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핵심 요약
beta- 1993년 일본은 자민당 1당 지배를 끝내고 정권교체를 이뤘다
- 버블 붕괴와 불량채권, 재정난이 장기침체와 사회불안을 키웠다
- 1994년 정치개혁은 양당제와 정권교체를 겨냥했지만 부작용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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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2026년, 일본은 어떻게 다시 일어섰나
1993년 8월, 도쿄 나가타초 의사당에 일어난 정권교체는 전후 일본 민주주의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1955년 보수합당 이래 단 한 번도 정권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던 자유민주당이 과반 확보에 실패하고,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를 수반으로 하는 8개 정당 비자민 연립정부가 닻을 올렸다.
이 사건의 본질은 단순히 총리의 간판과 정당의 명패가 바뀌었다는 데 머물지 않았다. 경제성장과 국토개발, 엘리트 관료제와 계열 기업, 그리고 보수 파벌의 끈끈한 네트워크를 발판 삼아 근 40년간 군림해 온 1955년 체제가 선거와 의회라는 헌정 질서 안에서 처음으로 정권을 평화롭게 이양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1940년 제국의회 단상에서 군부의 독주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동료 의원들의 손에 의해 의원직을 박탈당했던 사이토 다카오(斎藤隆夫)의 비극과 비교해 보면 이는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반세기 뒤의 일본 의회에서는 38년간 철옹성처럼 권력을 휘둘러 온 집권 정당 자체가 주권자의 표심과 의회의 합법적 절차에 의해 야당 의석으로 밀려났다.
비교정치학자 T. J. 펨펠(T. J. Pempel)이 세계 장기 1당 지배체제의 공통점을 다룬 명저 《특이한 민주주의(Uncommon Democracies)》와 55년 체제의 해체를 분석한 《체제 변환(Regime Shift)》에서 통찰했듯, 민주주의의 진정한 완성은 단순히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는 기술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선거에서 패배했을 때 기꺼이 권좌에서 물러나 결과에 승복하고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하는 규범의 내면화에 있다. 영구 집권할 것 같았던 자민당이 야당으로 물러서고 8개 정파의 비자민 연립정권이 탄생한 1993년의 정권교체는, 바로 이 패배 승복의 헌정 규범을 입증해 낸 전후 일본 정치의 중대한 제도적 성취였다.
그러나 바로 그 환호의 순간, 일본 경제는 미증유의 구조적 암초와 맞닥뜨렸다. 그 암초는 단순한 경기 순환상의 하강이 아니었다. 1989년 12월 29일 사상 최고치인 38,915를 기록했던 Nikkei 225 주가지수는 불과 2년여 만인 1992년 여름 14,000선으로 60% 이상 폭락했고, 도쿄 6대 도시 상업지 지가 역시 1991년 정점을 찍은 뒤 1993년을 지나며 반토막 났다.
주식과 부동산 시장에서 허공으로 증발해버린 자산 가치만 일본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에 달하는 약 1,000조 엔에 이르렀다. 빚더미에 앉은 기업들이 흑자를 내도 설비 투자 대신 오직 부채 상환에만 매달리며 민간 수요가 얼어붙은 대차대조표 불황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연평균 4~5%대를 질주하던 실질 경제성장률은 1992년 0%대로 주저앉았고, 55년 체제가 막을 내린 1993년에는 마이너스 성장(-0.5%)으로 곤두박질쳤다. 고도성장으로 순항하던 일본호는 이 자산 붕괴의 암초에 걸려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했다.

배 밑바닥에서는 경제 활력을 지탱하던 사회적 합의마저 침수되고 있었다. 은행들은 회생 불가능한 한계 기업을 장부에서 털어내지 못한 채 수십 조 엔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불량채권을 묻어두었고, 이는 1990년대 후반 대형 금융기관들의 연쇄 파산으로 이어지는 시한폭탄이 되었다.
훗날 경제학자 리카르도 카바예로(Ricardo J. Caballero), 호시 다케오(Takeo Hoshi), 아닐 카샤프(Anil K. Kashyap) 공저, 《Zombie Lending and Depressed Restructuring in Japan》에서 실증했듯, 금융권이 파산을 막기 위해 빚더미 기업에 초저금리로 수혈을 이어간 이른바 좀비 대출(Zombie lending)은 시장의 구조조정을 마비시키고 국가 전체의 생산성을 갉아먹었다.
정부의 대응 역시 구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경기 부양이라는 명목으로 1990년대 전반에만 100조 엔이 넘는 재정을 쏟아부었지만, 이는 산간벽지에 다리와 도로공사를 담당한 토건 카르텔과 좀비 기업을 연명시키는 인공호흡기에 불과했다. 이 방만한 재정 살포는 자생적 회복을 이끌어내기는커녕, 1990년 GDP 대비 60%대였던 국가채무 비율을 순식간에 100%를 훌쩍 넘는 빚더미로 밀어 올렸다.
위기에 몰린 대기업들은 신규 채용의 문을 닫아걸어 종신고용이라는 전후의 사회적 안전망이 무너졌다. 1991년 1.4를 웃돌던 유효구인비율(구직자 1인당 일자리 수)은 0.6대까지 곤두박질치며 사회로 첫발을 내디딘 청년들을 비정규직의 벼랑 끝인 사상 최악의 취업 빙하기로 몰아넣었다. 부의 평등을 자랑하던 1억 총중산층 사회가 급속히 빈곤과 격차사회로 갈라져 내리는 동안, 의회와 정치는 출구를 찾지 못한 채 표류했다.
패전 직후 요시다 시게루의 일본에는 부흥과 재건이라는 명확한 깃발이 펄럭였고, 이케다 하야토 이후에는 소득배증과 고도성장이, 다나카 가쿠에이 시대에는 국토개조가 대중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주술이었다.
하지만 거품이 걷히고 성장의 엔진이 멈춰 서자, 정치인들은 더 이상 "내년은 올해보다 더 풍요로울 것"이라는 장밋빛 약속으로 유권자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국가를 이끌던 비전의 깃발이 찢겨나간 자리에는 만성적인 저성장과 디플레이션,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집단적 불안만이 깊게 침전해 있었다.
무엇으로 침몰하는 경제의 불씨를 되살릴 것인가, 닥쳐오는 초고령화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정적자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리고 정권교체를 이뤄낸 의회는 관료제의 포획을 넘어 더 나은 정책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이 엄혹한 질문 앞에서 일본 국회의 속기록은 성장이라는 언어를 밀어내고, 개혁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성공한 체제를 고쳐야 한다, 정치개혁의 시대
1993년 정권교체를 점화한 도화선은 리크루트 사건과 도쿄 사가와규빈 스캔들, 그리고 자민당 파벌정치가 낳은 뿌리 깊은 불신이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연립내각이 들고나온 일차적 처방전 역시 정치개혁이었다. 국회에서 오간 정치개혁의 담론은 몇몇 비리 정치인을 사법 처리하는 도덕적 징벌론에 머물지 않았다. 부패를 필연적으로 재생산하는 중선거구제와 불투명한 기업 헌금 구조라는 제도적 문제를 수술하자는 시스템 개혁에 초점이 맞춰졌다.
정치학자 가토 준코가 《The Problem of Bureaucratic Rationality: Tax Politics in Japan 관료적 합리성의 문제: 일본의 조세 정치》(1994)와 자민당 체제 연구 등에서 정밀하게 추적했듯, 1990년대 초 일본 정계 개편 당시 의원들의 선택은 단순한 도덕적 분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거제도 개편을 통해 파벌 영수에게 목을 매던 공천과 자금 줄을 끊어내려는 전략적 생존투쟁이었다.
1994년 1월 의회가 격론 끝에 기존 중선거구제를 폐지하고 소선거구·비례대표 병립제와 정당교부금 제도를 전격 도입한 배경이다. 한 지역구에서 여러 당선자를 내며 같은 당끼리 진흙탕 돈 선거를 벌이던 병폐를 걷어내고, 당 집행부 중심의 정책 경쟁과 정권교체가 가능한 양당제를 의도적으로 설계한 제도적 결단이었다.
제도의 재설계는 정치 권력의 지형을 단숨에 바꿔놓았다. 1구 1인을 뽑는 소선거구제와 국고에서 직접 정당 본부로 지급되는 정당교부금의 결합은 파벌 보스의 사금고와 공천권을 무력화했다.
대신 그 막강한 권한은 당 총재와 지도부로 고스란히 이동했다. 파벌의 후광 대신 당의 간판과 공천이 정치적 생명을 좌우하게 되면서, 개별 의원의 후원회 조직에 기대던 금권 선거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2009년에는 전후 최초로 민주당으로의 역사적 정권교체라는 가시적 성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제도의 명암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불거졌다. 파벌의 빗장은 풀렸지만, 공천권을 틀어쥔 총리관저로 권력이 비대하게 집중되는 관저 일극 체제가 새로 등장했다.
지도부의 눈치만 살피는 충성형 초선 의원들이 양산되며 정치인의 자생력과 중량감은 급격히 떨어졌고, 단단한 지역구를 물려받는 세습 정치의 벽은 오히려 더 견고해졌다. 파벌 해체와 금권 척결이라는 1차적 과제는 달성했을지언정, 권력의 지나친 중앙 집중과 다양성의 실종이라는 또 다른 정치적 왜곡을 마주하게 된 1994년 개혁의 유산이다.
이 시기 의회 속기록에 각인된 책임에 대한 논의는 또 한 번의 질적 변화를 겪었다. 1945년 패전 직후의 책임이 침략전쟁을 왜 막지 못했는가라는 과거사적 질문이었다면, 1960년대의 책임은 국민의 생활수준을 얼마나 향상시킬 수 있는가라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담고 있었고, 1976년 록히드 스캔들 당시에는 누가 돈을 받아 챙겼는가라는 사법적·도덕적 책임이었다.
반면 1990년대의 정치개혁은 질문의 과녁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왜 정경유착이 반복되는가, 정치인 개인이 부패해서가 아니라 부패하도록 유인하는 제도가 방치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의회는 비로소 제도적 인센티브라는 냉정한 정치경제학적 시각으로 권력의 구조적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했듯, 선거제도의 변경이 곧바로 유능하고 안정적인 대안 권력의 출현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8개 정파의 동상이몽으로 출발한 호소카와 연립정권은 정책 혼선 끝에 8개월 만에 좌초했다.
뒤이어 1994년 6월, 평생의 정적이던 일본사회당과 자민당이 손을 잡고 사회당 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를 총리로 옹립하는 미증유의 야합 연립내각이 탄생했다. 이는 1955년 체제의 이념적 방벽이 허물어지는 유연성의 증거인 동시에, 권력 획득을 위해서라면 정당 고유의 정체성과 노선마저 하루아침에 폐기될 수 있음을 폭로한 회의와 환멸의 시작이었다.

*필자 최연혁 교수는 =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정부의 질 연구소에서 부패 해소를 위한 정부의 역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매년 알메달렌 정치박람회에서 스톡홀름 포럼을 개최해 선진정치의 조건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결과를 널리 설파해 왔다. 한국외대 스웨덴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예테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정경대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쳤다. 이후 스웨덴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 초빙연구원, 남아공 스텔렌보쉬대와 에스토니아 타르투대, 폴란드 아담미키에비취대에서 객원교수로 일했다. 현재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 교수로 강의와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민주주의의가 왜 좋을까' '알메달렌, 축제의 정치를 만나다' '스웨덴 패러독스' 등이 있다.
kimsh@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