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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세 번, 아르헨티나 금융위기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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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적자·외채, 방만 지출탓…82년, 01년 이어 올해도

[뉴스핌=김선엽 기자] '잃어버린 10년'을 초래한 지난 1982년 외채위기와 2001년 디폴트위기에 이어 2014년 시작과 함께 중남미 2위 국가 아르헨티나가 흔들리고 있다.

선진국의 양적완화 축소가 원인이란 지적도 있으나 외채증가와 방만한 공공지출, 경상수지 감소가 세 번의 위기에서 공통되게 거론된다.

국제금융 전문가들은 아르헨티나에 대한 세계경제의 익스포저 규모가 크지 않아 단시일 내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으로 보면서도 아르헨티나에 대한 우려가 터키, 태국 등과 함께 신흥국 전반에 대한 불안으로 확산될 경우 우리나라도 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 두 번의 오일쇼크로 불거진 82년 위기

1973년 1차 오일파동으로 석유 가격이 4개월 만에 3.5배로 상승하면서 산유국들의 경상수지 흑자폭이 크게 증가했다. 산유국들은 늘어난 흑자를 안전한 선진국 은행에 예치했고 영·미 은행들은 당시 견조한 성장세를 이어가던 중남미 국가들에 자금을 융자했다.

이에 1973년 1300억달러에 불과하던 개발도상국들의 부채는 1978년 3360억달러로 늘어났다. 당시 융자조건은 LIBOR금리에 스프레드를 가산한 변동금리였다. 차입국들은 국제금리 상승에 노출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1979년 2차 석유파동이 터지자 개도국들은 해외 차입을 더욱 늘렸고 1982년 6620억달러까지 부채가 늘어났다.

이 와중에 미국의 재정적자가 늘어나면서 달러화 LIBOR금리가 연 9.5%에서 16.6%로 급상승했다. 개도국들은 부채증가-고금리-수출부진이라는 3중고를 맞게 됐고, 달러화 약세와 개도국 융자 기피라는 두 이슈가 중첩되면서 개도국들의 원리금 상환 부담이 급격하게 부각됐다.

멕시코를 시작으로 페소화 절하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멕시코의 외환보유고가 빠르게 소진됐고 결국 멕시코 정부는 1982년 8월 대외채무 지불유예를 발표했다. 멕시코와 처지가 다를 바 없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도 그 뒤를 따랐다.

라틴 국가들에 미국계 은행들이 과도한 대출을 실시한 것에 대해 김윤환 전 한국금융연수원장은 "우선 국제신용평가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또 은행 자체의 실책을 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정확한 리스크 평가에 필요한 정보가 부족하고 당시 세계 경제 불황의 영향에 대해 과소평가했으며 국제금리 상승의 채무자 부담 증가에 대한 고려가 부족해 은행들이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 페로니즘과 뱅크런, 2001년 위기

1982년 아르헨티나 위기가 멕시코 위기의 전이로 촉발됐다면 2001년 아르헨티나 금융위기는 1999년 수출 경쟁국인 브라질이 평가절하를 단행하면서 불 붙었다.

1980년대부터 군사독재, 페로니즘(아르헨티나 후안 페론 전 대통령의 정치 이념으로 포퓰리즘의 원조로 보는 시각이 있다) 등으로 이미 아르헨티나 경제는 저성장, 고실업, 하이퍼인플레이션, 고부채에 시달려 왔다. 1989년 인플레이션율은 5000%에 달했다.

1991년에 도밍고 까바요 경제부장관은 고정환율제도를 도입해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기피 대상이 된 아르헨티나 화폐에 대한 신인도를 높이고자 했다. 이에 힘입어 인플레이션율도 현저히 하락했다. 그러나 환율 고평가에 따라 수입이 늘어 국제수지가 악화되고 자본도피가 심화됐다.

또 정부 지출은 방만했고 부정부패와 탈세가 만연한 상태가 지속됐다. IMF 등으로부터 차입한 외채가 누적됐고. 다른 중남미 국가인 멕시코, 브라질 등도 나름대로의 경제위기에 직면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급감했다.

특히 1999년 수출 경쟁국인 브라질이 평가절하를 단행하자 아르헨티나 수출이 크게 감소하게 되고 1999년에서 2001년까지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면서 경제불황에 빠졌다.
 
2001년 아르헨티나 시중은행에서 전체 수신고의 23%인 200억달러의 예금이 빠져나가는 뱅크런이 일어났고 그해 12월 아르헨티나 정부는 외채지급 불능을 선언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마이너스 경제성장, 정부 붕괴, 시민 폭동의 일상화, 국제 신인도 저하 등 경제와 정치 전반에 심한 혼란과 변화를 겪었다. 

아르헨티나 경상수지 및 외환보유액 추이 <출처: IMF, Banco Central de la República Argentina(BCRA), 국제금융센터 재인용>
◆ 부족한 외환보유고‥2014년 위기

1982년 또는 1999년 위기와 마찬가지로 2014년 1월 아르헨티나가 직면한 위기 역시 외채누적, 경상수지 적자, 방만한 재정지출이 그 원인으로 꼽힌다.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되는 가운데 고정환율제도 하에서 자국 통화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소진한 것이 불씨가 됐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 중단을 시사한 직후인 1월 23일 페소화 가치는 하루 만에 11.7% 절하되면서 금융불안이 심화됐다.

아르헨티나의 외환보유액은 2011년 경상수지가 적자로 전환된 이후 외채상환, 에너지 수입 결제, 페소화 약세 방어 등에 외환보유액이 사용되면서 급속하게 소진돼 최근 300억달러를 하회했다.

또 2001년 디폴트 이후 두 차례(2005년, 2010년) 채무재조정을 통해 부채를 탕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외화조달 능력이 제한된 점도 디폴트 가능성을 부각시켰다.

자금마련을 오로지 외환보유액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파리클럽(주요 채권국 그룹)이 채무(원금 60억3000만달러, 최근 원리금 합계 95억달러)상환을 요구한 시기가 올해 도래한 점이 디폴트 우려를 가중시킨 것이다.

아르헨티나 당국이 외환시장 개입재개 및 규제완화 방침을 발표했으나  당분간 페소화 약세가 이어지면서 인플레이션 및 외환보유액 고갈 우려는 지속될 전망이다.

국제금융센터 이상원, 김용준 연구원은 "재정 및 통화정책의 긴축 조치가 단행되지 않을 경우 인플레이션 우려가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이며, IMF구제금융 신청 가능성도 거론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뉴스핌 Newspim] 김선엽 기자 (sunup@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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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제6사 사장 김일성의 출현 변상문의 '화랑담배'는 6·25전쟁 이야기이다. 6·25전쟁 때 희생된 모든 분에게 감사드리고, 그 위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제목을 '화랑담배'로 정했다.  동북항일연군 제6사 사장 김일성(金日成)이 1937년 11월 13일 사살된 이후부터 한동안 이 부대에 대한 동향이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8년 봄부터 갑자기 새로운 김일성(金日成)의 움직임이 일본 경찰 정보망에 잡혔다. 신임 제6사 사장 역시 소련으로부터 파견돼 온 자였다. 그는 소련 지령으로 전임자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후임 제6사 사장 김일성(金日成)은 1939년 봄에 사(師)를 묶어서 방면군(方面軍)으로 편제를 변경하는 동북항일연군 제3차 개편 때 제1로군 제2방면군장(方面軍長)이 되었다. 소련은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이 소련을 공격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동북항일연군에 적극적인 군사 지원을 하였다. 그중에서도 소련군 내 한국·중국인 군관들에게 유격 전술을 교육하여 파견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신임 제6사(제6사는 동북항일연군 제3차 개편 때 제2방면군이 된 부대) 사장으로 취임한 김일성(金日成)은 본명이 김일성(金一星)이다. 김성주 별호와 같다. 그는 1930년 5월 30일 간도 폭동 사건 때 용정에 있었던 한인이 다니는 대성중학교 학생이었다. 이날 밤(1930년 5월 30일) 김일성(金一星)은 용정역 기관차에 불을 지르는 등의 행위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서울로 압송되기 전 탈출에 성공했다. 그 후 소련으로 건너가 적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련 공산당 지령에 따라 1938년 동북항일연군으로 파견돼 온 것이었다. [사진= AI 생성 이미지]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은 1938년 4월 26일 밤 제2방면군은 평안북도 후창(厚昌) 경찰서 부흥(富興) 주재소 대안 임강현(臨江縣) 제3구(三區) 6도구(六道溝)를 습격하였다. 병력은 약 500명이었다. 모두 개인화기를 소지하고 있었고, 경기관총 6정도 출동하였다. 총 5개 대(隊)로 나누어 나팔을 불며 공격했다. 일본인 세무서원 2명, 중국인 세무서원 1명을 현장에서 사살했다. 지역 주민 50여 명을 납치해 갔다. 현금 2천 원, 식량 1만 원 상당을 탈취하였다. 이에 일본군과 만주군은 중일전쟁 후방지역 안정화 차원에서 동북항일연군 토벌 작전을 강도 높게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군에 의한 토벌뿐만 아니라, 심리전, 교통 차단 등 다양한 봉쇄 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 1939년 봄이 되면 동북항일연군 제2·3로군의 전투력은 거의 소진돼 버렸다. 제2·3로군 중 전투력을 일부 보전한 부대는 소련으로 도주하거나, 소만 국경 지대로 은거했다. 전투력을 유지한 부대는 제1로군 뿐이었다. 이때 제1로군 사령관은 중국인 양정우(楊靖宇)였고, 부사령관은 중국인 위극민(魏極民), 사령관 비서처장 겸 군수처장은 앞서 설명한 한인 오성륜(吳成崙)이었다. 총병력은 3000여 명이었다. 제1로군은 동변도(東邊道)라 부르는 길림, 통화 간도 일대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부대 정비에 들어갔다. 이때 제3차 부대 개편을 단행하였다.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했지만, 병력 손실이 큰 데다, 추가 병력 보충이 어려웠다. 그래서 기존의 로군 아래 군(軍)을 없애고 군(軍) 예하 모든 사(師)를 통합하여 제1·2·3방면군으로 바꾼 것이다. 제1방면군장은 조아범(曺亞範), 제2방면군장은 김일성(金日成), 제3방면군장은 진한장(陳翰章)이었다. 일본군과 만주군은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 1년 6개월간 더욱 강하게 동북항일연군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이때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양정우가 1940년 2월 23일 몽강현(濛江縣) 남쪽 490고지에서 사살되었다. 그는 부하 몇 명만을 거느린 채 끝까지 항전하다 죽었다. 양정우가 죽자, 부사령관 위극민, 비서실장 겸 군수처장 오성륜,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등 11명의 동북항일연군 수뇌부는 1940년 3월 사령관 양정우 사후 문제를 논의했다. 첫째 군은 대중 속으로 들어가 병력 획득 공작을 벌인다. 둘째 소부대로 분산하여 가능하면 북상하여 제2·3로군과 합류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때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은 부대를 10명 이하의 여러 개의 소부대로 나누어 북상하도록 하면서 모두 '김일성 부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에 김성주가 속한 소부대도 '김일성 부대' 명칭을 사용하면서 소련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이 무렵 일본군과 만주군은 머리를 빗는 식의 섬멸 작전을 뜻하는 빗질 작전, 쇠파리처럼 끝까지 따라붙는다는 쇠파리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제1로군 제1방면군장 조아범이 1940년 4월 8일 부대 내 한중간 민족 대립으로 한인 부하로부터 암살당했다. 제3방면군장 진한장은 1940년 12월 8일 일본군에게 사살되었다. 제1로군 사령관 비서실장 오성륜은 1941년 1월 30일 일본군에게 투항했다. 군 수뇌부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하게 무너졌다. 1941년 3월 말 기준 유기 시체 1282구, 투항 1040명, 체포 890명의 손실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은 부대를 여러 개의 소조직으로 재편하여 각자도생식(各自圖生式: 제각기 살길을 도모함)으로 도주하여 소련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 소련으로 도주한 동북항일연군은 대략 300명이었다. 주요 인물을 살펴보면, 제2로군 총사령 주보중(周保中), 제3로군 총사령 장수전(張壽錢), 제2로군 참모장 최용건(崔庸健), 그리고 문제의 김성주와 그의 처 김정숙(金靜淑)도 이들 무리에 끼어있었다. 1940년 11월이었다.  /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 2026-03-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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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재룡, 강남서 사고 뒤 도주 [서울=뉴스핌] 김가희 기자 = 서울 강남에서 교통사고를 낸 뒤 현장을 떠난 배우 이재룡이 경찰 조사에서 음주운전이 아니었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8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강남경찰서는 도로교통법 위반(사고 후 미조치) 혐의로 이씨를 조사하고 있다. 이씨는 지난 6일 오후 11시께 서울 강남구 청담역 인근 도로에서 차량을 운전하던 중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은 뒤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현장을 떠난 혐의를 받는다. 이재룡. [사진=CJ E&M] 사고 이후 이씨는 차량을 자택에 주차한 뒤 지인의 집으로 이동했다가 경찰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이 실시한 음주 측정 결과 이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 정지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나타났다. 다만 약물 간이 검사에서는 음성 반응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경찰 조사에서 "운전 당시 음주 상태가 아니었다"는 취지로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차량 블랙박스 영상 등을 토대로 사고 당시 상황과 음주 여부 등을 확인하고 있다. 한편 이씨는 과거에도 음주와 관련한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2003년 강남에서 음주운전 사고를 낸 뒤 음주 측정을 거부해 면허가 취소됐고, 2019년에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강남의 한 볼링장 입간판을 파손해 재물손괴 혐의로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rkgml925@newspim.com 2026-03-0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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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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