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기반의 애나 박 'Good Girl' 타이틀로 첫 한국전
흑백의 대형회화 14점 리안갤러리 대구에 출품
여성을 규정짓는 시각에 도전한 강렬한 작업
[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재미교포 작가 애나 박(Anna Park·29)이 대구광역시 대봉동의 리안갤러리(대표 안혜령)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개막했다.
구상과 추상,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들며 복잡한 현대인의 심리를 스펙타클한 화면 속에 표현하는 애나 박은 작가로 데뷔하자마자 작업이 큰 화제를 모으며 글로벌 아트씬에서 주목받고 있는 작가다. 그가 'Good Girl'이란 타이틀로 오는 6월 28일까지 갖는 이번 전시는 미국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작가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대구에서 여는 첫 귀국전이란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애나 박은 세상이 원하고 바라보는 '여성'이라는 관념과 이미지를 격렬하면서도 세련되게 뒤흔든 대형 신작 14점을 출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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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애나 박의 'Good Girl'전에 출품된 작품. [이미지 제공=리안갤러리 대구] 2025.05.10 art29@newspim.com |
애나 박은 두툼한 나무패널에 종이를 입인 후 목탄과 검은 잉크로 작업한다. 이에 화면에는 오직 흑백의 색채만 펼쳐지는데 이를 통해 복잡한 현대인의 감정 및 심리를 묵직하면서도 깊이있게 드러낸다. 색채 대신 현대의 광고나 소셜미디어 속 강렬한 인물과 볼드한 텍스트가 추상적인 배경과 어우러진 것이 특징이다.
애나 박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19년 현대 팝아트의 거장 카우스(KAWS)가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면서 자신의 SNS에 찬사를 올린 것이 뉴욕 아트씬에서 화제가 되면서부터다. 이듬해 작가는 데이빗 핀처 감독의 영화 '맹크(Mank)'의 포스터 제작에 참여했고, 대학 졸업 1년 만인 2021년 뉴욕 하프갤러리 개인전과 블룸앤포갤러리(현 블룸갤러리) 도쿄 개인전에서 출품작이 솔드아웃되면서 미술시장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여기에 세계적인 팝가수 빌리 아일리시가 소장한 작품이 앨범 특별판 커버를 장식하는 이슈까지 더해지며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애나 박은 이어 사바나 SCAD미술관(2022년)과 호주 퍼스의 서호주미술관(2024년)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유수의 미술관들이 잇따라 작품을 소장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광폭 성장을 입증해주고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족과 함께 미국 유타주로 이민을 떠난 애나 박은 유년기 때부터 늘 혼자 그림 그리는 것에 빠져 지냈다. 동양인은 찾아보기 힘든 유타주 솔트레이크 인근의 작은 도시에서 자란 그는 성장기 내내 아시아 출신의 마이너리티로써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더욱 그림작업에 몰두하게 됐다. 미술로 진로를 결정한 이후에 만난 목탄(차콜)은 어린 시절부터 드로잉을 즐긴 그녀에게 뗄레야 뗄 수 없는 매체가 되었고, 순간적으로 기억을 남기듯 스며드는 목탄의 특성에 매료된 작가는 이를 메인 재료로 지금까지 꾸준히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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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 애나 박(Anna Park) Come Again 2025. 종이를 입힌 우드패널에 차콜, 잉크, 물감. 178 x 213x12cm [이미지 제공=리안갤러리 대구] 2025.05.10 art29@newspim.com |
엄청난 작업량과 폭발하는 듯한 에너지를 보여주는 작가는 소셜미디어와 디지털 이미지로 가득찬 현대사회의 삶 속에서 정체성, 성, 그리고 권력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인식을 다루고 있다. 이같은 사회문화적 시각이 동양 출신의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여성을 범주화하는 여성성의 표현적 측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지속적으로 탐구해왔다.
애나 박의 작품은 목탄이라는 재료로 인해 단순한 색채를 보여주지만 유화처럼 강렬한 존재감을 지녔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 광고 속 여성인물같은 구상적 표현과는 별개로, 격렬하게 파도치는 듯한 추상적 이미지가 혼재해 그의 작품에 빠져들게 하는 흡입력을 지니고 있다.
데뷔 초 선보인 초기작은 주로 인물화, 군상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흑백의 극명한 대비가 두드러진다.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목탄 특유의 뭉개진 효과와 속도감 있는 표현이 주를 이룬다.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뒤엉킨 형상들, 비틀린 각도와 속도감은 감정적 표현을 극대화시키고, 인물의 움직임을 추상적으로 분해해 정적인 캔버스 위에 동적인 운동감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는 마치 현대인의 응축된 불안과 공포가 극적으로 폭파하듯 시너지 효과로 나타난다.
미술비평가 유진상 계원예술대학교 교수는 "초기 애나 박의 작업은 어찌보면 매우 비극적이다. 20대인 작가가 이렇듯 비극적인 세계관을 견지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면서도 현대 세대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를 생각하면 작가의 세계관에 수긍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이어 "코로나 발발 전·후로 작품 스타일이 크게 변화했는데, 급진적으로 대상의 운동궤적의 중첩과 파열로 이뤄진 곡선들로 추상화된 화면이 혼란스러웠다면 코로나 완화 이후 영화나 광고에서 차용한 듯한 정형화된 여성들의 신체가 관음증과 물신화의 성적 기호로 단순화되거나 반복되며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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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애나 박의 'Good Girl'전에 출품된 작품. [이미지 제공=리안갤러리 대구] 2025.05.10 art29@newspim.com |
애나 박의 최근작은 우드패널 위에 텍스트와 프레임이 레이어로 겹치며 보다 입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작가는 2023년 뉴욕 MoMA에서 개최된 '애드 루샤 작품전'의 텍스트 작업에서 영향을 받아 다양한 문자를 이전 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텍스트는 대부분 광고, 영화 속 문귀이거나 휴대폰 메모 앱에 저장해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발췌한 것이다. 작가는 추상적으로 뒤엉킨 배경 속에, 텍스트와 인물이 프레임 형식의 삽화처럼 대비되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삽입된 프레임과 텍스트는 격렬하게 아우성치는 화폭의 표면을 분리하기도 하고, 문장의 서사로 작품의 맥락을 바꾸기도 한다.
이번 한국전시에 나온 'Good girl' 연작은 모두 2025년 최신작이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온 여성성의 개념과 현대여성으로써 사회적 기대에 부합해야 하는 압박감에 대한 작가의 경험과 이해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범람하는 소셜미디어와 광고에서 흔히 묘사되는 정형화된 이미지를 발췌한 듯하지만 작가에 의해 재해석되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
가로 세로 2~4m에 달하는 압도적 스케일의 작품들로 리안갤러리 전시장을 채운 작가는 "어린 시절 떠난 고향(대구)의 이렇게 크고 멋진 공간에서 개인전을 열게 될 줄은 몰랐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만큼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전시 타이틀을 'Good Girl'이라 한 것은 작금의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은 아름답고 날씬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 싶어서 역설적으로 붙여본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단선적인 측면만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렇다면 작가 자신은 'Good Girl'이냐는 질문에는 "매일 달라진다. 어떤 때는 'Good Girl'이다가도, 어떤 때는 그 정반대이기도 하다. 매순간 변하는 게 나 자신이다"라며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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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이영란 미술전문기자=애나 박의 'Good Girl'전에 출품된 작품. [이미지 제공=리안갤러리 대구] 2025.05.10 art29@newspim.com |
2023년부터 에나박은 이전의 회화적 경향들을 모두 통합해 새로운 작업을 전개 하고 있다. 특히 액자구조의 등장이 돋보인디. 배경의 반추상적, 추상적 표현은 여전하지만 화면의 중심에 창문같은 액자를 만들고 인물을 병치시켜 그림 속 그림처럼 소화하고 있다. 텍스트, 즉 문장이 개입하는 것도 시선을 끌며 매우 도드라진다. 이처럼 화면을 사각형으로 잘라내 창문처럼 만들고, 그 뒤에 새로운 레이어를 덧대 입체적 구조로 구현한 신작은 세련되면서도 다채로운 레이어를 선사해 주목된다. 이 액자 형식의 또다른 조형적 시도는 애나 박의 역량을 다시금 보여주고 있다.
미술평론가 유진상 교수는 "애나 박의 작품들은 작가 자신이 속한 사회,시대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와 방법론은 오직 작가 자신에게 속한 독자적이라는 것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이제 29세인 에나박의 작품세계는 불과 10년도 안되는 시간 동안 구축한 회화적 서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깊이있고 정교한 예술적 구조물을 구축하고 있다"고 평했다.
이어 "목탄을 중심으로 사용하는 독특한 흑백의 계조들로 화면을 구성하는 작가의 기술적 탁월함과 원숙함은 비슷한 연배에 독창적인 방법론과 작품세계를 완성시켰던 에곤 쉴레나 장 미쉘 바스키아를 떠올리게 한다"며 "이 작가를 언급하며 20세기 미술사의 수많은 주요 작가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에나 박이 얼마나 확고한 개인적 연구와 비전을 갖고 작업에 하는 지를 보여준다. 바로 이 점이 그의 작품세계가 매우 다양한 이슈와 담론. 그리고 확고한 기반을 갖고 주류미술사 안에서 독재적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지 예상 하게 하는 부분"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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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리안갤러리 대구의 애나 박 개인전 전시 전경. [사진=이영란 미술전문기자] 2025.05.10 art29@newspim.com |
어린 시절 애니메이션 작가를 꿈꿨던 애나 박은 앞으로는 회화 뿐 아니라 조각,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장르로 작업을 넓히고 싶다고 밝혔다. 여러 매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자신만의 주제와 조형기법을 폭넓게 변주하는 게 향후 목표라는 것이다.
애나 박은 "화면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패션 광고나 미디어, 소셜미디어 속 '이상화된 여성' 이미지를 인용했지만, 내 작품 속 여성들은 고정관념을 벗어나 주체로 전환되는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며 "예전에는 그로데스크한 분위기의 시니컬한 작업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디지털 시대의 거대한 사회 흐름 속 여성의 삶과 사고를 성찰하는게 흥미롭다"고 밝혔다. 목탄의 부드럽고 힘차게 뻗어나가는 물성이 좋아 아직은 목탄작업을 고집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흑백이 아니라 컬러 작업도 시도해보겠다고 덧붙였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게 작가의 답이다.
유진상 교수는 "애나 박의 데뷔초기부터 최근작까지 시기별로 주요작품을 살펴봤는데 어마어마한 작업량과 매 시기 변화하는 작업이 대단히 드라마틱했다"며 "초기 그로테스크하고 훼손된 인물상은 마치 왜곡된 인공지능에 의해 그려진 듯 일그러져 있어 격렬한 묵시처럼 다가왔다. 20대 초반의 작가가 이렇듯 비극적인 세계관을 견지한 것이 이채로왔다"고 평했다.
이어 "이후 애나 박의 작업은 초현실주의자 로베르토 마타의 작업을 연상케 했는데 그녀 세대가 직면한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어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를 떠올리는 강렬한 해체적 선들과 변형은 코비드가 발발한 2020년에 이르러 구체적 대상에 대한 지시를 떠나 급진적으로 대상의 운동궤적과 파멸로 나아가 추상회되다 못해 입자화되었다"며 "하지만 최근작들은 이전 경향을 모두 통합해 새로운 액자 구조가 등장했다. 화면을 사각형으로 잘라내 창문처럼 만들고 그 뒤에 레이어를 덧대는 입체적 구조가 신선하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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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위해 대구를 찾은 재미작가 애나 박. [사진=이영란 미술전문기자] 2025.05.10 art29@newspim.com |
◆애나 박 작가는?= 1996년 한국 출생으로 뉴욕 예술아카데미(New York Academy of Art)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뉴욕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는 AXA 아트 프라이즈(2019)에서 수상과 Strokes of Genius 11: Finding Beauty(2019)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호주 퍼스의 서호주 미술관(Art Gallery of Western Australia), 중국 항저우의 BY ART MATTERS, 지브롤터의 포트리스 하우스(Fortress House),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하이 미술관(High Museum of Art),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현대 미술관(Institute of Contemporary Art), 홍콩의 K11 아트 재단(K11 Art Foundation), 텍사스주 휴스턴의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페레즈 미술관(Pérez Art Museum)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