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영란 편집위원 = 맑고 정감어린 채색화로 국내외에서 많은 사랑을 받아온 화가 김인옥이 5년 만에 개인전을 갖는다. 김인옥은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의 류미재(流美齋) 갤러리에서 지난달 초대전을 개막했다. 류미재갤러리는 양평 남한강변의 복합문화공간 봄파머스가든 내에 위치한 화랑으로, 김인옥은 이 곳에서 지난 2014년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이번 작품전에 김인옥은 3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양평군 강하면 항금리의 전원풍경을 그린 '기다림' '항금리 가는 길' 시리즈 등 총 20점을 내걸었다. 출품작들은 평온하고 목가적인 도시 근교의 자연을 담은 풍경화들이다. 또 고즈넉한 전원에 살며 느끼는 일상을 일기처럼 담은 회화도 나왔다.
김인옥의 풍경화는 눈 앞에 펼쳐진 자연을 그대로 그린 게 아니다. 풍경화이긴 하되 마음 속에 새겨진 풍경을 그렸다는 점에서 그만의 독자성을 지닌다. 때문에 그의 회화는 구상과 추상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현실과 초현실을 가뿐히 오간다. 어느 한 곳에 얽매이지 않고 대상을 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그린 김인옥의 회화는 '심상의 풍경화'에 가깝다.
우리 앞의 풍경을 정형화된 방식으로 리얼하게 묘사한 풍경화는 많지만, 김인옥처럼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풍경을 자유분방하게 표현한 회화는 흔치 않다. 그의 그림에선 대상을 함축하거나 변형하고, 생략하는 시도가 무시로 일어난다. 그래서 김인옥의 작품 앞에 서면 많은 궁금증을 품게 된다. 도대체 나무들은 왜 하늘을 붕붕 날고 있을까, 꽃들은 왜 점으로만 묘사됐을까 하고. 그리곤 작가가 구현한 조형의 세계로 스르르 빨려들게 된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 김인옥 <항금리 가는 길,15-123>, 130x162cm, 한지 위에 채색, 2015. [사진=류미재 갤러리] art29@newspim.com |
탐스런 녹색잎을 가득 품은 미루나무들이 도열하듯 하늘로 뻗은 '항금리 가는 길'이 그렇다. 무성하다 못해 터질 것같은 몸체에 비해 나무들의 기둥은 더없이 가늘다. 잔가지들도 찾아볼 수 없다. 매스 덩어리처럼 집단을 이룬 나무들 아래로는 노란 꽃이 지천으로 피어 마치 꽃양탄자를 깔아놓은 듯하다. 석양 하늘에는 눈썹 모양의 구름이 무심히 떠다닌다. 장욱진의 나무 그림과는 또다른, 초현실적 분위기가 물씬 감도는 색다른 풍경화다. 낙원이 있다면 저런 풍경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 김인옥 <기다림 9-101>, 60.5x73cm, 한지 위에 채색, 2019. [사진=류미재 갤러리] art29@newspim.com |
은빛 물뿌리개 위에 솜사탕처럼 가뿐한 동그란 나무들이 가득 담긴 '기다림'이란 작품에선 작가의 위트가 느껴진다. 나무란 것이 한번 자리를 잡으면 꼼짝달싹할 수 없이 그 자리를 지켜야 하지만 작가는 그 나무를 민들레홀씨처럼 가볍게 표현해 공중을 마음껏 유영하게 만들었다. 솜사탕마냥 가벼워진 핑크빛 나무는 김인옥이 아니고선 나올 수 없는 지구상 유일한 나무일 것이다. 아니, 보는 사람에 따라선 그냥 솜사탕으로 여겨도 무방하다. 작가는 그저 나무에 자유와 해방을 부여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림이니까 가능한 낭만적인 발상이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 김인옥 <항금리 가는 길-푸른 산 14-102>,100x200cm, 한지 위에 채색, 2014. [사진=류미재 갤러리] art29@newspim.com |
이번 전시에 출품된 김인옥의 연작 중 조금 색다르고, 묵직한 작품인 '푸른 산'의 모티프는 중국 여행길에서 비롯됐다. 베이징하계올림픽을 앞두고 베이징에 체류하며 작업도 하고, 전시기획도 하던 작가는 베이징 도심에서 자동차로 세 시간여 걸리는 명대에 조성된 찬디샤라는 산간 오지마을을 찾았다가 압도당한 적이 있다. 외세의 침입을 피해 주민들이 산간벽지로 집단이주해 만든 마을에서 무언가 형언키 어려운 절실함을 느낀 것이다. 오지 중의 오지였던 그 산간마을의 겹겹이 쌓인 산과 계곡 위 주민들의 집터를 보며 짙푸른 석채의 장엄한 파노라마 풍경이 탄생하게 됐다.
이후 푸른 산 시리즈는 밝고 경쾌했던 기존 김인옥의 연작과는 달리 오로지 산과 산이 중첩되는 가운데 짙푸른 심연 속으로 빨려들어갈 듯한 깊이감을 선사한다. 자세히 뜯어보면 찬디샤 주민들의 작은 집이 둥근 산 위에 살짝 얹혀져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산들은 도도하고, 고즈넉하다. 채색화만이 줄 수 있는 청량감과 격조, 완성도를 이 연작은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김인옥도 대상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하고, 또 관찰한다. 하지만 그의 화폭에 구현된 그림은 자신의 눈으로 감지한 대상을 자유자재로 형상화해 낭만과 즐거움이 흘러넘친다. 대학시절 동양화를 전공한 탓에 고전으로 전해지는 전통서화를 무수히 임모하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스케치한 뒤 그 선 속에 색을 입히는 작업을 그 역시 오랜 기간 수련했다. 출중한 데생실력 때문에 그 과정에서 교수진으로부터 찬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김인옥은 답답했다.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기 보다는 마음이 가닿는대로, 물 흐르듯 그리고 싶었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 김인옥 <기다림(브로콜리)>. 91x73cm, 한지 위에 채색. 2019. [사진=류미재 갤러리] art29@newspim.com |
자연이며 물체를 그 누구보다 리얼하게 묘사할 자신은 있지만 나만의 조형세계를 다져가고 싶었던 것이다. 이후 현실을 초월해 마음 속의 이상향을 현대적인 어법으로 구현하기 위해 여러 모색과 실험을 거듭했다. 그 결과 함축과 생략, 변용과 차용을 끝없이 시도하게 되었고, 미술대전에 출품해 특선도 수상했다. 차분하면서도 평온한 서정과 자유로움을 선사하는 김인옥의 그림은 한국은 물론 중국과 미국에서도 호응이 높다. 특히 중국에서는 맑고 깊은 색채와 완벽한 미감을 구현한 완성도가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최근들어서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것들을 화폭에 커다랗게 구현하는 작업도 시도 중이다. 싱싱한 브로콜리를 한 그루의 튼실한 나무처럼 표현한 작품 등에선 신선한 발상이 느껴진다. 작가의 눈에 포착되면 무엇이든 차용과 전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김인옥은 한지를 세번 겹친 삼합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 두꺼운 한지에 아교에 석채와 분채, 호분을 섞어가며 채색작업을 한다. 채색작업이 늘 그렇듯 섬세한 공력과 오랜 시간을 투입해야만 비로소 한 점의 작품이 완성된다. 때로 한지 위에 먹으로 번지는 발묵효과를 낸 뒤 그 위에 채색으로 오브제들을 과감하게 올리는 작업도 시도한다. 르네 마그리트, 마르셸 뒤샹이 시도했던 것처럼 초현실적인 회화가 발묵과 채색을 통해 구현돼 흥미롭다. 제한된 재료를 갖고 다양한 조형성을 추구한다는 점이 돋보인다.
김인옥이 데뷔 이래 40년 넘게 나무, 꽃, 산을 즐겨 그리게 된 것은 어린 시절 금강변에 살며 아름다운 자연을 원없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의 뇌리에 지금도 강렬하게 각인돼 있는 강변의 무성했던 미루나무 군락, 금강 위로 반짝이던 햇살, 가을마다 노랗게 붉게 물들던 단풍, 겨울 눈내린 강가가 오늘도 여전히 그로 하여금 자연에 몰입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김인옥은 "부모님을 따라 충남 강경으로 이사해 5세 무렵부터 3년을 살았다. 그 때 강변에 도열하듯 심어져 있던 커다란 미루나무들이 지금도 눈 앞에 펼쳐지듯 생생하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어린 내게 선사했던 싱그러움과 풍성함은 너무도 압도적이었다. 그 때문에 나뭇가지 하나하나를 세세히 그리기 보다 타원형의 덩어리로 표현하고 있다. 또 나뭇잎도 녹색 뿐 아니라 주황, 주홍, 분홍, 흰색까지 자유롭게 넘나들게 되었다. 갑갑한 나무에게 해방의 자유를 선물하고 싶어 분홍색 솜사탕처럼, 민들레 홀씨처럼 하늘을 나는 형상으로도 그리고 있다"고 밝혔다.
프랑스 미술평론가 장 루이 쁘와뜨벵은 "김인옥의 작품은 자연으로 열린 창문처럼 나타나 있다.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 이는 이상적인 세계를 나타내는 꿈같은 세상이다. 동시에 김인옥은 우리를 낯설고 특이한 공간에 들어오게 한다"고 평했다.
김인옥의 가족은 예술가 가족이다. 남편인 김강용은 모래와 물감으로 벽돌을 그리는 '벽돌화가'이자 개념미술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딸인 김재원 또한 6번의 개인전을 가진 화가다. 세 사람은 모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동문이기도 하다.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일정한 고정수입 없이 작업과 전시를 통해 생계를 꾸려가는 이들 예술가족에게도 빨간 경고등을 켜지게 했다. 오는 9월 성곡미술관 전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질 김강용도, 자택 근처 화랑에서 개인전을 막 개막한 김인옥도 힘든 시기를 통과 중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오늘도 화폭 앞에 앉아 묵묵히 작업을 이어간다. 잔인한 4월이 지나고, 나뭇잎이 더욱 푸르러지면 그들의 작업 또한 깊어질 것이다. 현실은 암울해도 진심은 언젠간 통하리라 믿기에 작가들은 붓을 놓지 못한다. 김인옥은 "전시가 열리는 류미재갤러리 앞마당에 올해도 튤립이 화사하게 피었고, 유채꽃도 눈부시다. 뜻밖에도 많은 이들이 전시장을 찾아 차분히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며 "험난한 상황이 계속되더라도 대다수 작가들은 감내해낼 것이다. 왜냐면 수월했던 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작업만 술술 잘 된다면 바랄 것이 없다. 나 역시 매혹적인 자연을 더욱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고 토로했다. 김인옥의 개인전은 6월 17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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