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 르빠주 자전적 이야기 기반한 1인극
어린시절 개인사부터 퀘벡 근대사까지 담아
혁신적 기술 및 소품 활용…동화같은 분위기
[서울=뉴스핌] 황수정 기자 = "'887'은 제게 소문자 h로 된 역사(history)를 탐구함으로써 대문자 H로 된 역사(History)를 더욱 잘 이해하고자 하는 겸손한 시도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이렇게 몰입해서 들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를 통해 잘 몰랐던 캐나다 퀘백의 정치적, 사회적 역사까지 접하게 된다. 로베르 르빠주의 말대로 '887'은 그렇게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집단의 역사까지 확장된다. 그의 생생한 기억의 여정은 개인과 집단 기억의 차이, 기억의 불완전성과 함께 기억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로베르 르빠주 '887' [사진=LG아트센터] |
공연은 로베르 르빠주 혼자 무대에 오르는 1인극이다. 배우이자 극작가, 연출가, 영화감독 등 다재다능하게 활동해온 로베르 르빠주를 국내 무대 위에서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그간 '달의 저편' '안데르센 프로젝트' '바늘과 아편' 등 다양한 작품이 국내에 공연됐지만 연출가로서 모습만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887'은 더욱 놓칠 수 없는 기회다.
'887'은 로베르 르빠주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의 주소다. 그만큼 작품은 그의 자전적 이야기로 가득하다. '시의 밤' 40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은 로베르 르빠주가 미쉘 라롱드의 시 '스피크 화이트(Speak White)'를 외워 낭송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수월할 것 같았던 암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자 고대 그리스로부터 내려오는 기억법 '기억의 궁전'을 활용한다. 자신이 어린 시절 살았던 '퀘벡 시티 머레이가 887번지'를 기억의 궁전으로 삼으며 과거를 더듬어보는 과정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로베르 르빠주 '887' [사진=LG아트센터] |
그가 기억하는 치매를 앓았던 할머니, 택시를 운전했던 아버지, 각양각색 이웃들의 이야기를 통해 1967년 몬트리올 엑스포부터 퀘벡해방전선(FLQ)의 테러 등 당시 퀘벡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평범한 일상 속 역사의 현장이 어떻게 기억되는지, 개개인 혹은 정치 사회적 이해관계를 통해 다르게 기억되는 양상도 드러난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정말 옳은지, 우리는 어떻게 기억을 마주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되묻는다.
극중 '스피크 화이트'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다. 영어와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이 섞여사는 퀘벡은, 과거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상류층과 사회지도층 주류를 형성했다. 그들은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을 경멸하며 '스피크 화이트'라 말했고, 이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시인 미셸 라롱드가 동명의 시를 발표했다. 공연 내내 켜켜이 쌓여간 그의 감정은 극 말미 '스피크 화이트' 낭독을 통해 정점을 찍는다.
로베르 르빠주 '887' [사진=LG아트센터] |
혁신적인 테크놀로지를 전통 연극에 도입해 공고한 영역을 구축한 로베르 르빠주답게, 이번 무대 역시 눈을 뗄 수 없다. 영상을 비추는 스크린인 줄 알았던 네모난 박스는 열리고 닫히면서 다양한 시공간을 창출한다. 로베르 르빠주가 어린 시절 살았던 아파트가 되고, 현재 살고 있는 집의 부엌이 되고, 과거 곳곳의 역사적 장소가 되면서 한편의 동화를 보는 듯한 미장센을 완성한다. 관객은 흡사 로베르 르빠주의 기억 속에 들어가 구경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뿐만 아니다. 단순한 공간의 이동을 넘어, 미니어처와 소형 카메라를 활용한 색다른 연출이 감탄을 자아낸다. 천과 빛, 그림자를 이용한 연출 또한 적재적소에 활용된다. 기본적으로 로베르 르빠주의 다층적인 스토리텔링이 탄탄하게 받치고 있지만, 1인극이라는 한계를 그만의 독보적인 연출로 타파한 것. 덕분에 무대는 잠시도 지루할 틈 없이 객석을 빨아들인다.
로베르 르빠주 '887' [사진=LG아트센터] |
로베르 르빠주의 '887'은 오는 6월 2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hsj1211@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