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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모스크바 이야기]...(2-1) 흔들리는 소비에트 체제

기사입력 : 2018년12월19일 16:54

최종수정 : 2018년12월19일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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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예측못한 거함의 침몰...미국과 무한경쟁 경제력이 패인
군비경쟁·우주개발에 올인...인민경제 개선 외면하고 통제 강화
이데올로기 매달린 철밥통 인사시스템-지도부 고령화 위기 시작

2. 누구도 예측 못한 거함의 침몰

(2-1) 흔들리는 소비에트 체제

[김흥식 뉴스핌 객원논설위원]

2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소련은 세계주도권을 놓고 무한경쟁에 들어갔다. 냉전에 돌입하게 된 두 나라는 양대 초강대국으로서, 군사적으로 볼 때는 대등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승패는 바로 경제력에서 갈리게 될 것이었다. 결국 미국 경제의 절반도 되지 않는 소련이 미국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시간이 갈수록 부인하기 어렵게 되었다.

페테르부르그(구 레닌그라드) 북방 꽁꽁 얼어붙은 라도가 호수 위에서의 필자. 나치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900일 동안 포위 공격했으나 소련군과 시민의 불굴의 저항으로 격퇴되었다. 라도가 호수를 통해 무기와 식량을 수송해 '생명의 길'로 불리웠다. '트로이도 로마도 함락을 피할 수 없었지만 레닌그라드는 함락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러시아인 가슴에 새겨있다고 한다.

◆소련, 2차대전후 세계주도권 놓고 미국과 무한경쟁...경제분야 완전 희생

군산복합체는 유례없는 번성을 구가했지만 전반적인 경제성장은 장기 하락세를 면치 못하게 된 것이다. 그나마 군산복합체의 번성도 나머지 경제분야(인민경제부문)를 철저하게 희생한 결과였다. 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국방비의 상승률이 국민소득성장률의 2배에 달했는데 이는 인민이 힘들게 생산한 것을 국방부문에서 다 빨아먹은 셈”이라고 지적했다. 타당한 지적이었다.

종전 이후 숙청과 억압으로 점철된 소련의 미래에 대해 미국의 어느 저명한 사회학자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러시아인들이 미국의 부자샘플을 보게 되면 진공청소기 대신 탱크와 스파이만을 보내주는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미국은 그저 공군으로 하여금 러시아 상공에서 기호품인 담배와 스타킹만 뿌려대기만 해도 공산주의는 곧 붕괴를 맞을 것이다”

또 다른 충격적 증언도 있다. 80년대 소련의 한 고위 외교관이 중국 외교부장과의 담화에서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고 한다. “미국의 (소련에 대한) 주무기는 (핵.미사일이 아니라) 나일론과 담배 그리고 소비상품들이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어떻게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치러야 할 지 모르는 것 같다”. 생필품 부족으로 인한 인민경제 파탄이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소련의 붕괴를 예고하는 경고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왔다.

◆이데올로기 매달린 철밥통 인사시스템서 위기 시작...“생기없는 나라” 손가락질

역사적으로 보면, 위기의 신호는 브레즈네프 통치시절(1964~82년)에 이미 시작되었다. 이데올로기에 매달려 변화를 거부하고 순환인사가 거의 없는 철밥통 인사시스템이 고착되면서 소련사회는 전반적인 정체에 빠져들었다. 특히 80년대 초 러시아 남자의 평균수명이 63세이던 시절에 평균연령 70세 이상인 정치국원들의 장로정치가 주를 이루면서 정체는 더욱 심화되었다. 사회적 유동성이 거의 없는 정체된 사회였던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생기 없는 나라로 손가락질 받게 된 것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사회주의 천국을 자랑하던 소련이 왜 지경으로 전락했을까. 소련은 종전 직후 적대적 관계로 바뀐 서방진영에 대항한다는 명분 하에 공산권의 정치적 단결과 군사적 확대에 국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군비경쟁과 우주개발에 국가재원이 과도하게 투입되고 공산권 우두머리 유지와 제3세계 지원에도 막대한 재원을 사용하였다. 독일에 힘겹게 승리한 소련으로는 승리의 과실을 지키고 다시는 침공받지 않으려는 결심이었으나 이는 소련정부에 두고두고 짐이 되어버렸다.

페테르부르그 북방 오네가 호수의 키지섬에 있는 전통 목조건물로 러시아 정교회 대성당이다. 22개의 양파모양 돔이 있고 못과 쇠붙이를 전혀 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며 12세기에 지어졌다.

◆군비경쟁·우주개발에 국가재원 올인...인민경제 개선 외면하고 통제만 강화

사회주의적 과시욕으로 인한 국가적 낭비도 일상화되다시피 했다. 그러다보니 인민경제 개선에는 거의 손을 쓰지도 않았다. 배부르고 등 따스우면 자유니 민주니 딴 생각을 한다며 최소한의 생계수준에 그치도록 하고 입막음 귀막음으로 인민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체제에 문제가 생기면 균열이 간 벽에 벽지만 덧대는 식의 미봉으로 시종일관하였다. 사회적 모순은 쌓여갔지만 소련 지도부는 애써 현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1970년에는 미국경제를 앞지를 것이라는 호언장담은 실현불가능한 허황된 꿈으로 되어 버렸다. 인민생활수준이 나아지고 있다는 선전도 80년대 들어서 부터는 전혀 먹혀들지 않게 되었다. 만성적인 생필품 부족과 왜곡된 유통구조, 살인적인 통화팽창 등으로 일상적인 서민생활이 극단적인 생존투쟁으로 내몰리게 되었음을 누구도 부인 못하게 된 것이다.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눈 씻고 볼려야 볼 수도 없었고 만연돼 있는 부정부패가 사회적 관행으로 정착되어 버렸다. 자연히 사회질서와 국가기강이 무너지면서 민심이반이 폭발직전에까지 이르게 됐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본다. 브레즈네프 통치기간에 러시아인의 음주량이 두 배 이상 늘었다. 사람들이 체념한 나머지 술을 마구 퍼마신 것인데 과도한 음주는 국가적 질병으로 사회문제화 되었다. 남자 기대 수명이 64년의 66세에서 80년에는 60세로 줄었고 해마다 1천만명 가량이 음주로 인한 범죄로 경찰에 구금되었다. 공안기관과 결탁한 마피아들의 지하경제가 극성을 부릴 정도로 공권력 부재가 이어졌다. 90년대 초반 모스크바에서 소규모 사업을 하는 한국인들조차 매월 보호비 명목으로 마피아에게 미화 1000 달러 내외를 지불하는 게 관행이었다. 일단 돈을 주면 어떤 관청이나 단체에서 손을 벌이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는데 기업인 입장에선 오히려 편리한(?) 점이 적지 않았다. 경제활동의 상당부분이 이미 마피아 손으로 넘어갔다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했다.

◆세계 첫 인공위성 발사 성공에도 치약 등 기초생필품도 못만드는 기이한 나라

주지하는 바와 같이 소련은 1957년 인류사상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 발사성공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며 미국에 앞서 본격적인 ‘우주시대’를 열었다. 서방을 위협하는 첨단무기도 열심히 만들어냈다. 그러나 쓸만한 치약, 칫솔, 스타킹, 세제 등 기초생필품 하나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기이한 나라였다. 사회주의의 이상인 인간다운 삶은 꿈도 못 꿀 지경이 되었고 80년대 중반부터 심화되었다.

더욱이 84년 대흉작으로 곡물 생산량이 30% 하락한 이래 만성적인 식량부족사태가 지속되었다. 이밖에 35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연금생활자의 생계위협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월 200~300 루불의 연금으로는 번듯한 루블 지불 레스토랑에서 점심 한 끼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연금생활자들이 못살겠다고 모스크바를 비롯한 소련 전역에서 연일 항의 시위를 벌이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과도한 군비경쟁이 주요원인의 하나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미국 경제의 3분의 1 밖에 안 되는 소련이 자신의 능력을 넘어 무리하게도 미국과 과도한 군비경쟁을 벌인 결과 인민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특히 레이건 대통령 시절 소련의 국력을 피폐시키기 위해 과도한 군비경쟁과 유가폭락을 유도한 미국의 치밀한 전략이 먹혀들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뉴스핌] 김유정 여행전문기자 = 루스키에 아직도 남아있는 포진지가 관광지로 탈바꿈 했다. 2018.05.12 youz@newspim.com

◆과도한 군비경쟁-지도부 고령화로 위기 심화...고르바초프 개혁개방에 기대

소련의 위기를 가중시키는 요인의 하나로, 지도부의 고령화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국원의 평균나이가 흐루시초프가 숙청될 당시인 1964년에는 60세였는데 브레즈네프 말기인 82년에는 70세로 껑충 뛰어 올랐다. 이를 두고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성숙한 사회주의’라는 희한한 이름을 붙였다. 82년부터 3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등 3명의 서기장이 잇달아 노환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최고지도자의 국장을 연례행사로 치룬 셈이다. 말년의 브레즈네프는 의사표현도 제대로 못할 정도였고 안드로포프 역시 불치의 신장병 말기환자로 병실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으며 체르넨코는 '걸어다니는 미라‘수준으로 집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런 저런 사정으로 지성적이고 유연하며 체력도 강해 보이는 최연소 정치국원 고르바초프가 새 서기장으로 등극하는 데는 이론이 있을 수 없었다. 보수파 장로들이 압도적이었던 정치국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사실이야말로 당시의 절박한 사정을 말해준다.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버티던 소비에트 체제에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은 점점 분명해졌다.

공산체제의 위기와 혼란 속에서 85년 지도자로 등장한 고르바초프는 전면적인 개혁, 개방추진을 선언하며 “우리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라며 개혁. 개방을 선언했다. 체제 모순과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정면 대응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에 따라 각종 민주화조치와 과거사청산작업을 추진하면서 한동안 소련인민에게 확신과 희망의 상징으로 압도적인 사랑을 받았다. ‘구원투수’로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컸다.

▲김흥식 뉴스핌 객원논설위원 

한국외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하고 1977년 동양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뎠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해직되는 아픔을 겪고 쌍용그룹에 몸담고 있다가 1988년 연합뉴스 기자로 복귀했다. 1991년 한국의 첫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파견돼 맹활약했다. 이후 연합뉴스 북한부장, 남북관계 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실 간사, 경영기획실장을 거쳐 편집담당 상무이사를 지냈다. 퇴임후 연합뉴스 부설 동북아센터 상임이사, 중소기업진흥공단 비상임이사, 도로교통공단 비상임이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특별위원 등을 지낸뒤 현재 뉴스핌 객원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khs@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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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문의 화랑담배] 제2회 광복군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 가릉호텔에서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창설식이었다. 미국 한인 동포들이 보내온 돈 4만원으로 조직한 군대였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억 원 정도 된다.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 참모장 이범석 장군, 제1지대장 이준식, 제2지대장 고운기, 제3지대장 김학규, 제5지대장에 나월환을 임명했다. 지대장은 지금의 사단장에 해당한다. 모두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를 비롯하여 남북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에 직접 참여하여 활동한 독립군 출신이었다. 한국광복군 훈련반 제1기 졸업사진. [사진= 독립기념관]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포고문을 통해 "국내외 동포들에게 알립니다. 1940년 9월 17일부로 대한민국 광복군을 창설하였습니다. 광복군은 1907년 8월 1일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 날이 바로 광복군 창설일임을 선언합니다. 광복군은 구 한국군의 후신으로 33년간에 걸친 의병과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을 계승한 전통 무장 조직입니다"라고 했다. 대한제국 국군-의병-독립군의 군맥(軍脈)과 군혼(軍魂)을 분명하게 잇고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부대 편성은 소대, 중대, 대대, 연대, 여단, 사단 6단으로 편성하였다. 총 3개 사단을 조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인원이 적은 상황에서 우선 지대를 만들고, 각 지대를 구대와 분대로 연계한 전투부대를 구성했다. 임시정부에서 1940년 9월 19일 중국 국민당 정부에 통보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직원 명단'에 의하면, 부대 규모가 총사령부와 4개 단위부대, 여기에다 조선혁명군 부대까지 포함하여 5000여 명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1941년 12월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1942년에는 미국 측에 "미국이 제주도를 해방 시켜 주면,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제주도로 옮긴 후,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한반도 상륙작전을 전개하겠다."라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실제로 미국 OSS 부대(지금의 CIA)와 1945년 4월부터 8월까지 강도 높은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주요 훈련은 3개월 기간에 고공낙하, 암살법(권총에 특수장치를 하여 소리 없이 암살하는 방법), 통신(암호의 작성 및 해독법, 무전기 조작 및 수리), 교란 행동, 정보수집, 폭파 등 이었다. 일과는 07:00∼12:00 오전 훈련, 13:00∼18:00 오후 훈련, 19:00∼22:00 야간 훈련이었다. 주요 임무는 대한민국으로 낙하산과 잠수함으로 침투하여 미 공군 공습에 필요한 지형 등의 정보를 제공하고 일본군 군사시설 탐지 및 파괴 지하 유격대를 조직하여 연합군 상륙작전 시 제2선에서 연결하는 작전이었다. 마침내 1945년 8월 7일 모든 훈련을 마치고 국내진공작전 출정식을 개최했다. 개시일은 8월 10일이었다. 출정식 때 장준하 경기도 공작 반장은 "나는 조국광복을 위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내가 나의 죽음을 지불하면, 내 능력껏 그 대가가 조국을 위해서 결제될 것입니다. 나의 각오는 한 장의 정수표입니다. 발생인은 장준하, 결제인은 조국입니다"라는 유서까지 작성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2025-09-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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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이시바' 누구?...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 [서울=뉴스핌] 오영상 기자 =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자민당 총재직 사임을 공식화하면서, 일본 정국의 관심은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로 쏠리고 있다. 집권당 총재가 곧 총리직을 맡는 일본 정치 구조상 이번 총재 선거는 사실상 다음 총리를 뽑는 절차다. 자민당은 조만간 새로운 총재 선거 일정을 확정할 예정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지난 2024년 9월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총리와 경합했던 주요 인사들이 다시 출마할 가능성이 높다.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상,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 등이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정국 운영이 소수 여당이라는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차기 총재가 야당과 어떻게 연대할지, 어떤 연립 구도를 짤지가 최대 쟁점으로 꼽힌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고 있는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고이즈미·다카이치 선두권 현재 여론조사에서는 고이즈미 농림수산상과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이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지난달 29~3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차기 총리에 적합한 인물로 다카이치가 23%, 고이즈미가 22%를 기록했다. 나란히 1, 2위다. 자민당 지지층으로 한정하면 고이즈미가 32%로, 다카이치(17%)를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카이치는 2024년 총재 선거에서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에게 역전패했다. 고이즈미 역시 의원 표에서 선두에 올랐지만 당원 표에서 밀리며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당내 기반과 대중적 인지도를 겸비해 차기 선거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주자들이다.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1981년생(44세)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이다. 2009년 중의원 첫 당선 이후 줄곧 '포스트 아베',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았다. 환경상, 농림수산상을 거쳤으며 개혁 성향과 젊은 이미지로 지지층을 넓혔다. 2024년 총선에서 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으나 참패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농림수산상으로 복귀해 쌀 유통 개혁 등 농정 개혁에 매진했다. 대중적 인지도와 '고이즈미 브랜드'라는 정치 자산이 최대 강점으로 꼽힌다.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은 1961년생(64세)으로 보수 강경파로 분류되는 여성 정치인이다. 2021년 총재 선거에 첫 도전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며 3위를 기록했다. 2024년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최다 득표(의원 72표, 당원 109표)를 얻었으나 결선에서 이시바 총리에게 역전 당했다. 유일한 여성 후보로서 '보수의 아이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아베 전 총리와 가까웠던 의원 그룹이 주된 지지 기반이다. 이시바 정권에서 당직 제안을 거절하며 독자 노선을 유지해 왔다. '포스트 이시바' 후보로 꼽히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일본 경제안보담당상 [사진=로이터 뉴스핌] ◆ 하야시·모테기 등 잠룡도 주목 고이즈미와 다카이치 두 선두 주자 외에 잠룡들의 행보도 주목된다.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옛 기시다파 일부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시바 정권의 2인자로서 존재감을 키워왔다. 모테기 도시미쓰 전 간사장은 당내 경험과 풍부한 인맥을 강점으로 삼고, 아소 다로 전 부총리와 교류를 통해 지지 기반을 다지고 있다.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은 5선 의원으로, 동기 의원들과 옛 니카이파의 지원을 받으며 출마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 총재 선거 이후에도 정국 '안갯속' 자민당 총재 선거는 국회의원 표와 당원·당우 표를 합산하는 방식이 원칙이지만, 긴급 시에는 국회의원과 지방 지부 대표만 투표하는 '양원 의원 총회' 방식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 경우 의원 표의 비중이 커져 파벌 역학이 중요해진다. 차기 총재가 선출되더라도 곧바로 정권 안정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일본 헌법상 총리는 국회에서 지명되는데, 자민·공명 양당은 현재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에서 과반을 잃은 상태다. 따라서 야당이 단일 후보를 세워 결집할 경우, 자민당 총재가 총리로 지명되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민당 총재가 총리에 오르더라도, 예산안·세제 개혁 법안 등 국정 운영은 야당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차기 총재는 곧바로 '연립 확대'나 '정책 연대'를 추진할 수밖에 없고, 총재 선거 과정에서도 어떤 야당과 손을 잡을지가 핵심 화두가 된다. 결국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는 단순히 차기 지도자를 뽑는 절차를 넘어, 일본 정치가 다당제 속에서 어떤 연립 구도를 구축할지 시험대가 되는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goldendog@newspim.com 2025-09-0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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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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