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최신뉴스 GAM
KYD 디데이
문화·연예 문화·연예일반

속보

더보기

[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별이 빛나는 밤에, 빈센트 반 고흐

기사입력 :

최종수정 :

※ 본문 글자 크기 조정

  • 더 작게
  • 작게
  • 보통
  • 크게
  • 더 크게

※ 번역할 언어 선택

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31)

미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빈센트 반 고흐는 3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불꽃처럼 강렬한 삶을 살았다. 게다가 그의 주요 작품들은 대부분 생애 마지막 3년 기간 동안에 제작되었다. 그의 그림의 특징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그림의 모든 것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은 많은 현대회화, 특히 야수주의와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가 평생 동안 그린 800점 이상의 유화와 700점 이상의 데생 가운데,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팔린 작품은 데생 1점뿐이었다. 1890년 그가 자살했을 때, 반 고흐라는 이름은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가 살아있을 때는 1888~90년 파리의 앵데팡당 미술전람회와 브뤼셀에 그림 몇 점을 출품했을 뿐이다.
그가 죽은 뒤에도 한참 동안은 파리와 브뤼셀에서 그를 기념해 몇 점의 작품들만이 전시됐을 뿐이며, 그에 대한 비평 또한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았다. 항상 가난했던 그는 형의 재능을 무조건 믿었던 거의 유일한 팬이자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간신히 생활을 유지했다. 그러다 20세기를 지나면서 비로소 그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로 추앙을 받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1853년 네덜란드 브라반트 북쪽에 위치한 그루트 준데르트(Groot Zundert)라는 작은 마을에서 개신교 목사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기숙학교에 다녔으나 가난으로 15세 때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1869년 숙부가 운영하는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서 판화를 복제해 판매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후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 등으로 옮겨 다니며 화랑 일을 이어나갔으나, 종교적 관심사에 빠져 화랑 일을 소홀히 해 해고당하게 된다.
이후 성직자의 길을 열망했던 고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신학대학 입학시험에 낙방해서 목사의 길이 멀어지자 전도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그는 최하층민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오두막에서 지내는 등 열심히 전도활동을 펼쳤다. 그럼에도 그의 광신도적인 기질과 격정적인 성격을 우려한 교회는 그를 전도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의에 빠진 고흐는 1880년부터 그동안 계속해온 습작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그림 그리기에 푹 빠지게 되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빈털터리에다 믿음마저 잃어버린 그는 절망 속에서 모든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진지하게 그림을 그렸다. 마침내 그는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해야 한다는 확신과 함께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창조력을 깨닫게 되고 또 자신감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고흐는 헤이그로 가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다. 반면, 열정을 보여 왔던 종교에 반감을 가지고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매춘부 출신의 한 여자와 동거를 하며 지냈는데 그녀는 알코올 중독자에다 매독 환자였다. 고흐의 가족들은 그녀와 헤어지기를 강요했다. 그는 괴로웠지만 생활비를 줄이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그녀와 어린아이를 저버리게 되었다. 고흐는 이 때문에 양심의 가책으로 오랫동안 고통 받게 된다.
한편, 이 시기의 그림 주제는 언제나 노동자· 농민 등 하층민의 생활과 풍경이었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도 이 무렵의 작품이다. 이 그림은 먹고살기 위해 고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어둡고 칙칙한 색조를 띠고 있다.
이후 1886년 파리로 다시 이주하면서는 전위적인 예술기류에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인상주의 화가 및 신인상주의 화가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일본 판화에도 매료되었다. 이에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의 어두운 화풍에서 벗어나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작품활동 또한 정열적으로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고흐는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여 《아를의 도개교(跳開橋)》,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품을 그렸다.
아를생활에 매료된 그는 성직자들의 수도원 같은 작가의 창작촌을 꾸미고 싶어 했다. 이는 종교의 구도자와 같은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성향은 동생이자 화상이었던 테오를 곁에 두고서도 생전 자신의 작품은 팔지 않은 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고흐에게 그림 작업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일종의 정진이자 수행이었기 때문이다.
고흐는 아를을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생각하고 그의 작품에도 등장하는 방 4개가 딸린 '노란집'을 임차하게 된다. 그러고는 2년 전 동생 테오와 함께 파리에서 만나 호감을 가지고 있던 고갱에게 일종의 초청장을 보내게 된다.

고흐의 삶과 작품 활동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 둘 있는데, 한사람은 동생 테오이고 다른 한사람은 화가 고갱이다. 고흐는 방대한 양의 미술작품과 함께 수많은 편지들도 남겼는데, 편지의 대부분은 동생 테오에게 쓴 것이다. 미술품 중개상이었던 테오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주로 다루었다. 두 사람 간의 형제애는 매우 두터웠다. 형이 비록 짐인 존재였지만, 테오의 감성적인 삶에 있어 고흐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테오는 그런 존재인 형을 재정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끝까지 지원해주었다.
편지에 따르면 두 형제는 격렬히 싸운 적도 있었지만, 테오의 결혼 전까지는 함께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 형에게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면서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던 테오의 삶은 고흐의 죽음 이후 급격히 무너졌다. 테오는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석 달 뒤에는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된다. 결국 형 고흐가 죽은 지 6개월 뒤인 1891년 1월 그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 1914년 테오의 시신은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있는 형 고흐의 묘지 옆으로 이장되었다.

고흐의 삶과 작품에 영향을 준 또 다른 한 사람이 화가 고갱이다. 고갱은 서른다섯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는데 그 전에는 수습도선사, 증권거래인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었다. 온전히 화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한 고갱은 당시 화상을 하고 있던 고흐의 동생 테오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된다. 그리고 테오를 통해 고흐도 만나게 된다.
1888년 9월 21일, 고갱은 고흐의 초청을 받고 아를에 도착하게 된다. 고갱이 고흐의 부탁을 받아들인 이유는 당시 건강상태 악화와 경제적 궁핍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동안 고흐의 동생 테오가 자신의 작품을 팔아주면서 재정적으로 지원을 해준 데 대한 감사의 뜻도 곁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어렵게 모신 고갱을 고흐는 진심으로 대해주었다. 당시 고흐에게 있어 고갱은 창작욕구를 자극하는 일종의 영감적인 존재였었다.
고흐와 고갱은 창작촌 공동생활을 시작한 이후 처음 얼마동안은 잘 지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들 사이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우선 고흐가 생각하는 창작촌 운영방식이 문제였다. 고갱은 처자식마저 버렸던 로맨티스트이자 팔기 위한 작품을 제작했던 현실주의자였지만, 고흐는 자신이 만든 운영원칙을 고수하였던 원칙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였다. 두 달여 동안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살았어도 사실 그들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이별이 숙명이었던 관계였다.
화풍 또한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고갱은 이렇게 말했다. “고흐는 낭만적이나, 나는 원초적인 것을 추구하는 편이다. 색채만 해도 그렇다. 그는 두껍게 바른 물감으로부터 우연한 효과를 기대하지만, 나는 덧칠한 화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결국 고갱이 먼저 결별을 통보한다. 그러자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다. 그러고는 사창가의 매춘부에게 자신의 왼쪽 귀 조각을 건넸다. 고흐는 매춘부의 신고를 받고 도착한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를의 주민들은 고흐를 ‘미친 네덜란드 사내’라고 하며 그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강요했다. 이런 일이 생기자 고갱은 말없이 창작촌을 떠났다. 이후 고흐는 1889년 5월 8일, 프로방스 지방의 생레미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그 후 고흐의 생활은 발작과 열정적 작품활동의 연속이었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1년간 치료를 받는 동안 되풀이되는 발작에 시달리다가도 정신이 돌아오면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림을 그려댔다. 이 시기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었다. 그 결과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 《삼나무 (Cypresses)》, 《올리브 나무 (Olive Trees)》등이 만들어졌다.

‘별이 빛나는 밤’, 캔버스에 유채, 73.7×92.1cm.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 <사진=이철환>

특히 《별이 빛나는 밤》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가 그린 밤하늘에서는 구름과 대기, 별빛과 달빛이 폭발하고 있다. 하늘은 굽이치는 두꺼운 붓놀림으로 불꽃같은 사이프러스와 연결되고, 그 아래의 마을은 대조적으로 평온하고 고요하다. 이 작품이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기에 결국 노래로도 만들어지게 된다.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ll listen now
Stary, Stary night

이젠 깨달았어요
당신이 나에게 뭘 말하려고 했었는지
얼마나 영혼이 아팠는지
얼마나 그들로부터 자유를 갈망했는지
그들은 어떻게 듣는지도 모른 채, 들으려 하지 않았죠
지금은 아마 귀를 기울일 거예요
별들이 빛나는 밤에

연속된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친 고흐는 1890년 5월,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는 오랜 친구이자 의사인 가셰가 있는 곳이었다. 친구의 정성어린 치료 덕분에 한때 건강이 회복되어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했으나 다시 심신이 쇠약해지게 된다. 그러나 고흐는 여기서 머문 70여일의 짧은 기간 동안 무려 77점에 달하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기게 된다.
그즈음 또 하나의 명작인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완성된다.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병원 옆의 들판으로 걸어 나간 뒤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다.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총상은 치명적이었다.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간 이틀 뒤,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리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동생 테오 또한 죽음을 맞게 된다. 처음에는 다른 곳에 있던 테오의 시신은 나중에 형 고흐가 묻혀 있는 오베르의 묘지로 이장된다. 이로서 두 형제는 죽어서도 나란히 함께하게 된 것이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관련키워드]

[뉴스핌 베스트 기사]

사진
지구촌 경제 숨통 '호르무즈 10km' [서울=뉴스핌] 황숙혜 기자 = 호르무즈 해협 10km 남짓의 수로가 지구촌 경제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미국과 이란의 직접 충돌 이후 이란 혁명수비대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들을 불태운다는 협박을 거듭하는 상황. 160km 길이와 폭 30~50km의 호르무즈 해협에서 실제 항로는 10km 가량이지만 전세계 에너지 거래의 심장부다. 보도에 따르면 머스크와 CMA CGM 등 주요 컨테이너 선사와 탱커, 트레이딩 하우스들은 호르무즈 통항을 전면 중단한 채 우회 또는 대기 중이다. 유럽과 중국 쪽 해운 데이터에서도 3월2일(현지시각) 기준 상업 유조선 통과가 사실상 0에 가까운 것으로 확인된다. 사실상 민간 선박의 통행이 중단되면서 충격파가 지구촌 에너지와 물류 시스템에서 물가, 통화정책, 실물경제까지 덮칠 수 있다는 우려가 번진다. 일부 투자은행(IB)은 물가 급등과 경기 침체를 의미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경고한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호르무즈의 좁은 심해 수로를 통과하는 원유는 교역량의 4분의 1 이상이다. 액화천연가스(LNG) 물량도 전세계 해상 거래의 20%에 이른다. AI 도구를 이용해 미국 에너지정보청(EIA) 분석을 재가공해 보면, 호르무즈를 지나는 원유와 LNG의 80% 이상이 중국과 인도, 일본, 한국 등 네 개 국가로 전달된다. 에너지 흐름은 이미 급제동이 걸렸다. 미국 에너지정보청과 민간 데이터 업체 Kpler의 통계에 따르면 호르무즈를 거쳐 나가던 중동산 원유 가운데 상당 부분이 선적항에서부터 출항이 보류되거나 해협 인근에서 정박하는 실정이다. 호르무즈 해협과 중동 지역 [사진=미국 에너지부, 블룸버그] 걸프 산유국들은 수출항에서의 선적 일정을 조정하고 일부 물량을 내륙 파이프라인을 통해 홍해 또는 지중해 쪽으로 우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호르무즈를 완전히 대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미 아시아 LNG 현물 가격을 나타내는 JKM 지수는 3월2일 15.068달러/MMBtu까지 상승하며 2025년 2월13일 이후 최고치를 찍었다. 국제 유가도 이번 사태 직전보다 20~30% 가량 뛴 상태다. 주요 투자은행(IB)은 단기적으로 브렌트유가 배럴당 90달러 선을 중심으로 변동할 것으로 보되, 호르무즈 봉쇄가 길어질 경우 120달러 선까지도 상단이 열려 있다고 경고한다. 단순한 리스크 프리미엄이 아니라 물리적 공급 차질에 따른 구조적 유가 상승이라는 설명이다. 중국과 유럽의 경기 둔화, 미국의 셰일 생산 여력, OPEC(석유수출국기구) 플러스(+)의 증산 여지를 감안한 다수의 시나리오에서도 호르무즈 봉쇄로 인해 당장 하루 2000만 배럴에 달하는 물량이 제때 시장에 도달하지 못하면 과거 걸프전 당시와 유사한 수준의 가격 충격이 재현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유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조선과 LNG선, 컨테이너선이 호르무즈와 인근 해역을 기피하거나 우회하면서 해상 운임과 보험료가 동시에 치솟는 모양새다. 한 LNG 트레이딩 업체는 중동 항로의 워 리스크(war risk) 보험료가 화물 가치의 15~25% 수준으로 치솟았다고 전했고, 이로 인해 일부 선사는 차라리 선박을 놀리거나 다른 노선으로 돌리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중국 신화통신은 글로벌 선사들이 호르무즈와 페르시아만 항로를 피하기 위해 선박을 재배치하면서 해상운임과 보험료가 동시에 상승하고, 일부 화주들은 아예 신규 예약을 중단했다고 보도했다. 운임과 보험 쇼크는 곧바로 에너지 수입 가격과 전력 요금, 나아가 광범위한 물류비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유사와 발전사, 석유화학 기업의 원가가 이중으로 압박받게 되고, 여기에 컨테이너선과 벌크선까지 위험 해역을 피해 돌아가기 시작하면 중간재와 원자재, 곡물과 사료까지 운송 시간이 늘어나고 비용이 오른다. 호르무즈 해협의 폐쇄가 장기화되면 글로벌 공급망은 또 한 번 구조적인 병목을 겪을 전망이다. 가뜩이나 끈적끈적한 물가가 재차 급등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호르무즈 봉쇄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유지될 경우 미국과 유로존, 아시아 등 주요 수입국의 소비자물가지수가 수개월간 0.5~1.0%포인트의 상방 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시뮬레이션 결과가 여러 연구기관에서 제시된다.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넘고 상황이 장기화되는 경우에는 특히 에너지 집약도가 높은 신흥국과 유럽 일부 국가에서 물가와 성장률이 동시에 악화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닥칠 수 있다는 경고다. AI 도구로 세계은행과 IMF, 민간 리서치기관의 모델을 종합하면 유가가 10달러 상승할 때마다 글로벌 경제 성장률은 0.1~0.2%포인트씩 떨어지고, 에너지 수입국의 경상수지와 재정 부담이 눈에 띄게 악화되는 것으로 확인된다. 유가 150달러 시나리오에 대한 스트레스 테스트에서는 일부 취약 신흥국에서 통화 가치 급락과 경상수지 위기가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는 결과도 제시됐다. 지금과 같이 전쟁과 제재, 수송 차질이 겹친 상황에서는 단순히 유가 상승분만이 아니라 LNG와 전력요금, 곡물과 비료, 운임비까지 연쇄적으로 튀어오를 수 있어 기존의 "유가 파급계수"보다 충격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점이 AI 기반 시뮬레이션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호르무즈 봉쇄가 장기화될 경우 아시아 제조 강국들의 심장부를 이루는 반도체와 석유화학, 철강, 조선, 자동차 산업이 동시에 압박을 받을 전망이다. 정유사와 발전사는 더 높은 가격에 원유와 LNG를 조달해야 하고, 이는 곧 전기 요금과 산업용 연료비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석유 화학과 철강, 시멘트 등 에너지 소비가 높은 업종은 원재료와 연료 비용 상승과 동시에 해상 운임 상승까지 감내해야 한다. 자동차와 조선, 전자업체들은 중간재와 부품 공급 지연, 운송비 상승, 해외 수요 위축이라는 삼중고를 마주할 수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10km 바닷길이 막히면서 에너지 공급과 해상 운임, 보험료와 전력 요금, 나아가 세계 각국의 물가와 성장률까지 동시에 흔들리는 '복합 쇼크'가 현실화되는 시나리오를 경고한다. shhwang@newspim.com 2026-03-03 13:17
사진
900만 울린 '왕사남 강가 포스터'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2026년 최고 흥행작에 등극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900만 관객 돌파를 기념해 짙은 여운을 남기는 강가 포스터를 공개했다. '왕과 사는 남자'가 3일 900만 관객 돌파에 힘입어 강가 포스터를 공개했다. 영화 속 이홍위(박지훈)의 마지막과 함께 공개되는 장면 속 아련한 모습을 담아 깊은 울림을 전한다. 공개된 포스터는 왕위에서 쫓겨나 청령포로 유배된 이홍위가 강가에 홀로 앉아 쓸쓸히 물장난 치는 장면을 담았다. 흰색 도포를 입고 쪼그려 앉은 이홍위의 모습은 어린 나이에도 자유를 꿈꿨을 그의 심정을 짐작하게 해 먹먹한 감정을 자아낸다. [사진=(주)쇼박스]  특히, 엄흥도 역의 유해진과 이홍위 역의 박지훈이 포스터 속 장면에 대해 직접 소회를 밝힌 바 있어 관객들의 감정을 배가시킨다. 유해진은 "이홍위가 유배지 강가에서 물장난 쳤던 모습이 기억에 남고, 그때 엄흥도의 심정은 아들을 바라보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유배지가 아니라면 자유롭게 있을 나이인데, 너무 안쓰러웠다"라 말하며, 해당 장면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언급하기도 했다. 박지훈 또한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장면은 해진 선배님의 제안으로 생긴 장면. 생각해 보니 친구들과 뛰어놀고 싶을 시기, 유배지에 와서 혼자 물장난을 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단종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며, 해당 장면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함께 이홍위의 복합적인 내면을 표현하고자 고심했던 과정을 밝혀 눈길을 모았다. 이처럼 배우들은 물론 900만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 강가 포스터는 '비운의 왕'이라는 단종의 단편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인간 이홍위'에 집중한 '왕과 사는 남자'만의 서사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왕과 사는 남자'는 1457년 청령포,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과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된 어린 선왕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 속 숨겨진 단종의 이야기로 900만 관객의 마음속에 묵직한 감동을 남기며 파죽지세의 흥행을 기록 중이다.  jyyang@newspim.com 2026-03-03 08:11
기사 번역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종목 추적기

S&P 500 기업 중 기사 내용이 영향을 줄 종목 추적

결과물 출력을 준비하고 있어요.

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이 내용에 포함된 데이터와 의견은 뉴스핌 AI가 분석한 결과입니다.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 매매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 및 결과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으므로, 투자 전 충분한 조사와 전문가 상담을 권장합니다.
안다쇼핑
Top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