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오영상 기자 = "세계화는 끝났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 문장은 국제 뉴스의 상투어가 됐다. 보호무역, 공급망 재편, 경제 블록화. 표면만 보면 세계는 분명 갈라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질문을 조금 바꿔볼 필요가 있다. 정말 무너지고 있는 건 세계화 그 자체일까.
숫자만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세계무역기구(WTO)에 따르면 글로벌 교역 규모는 팬데믹과 전쟁에도 불구하고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다. 기업들은 여전히 국경을 넘고, 자본과 기술의 이동도 멈추지 않았다. '탈세계화'라는 진단은 체감과 달리 아직 통계로는 명확히 증명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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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세계화가 흔들린다는 인식이 강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신뢰'에 있다. 국경을 넘는 거래와 협력은 효율 이전에 신뢰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 신뢰가 빠르게 마모되고 있다. 러시아의 에너지 공급은 정치적 무기가 되었고, 반도체와 배터리는 안보 자산으로 재분류됐다. 경제는 더 이상 중립적 공간이 아니다.
미중 갈등은 이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은 '디리스킹'을 말하지만, 중국을 배제한 공급망 구축은 사실상 새로운 진영화를 의미한다. 중국 역시 자급자족과 기술 독립을 앞세워 대응한다. 양측 모두 "안보를 위한 선택"이라 설명하지만, 그 결과는 상호 불신의 고착이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태도는 서방의 기대와 어긋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미중 경쟁에서도 이들은 명확한 편을 들지 않는다. 도덕적 무감각이 아니라, 신뢰의 기억이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의 약속이 번번이 깨졌던 경험은 '규범'보다 '거리 두기'를 합리적 선택으로 만든다.
결국 지금의 세계는 탈세계화라기보다 '저신뢰 세계화'에 가깝다. 거래는 계속되지만, 언제든 끊길 수 있다는 전제가 붙는다. 효율 대신 안전이, 최적화 대신 중복이 선택된다. 비용은 늘고, 성장의 속도는 느려진다.
한국처럼 수출과 기술에 생존이 걸린 중간 국가에 이 변화는 특히 가혹하다.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 수도,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관리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세계화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가 무너진 세계에서 어떻게 리스크를 분산하고 입지를 확보할 것인가다.
세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예전처럼 순진하지도 않다. 지금 무너지고 있는 것은 연결의 구조가 아니라, 그 연결을 가능하게 했던 믿음이다. 그리고 신뢰가 없는 세계화는, 이전과 전혀 다른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
goldendog@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