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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의 예술가 이야기] 별이 빛나는 밤에, 빈센트 반 고흐

기사입력 : 2017년12월05일 12:00

최종수정 : 2017년12월05일 12:00

예술에 살고 사랑에 살고(31)

미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빈센트 반 고흐는 3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불꽃처럼 강렬한 삶을 살았다. 게다가 그의 주요 작품들은 대부분 생애 마지막 3년 기간 동안에 제작되었다. 그의 그림의 특징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그림의 모든 것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은 많은 현대회화, 특히 야수주의와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가 평생 동안 그린 800점 이상의 유화와 700점 이상의 데생 가운데,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팔린 작품은 데생 1점뿐이었다. 1890년 그가 자살했을 때, 반 고흐라는 이름은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가 살아있을 때는 1888~90년 파리의 앵데팡당 미술전람회와 브뤼셀에 그림 몇 점을 출품했을 뿐이다.
그가 죽은 뒤에도 한참 동안은 파리와 브뤼셀에서 그를 기념해 몇 점의 작품들만이 전시됐을 뿐이며, 그에 대한 비평 또한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았다. 항상 가난했던 그는 형의 재능을 무조건 믿었던 거의 유일한 팬이자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간신히 생활을 유지했다. 그러다 20세기를 지나면서 비로소 그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로 추앙을 받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1853년 네덜란드 브라반트 북쪽에 위치한 그루트 준데르트(Groot Zundert)라는 작은 마을에서 개신교 목사의 6남매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기숙학교에 다녔으나 가난으로 15세 때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1869년 숙부가 운영하는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서 판화를 복제해 판매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후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 등으로 옮겨 다니며 화랑 일을 이어나갔으나, 종교적 관심사에 빠져 화랑 일을 소홀히 해 해고당하게 된다.
이후 성직자의 길을 열망했던 고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신학대학 입학시험에 낙방해서 목사의 길이 멀어지자 전도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그는 최하층민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오두막에서 지내는 등 열심히 전도활동을 펼쳤다. 그럼에도 그의 광신도적인 기질과 격정적인 성격을 우려한 교회는 그를 전도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의에 빠진 고흐는 1880년부터 그동안 계속해온 습작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그림 그리기에 푹 빠지게 되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빈털터리에다 믿음마저 잃어버린 그는 절망 속에서 모든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진지하게 그림을 그렸다. 마침내 그는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해야 한다는 확신과 함께 예술을 통해 인류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창조력을 깨닫게 되고 또 자신감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고흐는 헤이그로 가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다. 반면, 열정을 보여 왔던 종교에 반감을 가지고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 매춘부 출신의 한 여자와 동거를 하며 지냈는데 그녀는 알코올 중독자에다 매독 환자였다. 고흐의 가족들은 그녀와 헤어지기를 강요했다. 그는 괴로웠지만 생활비를 줄이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그녀와 어린아이를 저버리게 되었다. 고흐는 이 때문에 양심의 가책으로 오랫동안 고통 받게 된다.
한편, 이 시기의 그림 주제는 언제나 노동자· 농민 등 하층민의 생활과 풍경이었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도 이 무렵의 작품이다. 이 그림은 먹고살기 위해 고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어둡고 칙칙한 색조를 띠고 있다.
이후 1886년 파리로 다시 이주하면서는 전위적인 예술기류에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인상주의 화가 및 신인상주의 화가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일본 판화에도 매료되었다. 이에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의 어두운 화풍에서 벗어나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작품활동 또한 정열적으로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고흐는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여 《아를의 도개교(跳開橋)》,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품을 그렸다.
아를생활에 매료된 그는 성직자들의 수도원 같은 작가의 창작촌을 꾸미고 싶어 했다. 이는 종교의 구도자와 같은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성향은 동생이자 화상이었던 테오를 곁에 두고서도 생전 자신의 작품은 팔지 않은 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고흐에게 그림 작업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일종의 정진이자 수행이었기 때문이다.
고흐는 아를을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생각하고 그의 작품에도 등장하는 방 4개가 딸린 '노란집'을 임차하게 된다. 그러고는 2년 전 동생 테오와 함께 파리에서 만나 호감을 가지고 있던 고갱에게 일종의 초청장을 보내게 된다.

고흐의 삶과 작품 활동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 둘 있는데, 한사람은 동생 테오이고 다른 한사람은 화가 고갱이다. 고흐는 방대한 양의 미술작품과 함께 수많은 편지들도 남겼는데, 편지의 대부분은 동생 테오에게 쓴 것이다. 미술품 중개상이었던 테오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주로 다루었다. 두 사람 간의 형제애는 매우 두터웠다. 형이 비록 짐인 존재였지만, 테오의 감성적인 삶에 있어 고흐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테오는 그런 존재인 형을 재정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끝까지 지원해주었다.
편지에 따르면 두 형제는 격렬히 싸운 적도 있었지만, 테오의 결혼 전까지는 함께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 형에게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면서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던 테오의 삶은 고흐의 죽음 이후 급격히 무너졌다. 테오는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석 달 뒤에는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된다. 결국 형 고흐가 죽은 지 6개월 뒤인 1891년 1월 그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 1914년 테오의 시신은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있는 형 고흐의 묘지 옆으로 이장되었다.

고흐의 삶과 작품에 영향을 준 또 다른 한 사람이 화가 고갱이다. 고갱은 서른다섯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는데 그 전에는 수습도선사, 증권거래인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었다. 온전히 화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한 고갱은 당시 화상을 하고 있던 고흐의 동생 테오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된다. 그리고 테오를 통해 고흐도 만나게 된다.
1888년 9월 21일, 고갱은 고흐의 초청을 받고 아를에 도착하게 된다. 고갱이 고흐의 부탁을 받아들인 이유는 당시 건강상태 악화와 경제적 궁핍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동안 고흐의 동생 테오가 자신의 작품을 팔아주면서 재정적으로 지원을 해준 데 대한 감사의 뜻도 곁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어렵게 모신 고갱을 고흐는 진심으로 대해주었다. 당시 고흐에게 있어 고갱은 창작욕구를 자극하는 일종의 영감적인 존재였었다.
고흐와 고갱은 창작촌 공동생활을 시작한 이후 처음 얼마동안은 잘 지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들 사이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우선 고흐가 생각하는 창작촌 운영방식이 문제였다. 고갱은 처자식마저 버렸던 로맨티스트이자 팔기 위한 작품을 제작했던 현실주의자였지만, 고흐는 자신이 만든 운영원칙을 고수하였던 원칙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였다. 두 달여 동안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살았어도 사실 그들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이별이 숙명이었던 관계였다.
화풍 또한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고갱은 이렇게 말했다. “고흐는 낭만적이나, 나는 원초적인 것을 추구하는 편이다. 색채만 해도 그렇다. 그는 두껍게 바른 물감으로부터 우연한 효과를 기대하지만, 나는 덧칠한 화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결국 고갱이 먼저 결별을 통보한다. 그러자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라버린다. 그러고는 사창가의 매춘부에게 자신의 왼쪽 귀 조각을 건넸다. 고흐는 매춘부의 신고를 받고 도착한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아를의 주민들은 고흐를 ‘미친 네덜란드 사내’라고 하며 그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강요했다. 이런 일이 생기자 고갱은 말없이 창작촌을 떠났다. 이후 고흐는 1889년 5월 8일, 프로방스 지방의 생레미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그 후 고흐의 생활은 발작과 열정적 작품활동의 연속이었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1년간 치료를 받는 동안 되풀이되는 발작에 시달리다가도 정신이 돌아오면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림을 그려댔다. 이 시기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었다. 그 결과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 《삼나무 (Cypresses)》, 《올리브 나무 (Olive Trees)》등이 만들어졌다.

‘별이 빛나는 밤’, 캔버스에 유채, 73.7×92.1cm.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 <사진=이철환>

특히 《별이 빛나는 밤》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가 그린 밤하늘에서는 구름과 대기, 별빛과 달빛이 폭발하고 있다. 하늘은 굽이치는 두꺼운 붓놀림으로 불꽃같은 사이프러스와 연결되고, 그 아래의 마을은 대조적으로 평온하고 고요하다. 이 작품이 사람들에게 주는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기에 결국 노래로도 만들어지게 된다.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 did not know how
Perhaps they'll listen now
Stary, Stary night

이젠 깨달았어요
당신이 나에게 뭘 말하려고 했었는지
얼마나 영혼이 아팠는지
얼마나 그들로부터 자유를 갈망했는지
그들은 어떻게 듣는지도 모른 채, 들으려 하지 않았죠
지금은 아마 귀를 기울일 거예요
별들이 빛나는 밤에

연속된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친 고흐는 1890년 5월,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는 오랜 친구이자 의사인 가셰가 있는 곳이었다. 친구의 정성어린 치료 덕분에 한때 건강이 회복되어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했으나 다시 심신이 쇠약해지게 된다. 그러나 고흐는 여기서 머문 70여일의 짧은 기간 동안 무려 77점에 달하는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기게 된다.
그즈음 또 하나의 명작인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완성된다.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병원 옆의 들판으로 걸어 나간 뒤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다.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총상은 치명적이었다.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간 이틀 뒤,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리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동생 테오 또한 죽음을 맞게 된다. 처음에는 다른 곳에 있던 테오의 시신은 나중에 형 고흐가 묻혀 있는 오베르의 묘지로 이장된다. 이로서 두 형제는 죽어서도 나란히 함께하게 된 것이다.

이철환 객원 편집위원 mofelee@hanmail.net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장, 전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문화와 경제의 행복한 만남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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