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 효과 및 미국 에너지 입지
봉쇄 장기화 시 리프라이싱 경고
[서울=뉴스핌] 황숙혜 기자 =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닫힌 첫 거래일, 유가는 치솟았지만 뉴욕증시는 놀라울 만큼 담담했다.
브렌트유 선물이 한때 배럴당 80달러에 근접했고, 중동발 LNG 가격 지표와 해상 운임까지 출렁였지만 3월2일(현지시간) S&P500 지수는 보합에서 거래를 마쳤고, 나스닥 지수는 0.36% 올랐다. 개장 전 선물이 1% 내외로 하락하며 공포감을 반영했지만 장 마감 시점에는 반전을 연출했다.
앞서 일본과 유럽 증시가 급락장을 연출한 사실을 감안할 때 미국 주식시장의 저항력은 월가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뉴욕증시의 섹터별로 보면 방산과 에너지, 유조선·탱커 관련 운송주가 즉각적인 수혜주로 부상했다. 미사일·전투기와 관련된 대표 방산주들은 5~6%대 급등했고, 대형 석유가스 메이저들도 4~5% 상승했다. 반면 항공사와 크루즈 등 글로벌 소비 여행주는 연료비 상승과 노선 조정 우려로 약세를 보였다.
패닉과 거리가 먼 뉴욕증시 반응에 대한 주요 외신과 시장 전문가들의 진단을 AI 도구로 분석하면 투자자들이 지난 몇 년간 반복된 지정학 변수에 어느 정도 '학습'돼 있다는 점이 공통적으로 언급된다.
미국의 에너지 시장 입지도 주요 배경으로 꼽힌다. 과거 중동발 유가 쇼크는 곧바로 미국 경제와 기업 이익에 대형 악재로 읽혔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은 이제 세계 최대 산유국 가운데 하나이고, 셰일 혁명을 거치며 에너지 순수입국에서 사실상 에너지 순수출국의 구조로 변했다.
CNBC와 여러 리서치 하우스는 유가 상승이 미국 소비와 일부 업종에 부담이지만 에너지와 중장비 업종의 이익과 투자 활력을 끌어올려 주가 지수 차원에서 악재와 호재가 일부 상쇄된다고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시장의 기본 시나리오가 아직은 '최악은 아닐 것'이라는 쪽에 서 있다는 점도 이날 침착함의 근거로 작용한다.

CNBC와 포춘, 미국 공영 라디오의 에너지 전문가 인터뷰를 AI로 비교 분석해 보면 브렌트유 배럴당 80~90달러와 서부텍사스산원유(WTI) 70달러대 중후반이 기본 시나리오로 제시된다.
호르무즈가 장기 폐쇄되기보다 부분적인 통행 재개나 산유국 우회 출하, 전략 비축유 방출 등으로 물리적 공급 차질을 일정 부분 완화할 수 있다는 기대다. 논쟁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글로벌 증시와 신용 시장은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 120~150달러로 뛸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가격에 반영하지는 않는 모양새다.
이날 뉴욕증시의 평온을 위험의 해소로 볼 수는 없다. ING를 포함한 다수의 글로벌 하우스는 이번 사태를 두 번째 공급발 인플레이션 쇼크로 번질 수 있는 잠재적 방아쇠로 규정한다.

유가와 LNG, 해상 운임, 전쟁 위험 보험료가 동시에 오르면 에너지와 운송 항목뿐만 아니라 식품·내구재·서비스까지 광범위한 물가에 간접적인 상방 압력이 누적된다. 호르무즈 쇼크가 미국과 유럽의 인플레이션 경로를 다시 위로 비틀 수 있는 요인이라는 얘기다.
금리 시장의 반응도 복합적이다. 장 초반 안전자산 수요가 몰리면서 미국과 독일 국채의 수익률이 내림세를 보였지만 미 10년물 미 국채 금리가 4.0% 선을 웃돌면서 거래를 마감했다.
에너지 가격이 장기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경우 향후 몇 분기 인플레이션 지표가 다시 들썩일 수 있고, 이 경우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 인하를 늦출 여지가 높다.
흥미로운 지점은 기술주, 특히 AI를 둘러싼 메가캡들의 위치다. 뉴욕타임스(NYT)와 야후 파이낸스의 시장 리뷰를 AI로 나란히 보면, 연초 이후 AI와 소프트웨어주 변동성 확대로 요동 쳤던 나스닥 시장이 이번 사태에 오히려 방어주 역할을 했다는 관찰이 나온다.
인플레이션과 금리 재상승 리스크가 커지면 성장주 전반에 부담이지만 현금 창출력이 강하고 이미 밸류에이션 조정을 거친 초대형 기술주, 여기에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반도체 등 디지털 인프라 섹터가 경기 둔화와 에너지 쇼크 속에 양질의 성장주로 포트폴리오 안에 남을 여지가 크다는 논리다.
통화와 신흥국 자산 측면에서 호르무즈 리스크는 또 다른 차원의 리프라이싱을 요구한다. ING와 로베코, 그 밖에 여러 IB의 분석에 따르면 유가가 100달러에 근접하거나 이보다 높은 수준에 머무는 시나리오에서는 에너지 수입국 통화, 특히 아시아와 유럽 주변부 통화에 대한 압력이 커진다.
반면 에너지 수출국 통화와 달러, 금은 상승 모멘텀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미국과 이란의 충돌 이후 달러와 스위스 프랑, 금 가격이 동반 강세를 보였다.
3월 2일과 3일 아시아 주요 증시의 가파른 하락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된다. 이번 호르무즈 쇼크가 실물 경제와 에너지, 외환, 밸류에이션 등 네 개 축 전반에 직접적인 악재라는 얘기다.
아시아 주요국은 원유·LNG 수입의 상당 부분을 중동, 그 중에서도 호르무즈를 통해 들여오기 때문에 에너지와 실물 측면의 노출이 크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현실화되면 자금 흐름에서도 아시아 지역이 취약하고, 자산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발을 뺄 수 있어 밸류에이션과 수급에서도 불리하다.
호르무즈 긴장이 장기 봉쇄되거나 상시 리스크 시나리오로 부상하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유가와 LNG, 해상 운임과 보험료가 높은 수준에서 고착되면서 주요국 인플레이션 경로와 중앙은행의 가이던스, 기업 이익 전망을 모두 다시 써야 한다는 것.
이 경우 S&P500 지수 전체의 밸류에이션을 낮추고, 성장주와 고밸류 섹터에 얼마나 큰 디스카운트를 반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 TD 증권을 포함한 일부 하우스는 브렌트유가 90달러를 넘어 100달러에 근접할 경우 S&P500 지수가 10% 이상 조정받을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ING 역시 장기 봉쇄 시 2026년과 2027년의 글로벌 성장률과 신흥국 자산에 대한 하방 리스크를 경고한다.
전면 확전과 수개월 단위 호르무즈 장기 차단이라는 '테일 리스크' 자산 가격의 미세 조정이 아니라 디레버리징과 크레딧 스프레드 급등, 일부 신흥국의 위기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전혀 다른 국면이 펼쳐질 전망이다.
로이터와 IB들은 "투자자들이 과거 지정학 이벤트에서 배운 '쇼크 매수' 패턴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면 오판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바클레이스는 보고서에서 "역사적으로 시장은 전쟁이 시작될 때 리스크 프리미엄을 파는 경향이 있지만 호르무즈처럼 실물 공급과 인플레이션, 체제 리스크까지 동시에 건드리는 이벤트에서는 이 패턴이 깨질 수 있다"고 적시했다.
shhwang@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