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봄비를 부르는 목소리, 이은하와 채은옥을 듣는 시간
[서울 = 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비는 추억이다. 유독 '비 오는 날'의 기억들은 오래 지워지지 않는다. 우산을 같이 썼던 기억, 함께 비를 맞았던 순간, 비 오는 날 마시던 막걸리와 물난리가 났던 기억까지. 밤새 창문을 때리던 거센 빗줄기와 빗물에 씻겨간 잡념들. 비는 마음의 문신(文身)이다.

그중에서도 봄비는 유난하다. 생각할 때마다 마음을 뒤흔드는 첫사랑을 닮았다. 여름날의 폭우나 스산한 가을비도 아닌 순하디 순한 비, 봄비다.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 박용래 '그 봄비'.
산문집 '호박잎에 모이는 빗소리'를 펴내기도 했던 시인은 '맑은 날보다 비 오는 날이 좋았다. 비 오는 날보다 눈 오는 날이 더 좋았다. 과거는 모두가 아름답고 허망하였다'라고 썼다. 그렇다. 시인의 말처럼 봄비는 허망하다. '화무십일홍'의 희고 붉은 꽃들이 밤새 내린 봄비에 속절없이 진다. 아스팔트 위를 수놓은 꽃잎들을 보면 문득 우리네 삶도 춘몽임을 느낀다.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고정희 '봄비' 일부.
두보(杜甫)는 '춘야희우'(春夜喜雨)에서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리나니(好雨知時節)/ 봄이 되니 만물을 움트게 하네(當春乃發生)'라고 노래했다. 봄비는 '좋은 비'다. 열흘 붉은 꽃을 속절없이 지게 하지만 대신 초록을 불러온다. 고려시대 정지상(鄭知常)은 '송인'(送人)에서 '비 갠 강둑엔 풀빛이 푸르고(雨歇長堤草色多)/ 낭군을 보내는 남포엔 슬픈 노래가 퍼지네(送君南浦動悲歌)'라고 썼다. 이수복의 시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봄비' 일부)와 일맥상통한다.
봄비는 사랑을 부른다. 록그룹 애드 훠(ADD 4)는 '빗속의 여인'(1964년)에서 '노오란 레인코트에 / 검은 눈동자'를 가진 '다정하게 미소 지며 / 검은 우산을 받쳐주던' 여인을 잊지 못한다고 노래했다. 스물두 살 신중현의 마음을 흔들던 여인도 분명 봄비 속에서 만났으리라. 천재 싱어송라이터 송창식도 비와 여인을 사랑했다. '창밖에는 비 오고요 바람 불고요 / 그대의 귀여운 얼굴이 날 보고 있네요'(창밖에는 비 오고요)라고 노래하는가 하면 '언제부터 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까 / 언제부터 내가 이 빗속에 서 있었을까'(비와 나)라고 노래한다.

이장희도 '내려라 밤비야/ 내 님 오시게 내려라/ 주룩주룩 끝없이 내려라'(비의 나그네)라고 썼다. 당시 동아방송에서 DJ였던 이장희는 호우주의보가 내린 날에 이 노래를 선곡했다가 담당 PD와 함께 시말서를 썼다는 일화가 있다. 그래도 봄비가 온다면 채은옥의 '빗물'이나 이은하의 '봄비'를 빼놓을 수 없다. 온통 마음을 뒤흔드는 목소리를 가졌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오는 비. 그래서 봄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