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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정리 주옥함 기자= 한국의 대우는 세계 시장에서 이미 잊혀졌지만 한때 중국인들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이런 현상은 채규전이라는 사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2000년 채규전은 대우중공업 옌타이유한회사의 사장으로 부임 후 회사의 흑자전환에 성공해 5년 연속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중국과 인연이 깊은 이 한국 기업인은 현명하고 예리한 경영적 사고능력과 원대한 전략적 결정으로 '한·중 양국의 건설기계 발전을 이끈 전설적 인물'로 불린다.
중화인민공화국과 같은 해, 같은 월에 태어났으며 한국어·영어·일본어·중국어 4개국어를 구사하는 전설적인 이 인물은 고희에 우리와 인터뷰를 했을 때 당시의 영광보다는 오히려 영광 뒤의 숨은 이야기들을 즐겨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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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의 인연, 시장의 미래를 통찰하다
1949년 10월, 채규전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1973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였으며 3년 뒤 대우중공업에 입사해 대우중공업의 일본과 미국의 해외시장을 개척했다.
아마 타고난 사업적 통찰력과 습관적인 경영 마인드 때문인지 그는 일찍이 1978년 일본 도쿄에서 근무하면서 '한·중·일 즉 동북아시아 경제공동체(동북아시아의 EU)'에 대한 구상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일본은 기술적으로 세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한국은 경제발전을 위한 많은 투자와 노력을 하고 있었으며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고 불리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중국이 개혁 개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해이기도 해서 일본의 기술, 한국의 추진력, 중국의 인구와 시장에 대한 거대한 잠재력이 있었기에 언젠가는 동북아시아의 EU가 실현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양국의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기업과 개인 간 왕래도 자유로워졌다. 채규전은 당시 대우중공업의 굴착기, 지게차, 공작기계 등의 해외 수출을 담당하고 있어 중국의 시장을 조사하기 위해 1993년 대우기업 직원으로 처음으로 중국에 발을 들여놓았다.
"처음 중국에 와서 느낀 점은 중국은 19세기와 20세기가 공존하는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해지역과
내륙지역의 지역적 편차, 도시와 농촌 간의 편차, 같은 지역 내에서의 편차 등은 정말로 다양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중국은 이렇더라 하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채규전은 개혁개방을 중심으로 경제 발전은 물론 사회적 변화에 대한 거대한 물줄기가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으며 한국 기업 입장에서 보면 중국이야말로 미래의 거대한 시장이 될 것을 확신하였다. "특히 한국의 경제발전 모델이 중국에 접목되기가 쉽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라고 그는 분석했다.
채규전의 예상대로, 수교 후 10여 년간 한국 기업들의 중국, 특히 산둥 진출 러쉬가 있었으며 중국 특수를 누리던 시기였다. 그에 따라 많은 중국인들이 고용되어 그들의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또한 자기가 종사하는 제품에 대한 관련 기술들을 배우며 동반 성장하는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양국 국민들의 왕래도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며 상호 문화의 차이를 경험하며 맞추어 가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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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경영을 통해, 관련 산업의 발전을 이끌다
한때 한국 국내 5대 재벌 중 하나였던 대우그룹은 바로 그 때 중국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으며 그 일환으로 1994년 대우중공업 옌타이유한회사가 완성되고 1996년 6월에 준공돼 생산에 들어갔다.
"대우가 중국에 투자한 것은 중국의 엄청난 시장 잠재력에 매료된 데다 한·중 양국의 오랜 전통적 친선 덕분입니다."라며 채규전은 자신의 체험담을 말했다. "외관상 우리는 중국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우리 사업의 전개에 큰 편리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에 가면 다들 딱 봐도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장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거리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더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양국 간의 이러한 천시지리에도 불구하고 대우중공업(옌타이) 설립 당시부터 매년 적자를 내고 있었다. 이에 대우 본사는 '해외진출 전문가' 채규전을 파견하여 정상화를 노렸다. 2000년 정식으로 중국법인의 책임자로 부임한 채규전은 당시 중국 굴착기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국영기업들은 일본에서 직수입할 수 있었지만 일반 고객들은 현금 거래의 제한으로 홍콩을 통해 가격이 다소 낮은 중고 굴삭기를 구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가운데 사업적 기회는 예리한 채규전에 의해서 포착되었다.
회사 굴착기의 판매 신장을 위해 그는 선진교역 방법인 할부판매 제도를 과감하게 도입했다.
"그때는 이미 구미, 한국에서도 할부판매 제도가 정착되어 있었지만 중국에는 아직 '신용'이라는 단어가 생소해 대부분의 제품을 현금으로 교역했습니다."그래서 채규전은 금융리스도 은행의 참여도 없이 대우 내에 채권부를 설립했다. 대금 회수 리스크도 컸지만 이 제도 도입으로 회사의 매출신장은 물론 신용거래 덕분에 중국 굴삭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신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목이 넓은 사람은 마음도 항상 열려 있는 법이다.
대우의 굴삭기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채규전은 굴착기 제조·판매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했다. 그는 중국 업체들에게 공장을 개방해 생산기술·품질관리·애프터서비스 등의 관련 기술을 소개하는 한편 전문인력을 대거 양성하여 신생 중국 굴착기 업계에도 자연스럽게 송출됨으로 해서 중국 굴착기 사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것과는 별도로 대우가 옌타이에 진출하면서 성공사례로 떠올랐고 LG, 대우자동차, 대우조선, 포스코, 현대 등 한국의 대기업들도 속속 옌타이로의 투자에 나섰다. "중국 전체로 봐도 옌타이와 같은 중도도시에 한국 대기업들이 대거 진출한 케이스는 옌타이가 유일할 것입니다." 이것이 옌타이 경제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하고 보조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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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로의 환원, 한중 우의의 증진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기업의 관리에서는 '현지화'로 실현된다. 채규전이 이끄는 대우중공업은 '기술대우, 중국을 위한 서비스'라는 경영 철학을 반영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항상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외국기업으로 중국에 와서 사업을 하고 이익을 창출하면 일부라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합리적 이윤 추구, 사회 환원'이라는 기업문화 아래 채규전은 회사가 준법경영을 강조하는 동시에 희망공정에도 참여하여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성실히 이행해 왔다.
"처음 직원들로부터 중국 공청단이 담당하는 '희망공정' 사업을 듣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1999년 말에 공청단 베이징 본사로부터 25만 위안을 기부하면 회사 이름으로 '희망초등학교' 를 설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채규전은 회사가 이익을 내면 매년 희망초등학교를 두 곳씩 설립하겠다고 약속하고 처음에 75만 위안을 내고 3곳을 설립했다고 회고했다.
대우옌타이와 지역 대리점이 공동으로 설립한 대우(두산) 희망초등학교의 수가 전국적으로 100곳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희망공정의 지원뿐만 아니라 채규전의 주도하에 대우중공업은 또 사회 공헌과 기부에도 적극 참여했다. 1998년, 창장 거대한 홍수가 발생한 이후 우한시의 재해복구를 위해 300만 위안을 기부했으며 제품제공 방식으로 중국 서부 대개발 지원, 옌타이와 한국 상공업계를 위해 가교 역할을 하여 옌타이대학 등의 장학금을 제공했다.
이런 사회 환원의 행보는 채규전을 중국 문화와 발전 속으로 녹아들게 했으며 '옌타이시 명예시민' '치루(齊魯)우정상'과 한국 대통령으로부터 받은'동탑산업훈장'등의 영예를 누릴 수 있게 했다.
현재 옌타이 한국국제학교 재단 이사장과 옌타이시 외국인 투자기업협회 한국투자기업지회 명예회장을 겸임하고 있는 채규전은 여전히 한·중 우정을 추진하는 길을 걷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양국 관계는 다소 복잡한 국제질서에 영향을 받고 있지만 이웃들끼리 서로 처한 상황이 다름을 인정하고 즉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서로를 이해하도록 노력을 기울인다면 양국 간의 우호관계도 더욱 발전할 것이며 서로 손잡고 아름다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채규전 개인도 양국 기업 간의 윤활유 역할을 하며 서로 다른 입장의 편견과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 왔다.
"누가 뭐래도 저는 중국을 좋아하며 우리의 선한 이웃으로 알고 있습니다."채규전은 중국에 사는 평범한 한국인으로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양국의 우호증진을 위해 민간사절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변함없이 계속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금교(金橋,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 주관 잡지)=본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