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사실주의 선구자' 고영훈 "나만의 도자기를 붓으로 빚어낸다"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이것은 달항아리다.' 실재인지 환영인지 헷갈리는 캔버스 위에 그려진 달항아리는 작가의 붓끝에서 완성됐다. 달항아리의 은은한 백색과 귀품, 자연스러운 굴곡까지 어느 하나 실재와 다름이 없다. 흙이 아닌 작가의 붓으로 빚어낸 이 도자기 회화는 '극사실주의의 선구자'인 고영훈 작가의 작품이다.
고영훈(70) 작가는 개인전 '관조(觀照):Contemption'을 가나아트 나인원과 가나아트 사운즈에서 15일부터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2014년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 이후 7년 만이라 기대감이 높다.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기·기 器·氣 Vessel·Energy, 2021, Acrylic on plaster and canvas, 110.5 x 95 cm [사진=가나아트] 2021.04.14 89hklee@newspim.com |
전시는 그의 후기 시대를 대표하는 도자를 주제로 한 회화로 구성되며, 개인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신작 회화 18점을 공개한다. 분청사기부터 달항아리에 이르기까지 어느덧 후기 시대에 접어든 작가의 원숙함을 감상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고영훈 작가는 단색화를 중심으로 추상 화풍이 주를 이뤘던 1970년대 중후분에 등장한 극사실주의 회화 장르에 있어 선구자적 입지를 갖고 있다. 그는 1970년대 초반부터 군화, 청바지, 코트, 코카콜라 등 일상적인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대중 소비사회를 상징하는 소재인 코카콜라나 노동자 계층을 연상시키는 구겨진 군화는 당대의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준 작품이었다.
고 작가의 미술 철학을 보여준 시기도 1970년대다. 197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앙데팡당(Indépendant)' 전에서 'This is a Stone 7411'(1974)를 출품하며 일대기적 전환을 맞는다. 이는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이미지의 배반'(1929) 아래에 쓰인 문구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정면으로 반박한 작품으로 사실적인 이미지를 그리고 이를 '돌'이라고 지칭했다. 사실적인 묘사는 대상의 재현일뿐 실재일 수 없다는 마그리트의 대전제에 대한 반박이었던 셈이다.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Yesterday, Today, and Tomorrow, 2021, Acrylic on plaster and canvas, 132.5 x 18cm [사진=가나아트] 2021.04.14 89hklee@newspim.com |
이처럼 고영훈 작가는 실재라는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을 자업의 화두로 삼아 작업해왔고 그에게 극사실적인 묘사는 환영의 극한에 다다르기 위한 수단이었다.
고영훈의 도자 회화는 그의 후기 시대를 점철하고 있는 주제로 책의 페이지를 배경으로 했던 이전 시리즈와는 달리 흰 배경에 오브제와 그 그림자만을 그려 넣어 마치 부유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처음으로 달항아리를 그린 '생명-달항아리'(2002)를 기점으로 그는 어언 20여년 가까이 도자를 지속적으로 탐구해오고 있다. 그는 "화면 속 도자는 실재의 재현이 아니다"라며 "나는 그 소재를 통해 허구의 도자기를 그리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도자기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즉, 도자 회화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담으려는 작가의 시도다.
[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만월 滿月 Full Moon, 2020, Acrylic on plaster and canvas, 152 x 130 cm [사진=가나아트] 2021.04.14 89hklee@newspim.com |
이번 전시에 출품된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2021)은 한 화면에 세 개의 달항아리를 중첩적으로 그려 시간과 공간을 통해 실존하는 사물의 실재, 즉 이데아적 본질을 포착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그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달항아리의 모습을 상상에 의존해 그려내기에 이른다. 이러한 프로세스를 통해 그려진 '만월'(2020)은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고영훈의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먼 옛날 도공이 자신만의 도자기를 빚었듯, 지금 나도 나만의 도자기를 붓으로 빚어낸다"라는 그의 말처럼 이제 그는 재현을 넘어서 실재를 그려내고 있다. 전시는 5월 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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