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후계 때 엉터리 '백세봉' 등장
딸 주애 둘러싼 논란에 되풀이 안돼야
"북한 4대세습에 비판적 접근 필요"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김정은이 북한의 후계자로 부상하던 10여년 전 노동신문을 비롯한 관영매체에는 '백세봉'이란 낯선 이름이 등장했다. 노동당의 핵심 권력자들 사이에 새로 자리한 백세봉의 정체를 두고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급기야 그가 후계자로 등극한 김정은을 지칭한다는 국책 연구기관 한 박사의 분석이 나오면서 북한학계는 물론 언론까지 발칵 뒤집혔다.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지난달 8일 밤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북한군 창건 75주 열병식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딸 김주애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조선중앙통신] 2023.02.09 yjlee@newspim.com |
"백세봉은 바로 '백두산의 세 봉우리'를 줄인 말"이란 설명에 모두들 무릎을 쳤다. 김정은의 이름과 실체를 드러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북한이 백세봉이란 가명으로 김정은을 내세웠으니 이제 곧 공식 지명이 있을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백두산 세 봉우리는 김일성과 부인 김정숙, 그리고 아들 김정일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산통이 깨져버렸다. 백세봉이란 노동당의 노 간부가 실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오랜 기간 군수공업을 관장하는 북한 제2경제위원회를 이끌어 온 인물이었다.
문제의 해석을 내놓은 박사는 "사우나를 하고 있는데 문득 백세봉이 백두산 세 봉우리일거란 생각이 떠올라서 그만...."이라고 말해 동료 전문가와 기자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김정은 집권 12년차를 맞아 딸 김주애를 둘러싼 후계자 논쟁이 뜨겁다. 북한은 그저 몇 차례 미사일 발사장이나 군사 퍼레이드, 주택 건설 착공식에 내보냈을 뿐인데 '후계자-김주애'를 띄우는 관측과 분석이 난무한다.
물론 공주처럼 꽃단장을 한 딸을 애지중지하며 공식석상에 내세우고 "존귀하신 자제분"이나 "존경⋅사랑하는 자제분"이라고 극진한 예우를 하고 있으니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마음이 행로가 혹 4대세습 후계자 조기 옹립으로 향하는 것 아닌지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김정은이 39살의 청년 지도자인데다 둘째딸로 알려진 주애의 나이가 열 살 안팎이란 점을 고려하면 후계자 문제는 쉽게 단정할 일이 아니란 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당장 통치 활동이 어렵거나 조만간 불가능해질 건강 이상이나 숨겨진 변고가 있지 않다면 후계를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정부 당국도 이런 판단을 내놓는다.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2011년 12월 28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식에서 운구차 앞에 선 김정은. [사진=조선중앙통신] 2023.03.19 yjlee@newspim.com |
이미 김정은에게는 여동생 김여정이 2인자 역할을 하면서 책사이자 대변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노동당 총비서인 김정은 바로 아래 제1비서를 2021년 1월 신설한 것도 유고시 핵 버튼 관장 같은 권력 대행을 김여정이 하도록 하려는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1남 2녀로 알려진 김정은의 어린 아이들을 고려할 때 김정은 유고시 이른바 '백두혈통'인 김여정이 수평 세습을 통해 권력을 유지한다는 복안이다.
그런데 아무런 합리적인 팩트나 논리적 분석 없이 김주애 후계론을 띄우는 일부 전문가와 선정적 언론의 행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북한 관영TV에 등장한 김주애의 영상을 이리저리 살피며 견강부회식의 해석에 몰두하면서 북한의 입장에서 본 내재론적 해석을 제법 그럴듯하게 내놓는다.
여기에는 북한 세습정권에 대한 비판이나 그로 인해 70년 넘게 고통 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피폐해진 삶과 짓밟힌 인권에 대한 고려는 드러나지 않는다.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우리 정부 당국의 발표와 북한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참상의 목소리에 침묵하고, 핵과 미사일에 올인하는 김정은⋅김여정 남매에 대한 비판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딸은 값비싼 털옷에 모자⋅장갑을 씌워 귀빈석에 앉히면서 남의 자식들에게는 "백두산의 칼바람을 맞고 귓불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맛봐야 혁명정신을 알 수 있다"며 체감온도 40도의 백두산 행군 답사에 내모는 김정은의 행태에 침묵한다.
물론 베일에 싸인 북한의 내부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분석⋅예측하는 일은 지난하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연구와 취재활동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렇지만 "김정은도 8살 때 후계자로 지명됐으니 10살의 김주애를 후계 삼을 수 있다"고 하는 등의 주장은 너무 나간 것이다. 더욱이 이런 분석을 내놓는 측이 과거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장하기 직전까지 형 정철이 후계자라고 내세우며, "김정철이 장악한 보위부 그의 집무실에 '정철 동지를 결사옹위하자'는 구호가 붙었다"고 말했던 걸 돌이켜보면 지나치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저런 근거를 제시하기에 앞서 과거의 잘못된 주장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성찰하는 게 전철을 밟지 않는 길일텐데 말이다.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6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발사되는 화성-17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딸 주애와 지켜보고 있다. [사진=조선중앙통신] 2023.03.19 yjlee@newspim.com |
흔히 기자와 학자, 역사가의 역할은 시계에 비유된다. 시시각각의 세계와 변화를 알리는 초침은 언론, 분침은 전문가, 그리고 긴 역사의 기록을 남기는 시침의 역할은 역사가의 기록에 맡겨야 한다는 의미다.
언론이 정신줄을 놓지 않고 끊임없는 팩트 파인딩으로 균형잡힌 분석을 제시하는 게 긴요하다. 과거 후계자 시절 김정은의 이름조차 '김정운'으로 잘못알고 썼던 부끄러운 기억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학자⋅전문가 그룹의 대오 각성도 요구된다. 차분히 자료를 모으고 흐름을 분석해 깊이 있는 연구와 학술논문으로 자신의 정돈된 입장을 내놓기 보다는 시류에 영합한 얄팍한 코멘트와 방송 출연에 목을 거는 일부 학자들의 모습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요며칠 북한도 김주애 등장 이후 안팎의 여론을 살피는 분위기다. 이런저런 부정적 인식이나 비판에 접했는지 수위 조절을 하는 기류도 포착된다. '존귀하신 자제분' 운운하며 떠받들던 관영 선전매체들은 '사랑하는...'으로 톤을 낮췄고, 보도 문구에서 딸의 등장 사실을 아예 빼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북한이 공개한 영상 속에서도 중앙에서 밀려나있거나 뒷모습만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북한 체제는 핵과 미사일로 서울과 워싱턴⋅도쿄를 겨냥하며 실체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지난 주말에는 전술핵을 탑재한 상황을 가정해 동해상 목표물 상공 800m에서 공중폭발 시키는 종합전술훈련까지 벌였다.
김정은의 무모한 도발 행보는 한반도와 국제사회의 안전과 평화에 최대의 위험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딸 바보' 김정은의 치기어린 놀음을 어느 먼 나라 왕국의 대관식처럼 즐길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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