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서울역사박물관이 최근 2025 서울 생활문화 보고서에서 신당동의 역사와 현재를 정리했다.
- 조선시대 무당과 시신이 머물던 공간이 일제 문화촌·싸전거리·떡볶이 거리·철공소 거리 등으로 변모하며 상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 최근 신당동은 청년 문화와 해외 관광객 유입으로 ‘힙당동’으로 재탄생해 십이지신 콘셉트 점집·카페 등이 새로운 명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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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김용석 선임기자 = "이곳 땅 한 평을 팔면 강남 땅 100평을 살 수 있다." 1950년대 신당동 싸전거리에서 떠돌던 말이다. 강남북의 차이가 커진 지금 강남과 신당동을 비교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한국 전쟁 직후 이 골목에서는 쌀을 사려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은 현찰을 들고 몰려와 나중에는 돈을 셀 수 없어 무게를 달아 확인했고, 상업은행 신당동 지점은 전국에서 현금 보관액이 가장 많은 은행으로 꼽혔다. 그만큼 뜨거웠던 땅이 신당동이다.

그리고 지금, 이 동네는 또 한 번 전혀 다른 이유로 뜨겁다. 한남동과 성수동의 높은 임대료를 피해 온 청년들이 낡은 봉제 공장 건물에 카페를 열고, 십이지신을 콘셉트로 한 술집에는 외국인 손님들이 줄을 선다. '힙당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요즘의 신당동이다.
그런데 이 동네의 힙함은 최근 몇 년의 유행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조선 시대 죽음의 공간에서 출발해 일제강점기 신흥 주거지, 광복 후 피란민의 삶터를 거쳐 지금의 청년 문화 중심지가 되기까지, 신당동은 켜켜이 쌓인 역사의 지층 위에 서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최근 펴낸 2025 서울 생활문화 자료 조사 보고서 '신당동: 神·新·힙'은 이 동네가 왜 지금의 모습이 됐는지를 보여준다.

◆ 신을 모시던 땅 - 신당동이라는 이름의 뿌리
신당동(新堂洞)이라는 지명 안에는 '신을 모시는 집'이라는 뜻의 신당(神堂)이 숨어 있다. 조선 시대 광희문, 일명 시구문 밖은 도성 안 시신이 밖으로 나가는 통로였고, 병자를 돌보던 동활인서가 자리한 곳이었다. 도성 안 거주가 금지된 무당들은 이곳에 모여 마을을 이루었고, 산 자의 병을 고치고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는 치유의 공간이 됐다. 갑오개혁 이후 귀신 신(神) 자는 새 신(新) 자로 바뀌었지만, 무당개울과 무당다리, 무당고개 같은 지명 속에는 그 시절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
◆ 일제 때 세워진 문화촌... 당시 최첨단 전차가 다녔던 곳
일제는 인구 과밀 문제를 풀기 위해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 등을 통해 신당동 일대에 교외 주택지 문화촌을 조성했다. 개발 이전 신당동은 도성 밖 구릉지에 울창한 숲과 공동묘지, 화장장이 뒤섞인 지역이었지만, 대규모 묘지 이장과 격자형 도로망 확충으로 개발 기반이 마련됐다. 1930년대 말 제작된 '경성 안내도'에는 신당정 일대를 가로지르는 전차 노선과 도로망이 이미 표시돼 있어, 도심 접근성을 끌어올리려던 당시의 청사진을 보여준다. 앵구주택지와 장충단 주택지 같은 문화촌은 당대 최신 트렌드였던 전원 도시 이념을 담아, 일본인과 조선인 신흥 중산층을 위한 세련된 주거지로 자리 잡았다.

광복과 6·25 전쟁은 이 동네를 다시 뒤흔들었다. 해외 귀환 동포와 전쟁 피란민이 도성 밖 첫 동네인 신당동 구릉지로 몰려들며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난개발 위기에 놓였던 지역은 신당 토지구획정리사업을 거치며 현대적 가로망과 주거 기반을 다졌고, 이때 다져진 골격은 지금도 신당동의 뼈대로 남아 있다. 싸전거리의 호황도 바로 이 시기다. 전쟁 후 혼란 속에서 피어난 것이었다. 1950년대 중반 전성기에는 하루에만 1000가마니에 달하는 양곡이 거래됐고, 화물 기차가 새벽에 도착하면 지방 시세를 먼저 알아내려 전화국 교환수와 친분을 쌓아 정보를 선점하려는 경쟁이 벌어질 만큼 시장 분위기는 치열했다.
신당동은 곡물상들이 모이며 형성된 쌀 가게 골목 싸전거리와 1950년대 마복림 할머니가 고추장과 춘장을 섞은 독특한 양념으로 시작해 신당동의 대명사가 된 떡볶이 거리가 대표적이다. 1950~60년대 판자촌 시절 주민들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개미처럼 성실히 살아갔다는 뜻을 담은 개미 골목, 19세기 말 철공소 100여 곳이 밀집했다가 1907년 군대 해산으로 쇠퇴기를 맞았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대장간 천국으로 불릴 만큼 철공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철공소 거리도 있다.

◆ 청년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나는 힙당동
신당동은 이제 청년의 손끝에서 다시 힙당동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로제 패턴실의 여혜은 대표는 "한국의 패턴사들은 실력이 좋은 편이기 때문에 3D하고 AI 쪽을 연결시켜서 활용하면 미래가 있다고 봐요. 효율성을 높여주고 진짜 사람이 머리와 감각을 써야 되는 것은 패턴사들이 하고 있죠. 이런 변화된 형태로는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라며 현장의 변화를 전했다.
최근에는 외국 관광객의 발길도 부쩍 늘었다. 윤이서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신당동을 찾는 관광객은 그동안 일본·중국 등 아시아권이 주를 이뤘지만 최근 해외 콘텐츠를 통해 신당동이 알려지면서 서양권 관광객의 방문이 늘어나는 추세다. SNS 등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라며 "변화의 배경에는 신당동의 압도적인 접근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동대문과 가까운 입지가 외국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요인인 점과 편리한 지하철 교통망 등이 일본·중국·미국 등 다양한 국적의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이유다.
신당동 점집에는 평일 방문객의 약 40% 정도가 외국인이다. 다소 생소할 수 있는 한국의 십이지신 콘셉트 공간이 서양인들에게 오히려 큰 관심을 끌고 있다.
fineview@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