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당 우경화' 드러낸 총재 선거...'아베 시대' 회귀
민족주의 성향 다카이치 내각 韓·中과 마찰 가능성
12년 만에 日 총리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여부 주목
[서울=뉴스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지난 4일 치러진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극우 성향의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전 경제안보담당상이 승리해 사실상 차기 총리로 확정됨에 따라 우호적 흐름을 이어가던 한·일 관계에 강력한 변수가 등장하게 됐다.
다카이치 신임 총재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는 대표적인 우파 정치인으로 '여자 아베'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한·일 과거사 문제에 매우 강경한 입장을 보여왔으며 독도가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 |
지난 4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한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상이 의원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사진=로이터 뉴스핌] 2025.10.04 |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는 자민당과 일본 여론이 다시 우경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정치 변화다. 아베 총리 이후 조금씩 옅어져 가던 강경 우파의 자민당 노선이 다시 아베 시대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 국내 정치에 정통한 정부 관계자는 "아베 내각 퇴진 이후 스가 요시히데(菅義偉)·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등 후임 총리들은 아베의 후계자를 자처했지만 당내 강경파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으며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내각은 사실상 중도의 길을 걸었다"면서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 결과로 자민당은 다시 아베 시대의 색깔을 되찾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카이치 내각 출범은 강력한 민족주의적 역사관을 가진 '아베 시대'의 재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한국·중국 등 과거사 문제에 얽혀 있는 주변국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다카이치 신임 총재가 그동안 한국과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위험 수위를 넘어 혐한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는 1995년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에 대해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의 담화에 "멋대로 대표해서 사과하면 곤란하다"며 비판했다. 무라야마 담화로 인해 일본이 '범죄 국가'로 낙인찍히게 됐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다카이치 신임 총재는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서도 "당당히 참배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으며 실제로 본인은 빈번히 야스쿠니 참배를 해왔다. 2022년에는 극우단체가 주관한 행사에서 야스쿠니 참배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두고 "제대로 하지 않으니까 상대가 기어오르는 것"이라는 막말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총재 선거를 앞두고는 "총리가 되더라도 야스쿠니 신사에 계속 참배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다카이치 내각 출범은 중·일 관계도 긴장시킬 가능성이 높다. 다카이치 신임 총재는 평화헌법 개정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으며 일본의 해양 안보 강화에 적극적이다. 또한 대만 문제에서도 강경한 입장이어서 중·일 관계는 물론 한·중·일 협력도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미국 언론도 이번 자민당 총제 선거 결과를 주시하면서 민족주의 성향의 일본 새 내각이 한국·중국과 마찰을 빚을 것이라는 전망을 일제히 내놓았다.
정부는 다카이치 신임 총재 선출에 대해 "새 내각과도 긴밀히 소통하며 한일관계의 긍정적 흐름을 이어 나가기 위해 계속 협력해 나갈 것"이라는 원론적 입장을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한·일 양국은 격변하는 지정학적 환경과 무역질서 속에서 유사한 입장을 가진 이웃이자 글로벌 협력 파트너인 만큼, 앞으로도 미래지향적 관계 발전을 위해 양국이 함께 노력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 |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부산에서 만나 한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이재명 대통령 페이스북] 2025.09.30 |
다카이치 내각 출범 이후 첫번째 한·일 관계 고비는 총리 취임 직후인 오는 17~19일 추계 예대제다. 야스쿠니 신사에 정기적으로 참배했던 다카이치 총재가 총리의 신분으로 야스쿠니에 참배할 경우 한·일 관계가 급변할 가능성이 있다. 현직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 것은 2013년 전 총리가 마지막이었다. 당시에도 한국은 물론 미국도 "이웃 국가들과의 긴장을 악화시키는 행위에 실망한다"고 이례적으로 높은 수위의 비판을 내놓은 바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총재 선거에서 승리한 뒤 기자회견에서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관련한 질문에 "야스쿠니신사는 전몰자 위령을 위한 시설"이라며 "어떻게 위령할지, 어떻게 평화를 기원할지는 적시에 적절히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총리가 되더라도 참배하겠다는 입장에서 한발 물러선 발언이었지만, "조국을 위해 목숨을 잃은 분들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는 국제환경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싶다"는 말로 여지를 남겼다.
일각에서는 다카이치 총재가 아베 전 총리의 대외 강경 노선을 이어가면서도 현재의 한·일 협력관계를 허무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기본적으로 다카이치 총재는 미국과의 협력 강화를 대외관계의 기본 축으로 하면서 중국에 대한 강경론을 펴고 있다. 이같은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한·미·일 협력의 중요성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한국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유력 정치인의 신분과 총리의 신분은 다르다"면서 "다카이치 총재가 총리가 된 이후에도 과거의 발언과 행동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을 책임지는 지도자로서 국익에 반하는 무책임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섞인 전망이다.
하지만 그가 한·일 우호협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국내 정치적 부담을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일 관계 전문가는 "당내 지지 기반이 강하지 못한 다카이치 총재가 정치적 계산으로 한국에 대한 강경 발언을 하려는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면서 "작은 불씨 하나로 한·일 관계가 급랭할 수 있는 위험이 커진 것은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opento@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