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위해 '비핵화' 대신 '핵없는 한반도' 사용
단순 용어 아닌 '최종상태' 결정하는 '북핵 본질'
'핵없는 한반도'는 北의 '비핵지대화' 같은 개념
北변했는데 민주당 인식 불변..."진정한 수구세력"
[서울=뉴스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 문재인 정부가 비핵화의 최종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쓰던 '핵없는 한반도'가 이재명 정부에서 되살아났다. 이 대통령과 정부 인사들이 '핵없는 한반도'를 언급하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다. 북한이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비핵화'를 회피해 대화의 여건을 조성하려는 방편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지난 2일 민주평통 22기 출범회의 연설에서 "한반도에서 전쟁 상태를 종식하고 핵없는 한반도를 추구하며 공고한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도 지속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도 지난달 18일 국립외교원에서 열린 서울포럼 2025 기조연설에서 "핵없는 한반도는 포기해선 안 될 절대적 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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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스핌] 이재명 대통령이 3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외신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2025.12.03 photo@newspim.com |
지난 9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비핵화 포기를 조건으로 대화에 응할 뜻이 있음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을 때 대통령실은 "핵없는 한반도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냈다. 지난 8월 이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도 "핵없는 한반도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넓힐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재명 정부는 '비핵화'와 '핵없는 한반도'를 같은 뜻인 것처럼 쓴다. 이 대통령은 3일 불법 비상계엄 1년을 맞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외신 기자회견에서 "핵없는 한반도, 한반도 비핵화는 우리가 남북이 기본적으로 합의한 대원칙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며 두 용어의 의미를 동일시했다.
◆'핵없는 한반도'는 '비핵화'를 대체할 수 없다
'비핵화'와 '핵없는 한반도'는 같은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천양지차로 다른 표현이다. 특히 이 용어들은 '북한 핵문제가 해결된 한반도의 최종적 상태(end state)'를 나타내는 말이어서 사실상 북핵 문제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용어를 쓰느냐에 따라 '지향하는 한반도의 미래'가 다르다는 말이다.
국제적으로 쓰이는 공식 용어를 '한반도 비핵화'다. 1991년 노태우 정부 시절 남북이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서 처음 등장해 2005년 6자회담 9·19 공동성명에서 국제적 공식용어가 됐다. 한·미·일과 유엔은 물론 중국도 한반도 비핵화를 공식용어로 사용해왔다.
사실 한·미·일이 쓰고 싶었던 용어는 '북한 비핵화'였다. 그러나 북한은 이 용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합의를 위해 서로에게 유리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외교적으로 타협한 결과물이 한반도 비핵화였다.
한·미는 한반도 비핵화를 '북한 비핵화'와 같은 뜻으로 쓴다. 미국의 핵무기는 한반도에서 철수했고 남측은 핵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북한의 핵무기만 제거하면 된다는 인식이다. 북한의 해석은 달랐다. '한반도 비핵화'란 한국은 물론 미국의 핵무기도 없어야 하고 미국의 핵전력을 한반도에 전개해 자신들을 위협하는 행위도 사라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식 해석은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 금지, 핵우산 철폐까지 포함한 '한반도 비핵지대화(nuclear-free zone)'다. 더 나아가 주한미군 철수까지 주장할 수 있는 명분과 근거를 남겨두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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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과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6개국 대표단이 참가하는 북핵 6자회담이 2003년 중국 베이징 조어대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모습. 6개국은 2년의 협상 끝에 9·19 공동성명에 합의했으나 비핵화에 대한 해석 차이로 협상은 끝내 결렬됐다. [사진= 로이터 뉴스핌] |
이 해석의 차이가 북핵 협상을 파탄내기도 했다. 2008년 7월 북핵 6자회담에서 북한은 자신들이 제출한 핵 신고서 검증을 거부하면서 '남북한 동시사찰론'을 들고 나왔다. 9·19 공동성명에 '검증가능한 한반도 비핵화'라고 명시했기 때문에 미군 기지를 포함한 한반도 전체가 검증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결국 6자회담은 핵 신고서 검증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그해 12월 문을 닫았다.
북한은 2016년 7월 정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비핵화 5대조건'을 제시함으로써 자신들이 정의하는 비핵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혔다. ▲남한 내 미군 기지의 핵무기 공개 ▲남한 내 모든 핵무기와 핵기지 철폐 및 검증 ▲미국의 핵전력 한반도 전개 금지 약속 ▲북한에 대한 핵위협 중단 및 핵 불사용 확약 ▲한반도에서 핵 사용권을 가진 미군의 철수 등이다.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란 곧 '한반도 비핵지대화'라는 것을 북한 스스로 가장 권위있는 정부 성명을 통해 밝힌 것이다.
◆北의 '비핵지대화' 받아들인 문재인 정부
문재인 정부 시절 '핵없는 한반도'가 처음으로 남북 합의문서에 등장한다. 2018년 4월 27일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서명한 판문점 선언 3조 4항은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표현은 북한이 주장하는 한반도 비핵지대화와 매우 유사한 개념이다. 실제로 북한은 외무성 영문 홈페이지에 실린 판문점 선언 영문 버전에서 핵없는 한반도를 'turning the Korean peninsula into a nuclear-free zone'으로 번역해 남북 정상이 한반도를 '비핵지대화'하기로 약속했다는 주장하고 있다.
그해 9월 19일 남북 정상이 발표한 9·19 평양공동선언에는 "남과 북은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진전을 조속히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는 문장이 들어갔다.
이는 판문점 선언보다 더 분명하게 북한의 주장이 반영된 표현이다. 비핵화의 개념 속에 '핵위협 제거'가 포함된다는 것을 남북 정상 간 합의 문서로 확인해준 것이다.
문 대통령은 그날 평양 능라도 5·1 경기장에 모인 15만 평양 시민 앞에서 "나와 김 위원장은 우리 강산을 영구히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자고 확약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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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뉴스핌] 평양사진공동취재단 =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능라도 5.1 경기장에 모인 15만명의 평양 시민들 앞에서 "나와 김 위원장은 우리 강산을 영구히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자고 확약했다"고 선언하고 있다. 2018.09.19 |
◆실패한 文 대북정책 되풀이 조짐
핵없는 한반도는 한반도 비핵화나 북한 비핵화와 완전히 다른 개념의 용어다.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한반도 비핵지대화'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했던 핵없는 한반도가 지금 이재명 정부에서 다시 등장한 것은 문제다.
물론 북한이 모든 형태의 비핵화를 거부하는 단계로 진입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당장 달라질 것은 없지만, 한국 정부가 이 표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국제적 규범에 반하는 것일뿐 아니라 훗날을 위해서도 위험하다. 북한과 대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임의로 바꿔써도 되는 용어가 아니다.
더욱 문제인 것은 핵없는 한반도라는 표현 안에 이미 실패로 평가받은 문재인 정부 시절 대북정책을 되풀이 하려는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다. 세월이 변하고 국제정세가 변하고 한반도 상황도 변했다. 북한도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수차례나 겪었다. 지금 북한은 과거의 북한이 아니다.
그럼에도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과 인식이 여전히 1980년대 냉전 직후 시대에 머물러 정권을 잡을 때마다 똑같은 시도를 되풀이하는 민주당 정부야말로 '진정한 수구 세력'이라 할 만하다.
opento@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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