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배우 설경구가 '자산어보'를 통해 배우 인생 중 첫 사극에 도전했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시대를 앞서간 학자 정약전을 흑백 화면 속에 그려넣었다.
설경구는 온라인 화상 인터뷰를 통해 영화 '자산어보' 개봉을 앞둔 소감을 얘기했다. 이준익 감독과 '소원' 이후로 두 번째로 만난 그는 코로나19로 어려운 이 때 영화를 선보이게 돼 아쉬운 마음과 기대감을 동시에 드러냈다.
"감독님을 오랜만에 뵀는데 느닷없이 작품을 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냅다 책을 달라고 했죠. 마침 사극을 쓰고 계셨고 그게 '자산어보'였어요. 어 나 사극 안해봤는데, 하다가 이렇게 됐죠. 한번에 확 감동이 온 건 아니고 읽으면서 점차 젖어들어서 눈물을 흘렸어요. 이 영화엔 큰 사건이 없어요. 신유박해는 약전이 흑산도 들어오는 배경으로 나오죠. 섬 주민들과 섞여 살고 지내는 소소한 이야기들, 젊은 친구 창대가 글을 좋아하고 글을 배움으로써 육지에 나가 출세길에 오르고 싶은 욕망 같은 일상적인 이야기예요. 비극이 아니고 희망이 있는 영화죠. 소소한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기억이었고 소중한 제 자산이 됐어요."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자산어보'에 출연한 배우 설경구 [사진=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2021.03.26 jyyang@newspim.com |
정약전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 유명세를 떨친 정약용의 형이다. 설경구는 "덜 알려진 정도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모르실 것"이라면서 "그 시대에 정말 위험한 인물"이라고 정약전을 소개했다.
"거의 대부분이 모르는 인물이죠. 남긴 책도 자산어보, 성종사의, 표해시말 정도밖에 없어요. 양반도 상놈도 필요없고 더 나가서 임금까지도 필요없는 세상을 꿈꿨죠. 약용보다 약전이 더하다는 말도 영화에 나오고요. 약전이 책을 많이 못쓴 이유를 생각해봤어요. 굉장히 천재적인 학자인데 그 시대의 관료들 얘기나 지침서를 쓴 게 아니라 어류, 생물을 파고들고 명징한 사물을 파고들어 전문 서적을 남겼어요. 글로 차마 담을 수 없는 사상과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식구들과 동생 정약용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거죠. 그런 답답함이 있었을 것 같고 그렇게 이해하면서 촬영했죠."
첫 사극 도전인데, 게다가 흑백 영화다. 설경구는 이번 영화를 통해 사극의 매력을 어느 정도 느꼈다고 털어놨다. 그는 "제가 안가본 세상에 대한 매력을 느낀다"면서 또 다른 색깔의 사극에 또 도전하고픈 마음을 드러냈다.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자산어보'에 출연한 배우 설경구 [사진=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2021.03.26 jyyang@newspim.com |
"과거지만 궁금증이 생기죠. 그때를 살아보는 건 아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사건과 시대를 경험해볼 수 있고요. '자산어보'는 창작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고 신유박해 외에는 다 감독이 구상한 이야기예요. 다른 작품을 한다면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다루는 사극에 출연해서 창작자와 실제 사건이 부딪히면서 나오는 이야기를 경험해보고 싶어요. 이번에 흑백으로 했지만 총천연색의 퓨전 사극 느낌보다는 조선 특유의 색감, 톤을 잘 살린 사극이라면 좋겠죠. 약전과 달리 그때는 역사적 사건에 좀 개입하고 싶은 생각도 들고요."
설경구는 '자산어보'에 출연하면서 변요한을 비롯해 다양한 출연진을 이준익 감독에게 추천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그는 "솔직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변요한과 호흡 소감을 얘기했다. 영화 속에 절경으로 담긴 약전의 절벽신 얘기가 나오자 그는 태풍과 여러 조건 탓에 쉽지 않았던 촬영 당시를 떠올렸다.
"태풍은 아니었는데 태풍급 바람이 불던 때였어요. 가거댁 집 세트 바로 밑에 절벽에서 그 장면을 찍었죠. 강풍이 세서 수염을 두 번 붙이러 올라갔다 내려왔다 했어요. 워낙 바람이 심해서 대사에 '무섭다 집에 가자' 얘기하는데 저도 진짜 무섭더라고요. 자꾸 바다 쪽으로 가라고 하는 거예요. 후시 녹음을 하려고 보니까 그때 들어간 '무섭다'가 더 진짜 같다고 안할 정도였죠. 그림은 또 수묵화같이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비뚤어진 수염들은 안보여서 다행이었고요.(웃음) 조금 위험했고 실제로 무서운 감정이 많이 들었지만 보기엔 좋았다니 참 다행이죠."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영화 '자산어보'에 출연한 배우 설경구 [사진=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2021.03.26 jyyang@newspim.com |
설경구는 물론이고 영화를 본 이들이 약전에게 느끼는 바는 비슷하다. 당시엔 위험인물이었지만 시대를 앞서간 지식인이었다. 백성들에게 가장 실용적인 자산어보를 남겼단 점에서 현대에 다시 조명될 만한 인물이기도 했다.
"우리 나라에 자산어보 원본이 없어요. 국립중앙도서관에 카피본을 봤는데 장갑을 끼고 볼 정도로 귀한 자료가 됐어요. 그때는 홀대받고 어느 집 창호로도 쓰였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옛날엔 다 왕만 바라보고 명나라만 바라보고 관료가 돼서 백성들의 피를 빠는 게 중요했죠. 정약전은 피를 토하면서 썼을 수도 있어요.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못하고. 지금에야 실용적이고 활용성이 있는 책이 됐죠. 요즘에 더 가치있고 실용적이란 의견에 백번 동의해요. 이게 배척 당한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아니었나 싶어 짠한 감정도 들고요. 근데 지금도 자산어보의 가치가 많이 알려지진 않았어요. 올해 2월에야 국가과학유산으로 선정됐다고 해요. 아직 갈길이 멀죠."
정약전은 시대의 부조리에 반기를 드는 사상을 지닌 사람이었고, 설경구는 그를 연기했다. 그에게 영향을 받았냐는 물음에 완벽히 동의하진 않았지만 조금은 느낀 점이 있음을 인정했다. 묘하게도 영화 '불한당(2016)' 이후로 아이돌급(?) 인기를 누리게 된 그는 여전히 '같은 편'으로 스스로를 지켜주는 팬들을 향해 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다.
"제가 약전처럼 큰 생각을 품고 사는 사람은 아니에요.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도 못되고요. 그래도 영향을 작게나마 받긴 하죠. 앞으로 조금이나마 달라지는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팬들은 제게 흥도 주시고 긴장도 주시는 분들이에요. 좋게 봐주시기도 하고 늘 챙겨주시죠.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제 편을 들어주는 같은 편이니까요. 더 좋은 작품으로 좋은 모습으로 좋은 사람으로 인사를 자주 드리고 싶어요. 이런 어려운 시기가 돼서 못 뵌지도 꽤 돼요. 저도 많이 보고싶네요."
jyyang@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