위해서는 약 7830만유로(한화 약 1354억원)의 현지 차입금 상환을 위한 추가 재원 조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일제히 꺾인 리츠주…시스템 리스크 확산은 기우? 이 같은 악재에 상장 리츠 전체에 대한 투자 심리가 급격히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고개를 든다. 실제로 한국거래소 거래 동향을 살펴보면 이날 리츠 종목들은 일제히 곤두박질쳤다. 마스턴프리미어리츠가 큰 폭으로 미끄러진 것을 비롯해 한화리츠, 삼성FN리츠, SK리츠, 코람코라이프인프라리츠 등이 급락세를 면치 못하며 시장의 불안감을 드러냈다. 뚜렷한 성장 가도를 달리던 리츠 업계는 발을 동동 구르는 처지가 됐다. 한국리츠협회 통계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종가 기준으로 국내 증시에 상장된 25개 리츠의 시가총액은 9조7778억원을 기록했다. 리츠 시장은 지난해 1월 8조103억원 수준에서 같은 해 9월 9조2048억원을 돌파했고 5개월 만인 지난 2월에는 10조원을 넘어서는 등 몸집을 불려왔다. 그동안 일반 주식에 밀려 상대적으로 소외됐지만, 최근 코스피 강세장 속에서 안정적인 피난처로 주목받은 결과다. 법적으로 배당 가능 이익의 90% 이상을 의무적으로 배당해야 하는 구조적 특성 덕분에 확실한 현금 흐름을 선호하는 투자 자금이 대거 몰린 것도 호재 원인 중 하나로 제시됐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파장이 전체 금융 시장으로 퍼질 것이란 예측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국내 상장 리츠 22개사 중 해외 자산을 보유한 비중은 14.3%이지만, 전체 자산 기준으로 환산하면 해외 자산 비중은 1.2%에 불과하다. 국내 상장 리츠의 총투자 자산 대비 해외 자산이 차지하는 파이가 극히 작아 전이 가능성이 낮다는 뜻이다. 지난달 말 자산 구성 및 투자 유형별 포트폴리오 비중을 보면 주택이 44.0%로 가장 컸다. 오피스는 35.3%에 머물렀으며 리테일 6.4%, 물류 6.4%, 혼합형 3.6%, 기타 3.2%, 호텔 1.1% 순으로 나타나 이번 위기의 진원지인 해외 오피스 리스크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수희 LS증권 연구원은 제이알리츠의 최근 기준 발행 잔액이 약 4000억원으로 전체 크레딧 시장 규모와 비교하면 찻잔 속의 태풍 수준이라고 일축했다. 일반 크레딧물과 달리 리츠가 발행한 회사채는 개인 투자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 기관 투자자 중심으로 굴러가는 국내 크레딧 시장 심리에 타격을 주기는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판단이다. 김은기 삼성증권 연구원 역시 이번 이벤트가 단기사채 미상환으로 불거진 만큼 단기 자금 시장 경색이 회사채 시장으로 파급될까 우려하는 시각이 존재하지만 최근 풍부한 단기 자금을 바탕으로 기업어음 금리가 안정적으로 낮게 유지되고 있어 과거의 신용 위기와는 양상이 완전히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 국토부 방화벽 구축 총력전…상장리츠, 자산 다각화 과제로 다만 해외 부동산 자산에 직간접적으로 투자하는 리츠 종목들은 당분간 위축된 행보를 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해외 부동산 자산에 투자하는 상장 리츠는 KB스타리츠, 미래에셋글로벌리츠, 마스턴프리미어리츠, 신한글로벌액티브리츠, 디앤디플랫폼리츠, 이지스레지던스리츠 등이다. 이 중 해외 자산 구성 비중이 100%인 곳이 3개사, 50% 이상이 2개사, 50% 미만이 3개사로 파악됐다. 대표적으로 디앤디플랫폼리츠는 일본 소재 아마존 물류센터에 간접 투자 중이며 이지스레지던스리츠는 미국 소재 임대주택 및 대학 기숙사에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이은미 나이스신용평가 수석연구원은 "해외 자산의 장부 가치 비중이 각 리츠 총자산의 5~30% 수준에 그쳐 전반적인 쏠림 현상은 없다"면서도 "해외 자산을 보유한 개별 리츠의 경우 현지 대출 약정 위반에 따른 현금 흐름 통제와 국내 채무 차환 부담이라는 이중고를 동시에 겪을 수 있어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로벌 부동산 시장의 한파도 부담이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주요 도시 상업용 부동산 가격은 전년 동기 대비 4.7% 떨어졌다. 고점을 찍었던 2022년과 15%나 증발했다. 런던과 베를린 등 유럽 주요 도시의 상업용 부동산 가격은 30% 넘게 폭락했다. 정부도 사태의 엄중함을 인지하고 발 빠르게 방화벽 구축에 나섰다. 국토교통부는 이날 오후 김이탁 제1차관 주재로 금융위원회, 한국부동산원, 금융감독원 등 관계 부처를 긴급 소집해 점검 회의를 열었다. 리츠 시장 전반의 현황을 점검하는 한편, 투자자 보호를 위한 대응 방향을 집중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자리다. 국토부 관계자는 "제이알글로벌리츠의 부실화 과정에서 불거진 각종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전일 합동 검사에 착수했으며, 불법 행위가 적발될 경우 엄정 대응할 방침"이라며 "시장 안정을 위해서 대기업이나 공기업이 최대주주가 되는 앵커리츠를 공급하고, 변동성이 통제 수준을 넘어설 경우 채권 및 자금 시장 안정 프로그램 규모를 즉각적으로 늘릴 수 있도록 비상 대응 체계를 가동하겠다"고 말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사태 수습을 넘어 리츠 시장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과 신뢰 회복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상장 리츠의 주가를 궤도에 올려놓고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투자자의 신뢰를 되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김필규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보의 투명성이 담보된 상태에서 시장 상황에 맞게 자금 조달의 유연성을 높여주고, 우량 자산 편입과 리츠 간 합병을 통해 자산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는 정책이 뒤따라야 한다"며 "자산관리회사 역시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운용 현황과 배당 전략 등을 공개하고, 적극적으로 소통함으로써 정보 비대칭으로 인한 불신을 거둬내야 한다"고 제언했다. chulsoofriend@newspim.com 2026-04-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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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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