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영란 편집위원= 어두운 전시장에 커다란 돌조각 한 점이 놓였다. 조명을 받아 윤기를 드러내는 검은 상단부와는 달리, 하단부는 투박한 질감의 갈색빛이다. 매끄러운 것과 거친 것, 검은 먹빛과 자연의 흙빛, 태고와 현대가 대비를 이루는 이 작품은 최병훈(69)의 신작 'Afterimage of beginning'이다.
작가 최병훈(69)이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의 조현화랑 초대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전시 타이틀은 '침묵의 자리'. 일체의 군더더기가 생략되고, 장식은 더더구나 없는 미니멀한 조각들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제목이다. 개인전 타이틀에 걸맞게 작가는 너른 갤러리 곳곳에 장중한 돌조각을 딱 한 점씩만 설치했다. 그리하여 이번 작품전은 총 4점으로 꾸며졌다. 욕심을 내도 될 듯하나 절제된 작품들은 단 한점 만으로도 억겁의 세월과 자연의 심오함을 표출하고 있다. 관객은 어둠 속에서 검고 장중한 조각이 선사하는 팽팽한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다.
[서울=뉴스핌]이영란기자=최병훈 'Afterimage of beginning 020_535'. 2020. 현무암. 250x100x64cm.[사진=조현화랑] 2021.6.21 art29@newspim.com |
최병훈은 이번 전시를 앞두고 인도네시아의 현무암을 발견한 것을 큰 충격이라고 했다. 그동안 그는 나무, 돌, 쇳덩이 등 여러 재료를 오가며 '인류의 긴 역사와 삶 속에서 새로운 예술성을 어떻게 드러낼까'를 끈질기게 고민해왔다. 나무에 스테인리스 스틸을 결합하기도 하고, 돌에 나무를 얹기도 했으며 금속과 돌을 어우러지게도 했다. 이를 통해 자연과 인공, 동양과 서양, 과거와 오늘이 교차하는 최병훈식 아트퍼니처(예술가구)와 조각들을 다채롭게 변주해왔다.
그런데 몇 년 전 인도네시아산 바잘트, 즉 현무암을 만나곤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곧바로 그 현무암의 근원지인 인도네시아 화산지대 돌산으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추구해온 명제를 구현할 소재를 확인한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수마트라, 자바 등 전지역이 화산지대로, 400여개의 화산이 분포돼 있다. 아직도 용암이 꿈틀대는 활화산도 78개에 이른다.
최병훈이 접한 현무암은 화산폭발 이후 마그마가 응어리지며 수억 년간 땅 속에 묻혀 있던 화산석이다. 현무암은 본디 흑색이지만 그가 만난 인도네시아 현무암은 표면의 황토마저도 억겁의 시간을 지나며 돌의 일부로 단단히 굳어졌다. 그리하여 겉은 흙빛이지만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면 검디 검은 현무암이 자태를 드러내는 독특한 돌이 된 것이다.
최병훈은 그 커다란 현무암 덩이를 스튜디오로 가져와 오랜 시간 돌을 응시하고 또 응시했다. 그리곤 수억, 수천만년을 지나며 용암과 흙이 한데 엉켜 만들어낸 단단해질대로 단단해지고, 오묘할대로 오묘해진 결을 그대로 살려가며 장중한 조각을 탄생시켰다. 이미 돌 자체가 깊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작가는 최소한의 개입만 하며 가로 2.5~3.5m 길이의 무덤덤하나 매력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작가는 "이번 돌을 다루면서 참 신비로운 경험을 많이 했다. 기나긴 세월을 견뎌내며 높은 경도를 지닌 돌 속에 이렇게 매혹적인 검은 색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에 놀랬다. 하단부는 자연이 빚어낸 자태를 최대한 그대로 살리며 작업했더니 한폭의 산수화처럼 표현됐다"고 밝혔다. 원시시대 라스코 동굴벽화 이후 인류는 수많은 예술을 시도했지만 자연은 더 장엄하고 신비로운 예술을 묵묵히 직조했음을 이번 작업을 통해 깨달았다는 것이다. 결국 시대를 초월한 미감을 최병훈은 이번에 최소한의 개입으로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가장 그답게 빚어낸 셈이다.
[서울=뉴스핌] 이영란기자=최병훈 'Afterimage of beginning 021_542'.2021.현무암. 158x55x47cm. [사진=조현화랑] 2021.6.21 art29@newspim.com |
최병훈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모교 목조형예술과(현 목조형가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국내 아트퍼니처 분야를 앞장서 개척해왔다. 아트퍼니처라는 용어조차 생소했던 1990년대 초반부터 독보적 영역을 구축하며, 국내외에서 20여회의 개인전을 가져왔다. 특히 프랑스 파리의 라파뉘 갤러리는 1996년부터 최근까지 일곱 번이나 작가의 개인전을 개최했고, 뉴욕의 프리드먼 벤다 갤러리 또한 최병훈 초대전을 세차례나 연바 있다. 최근에는 미국의 휴스턴미술관 신관에 그의 작품 '선비의 길' 연작(3점)이 올라퍼 엘리아슨, 아이웨이웨이 등 글로벌 거장들의 작품과 함께 영구설치되기도 했다. 또 세계 최대의 디자인페어인 스위스의 아트바젤 디자인페어 등에도 꾸준히 작품을 출품할만큼 해외에서 그의 작품은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번 작품은 쓰임새보다는 조각 자체로 제작했다. 물론 벤치 형태여서 원하면 얼마든지 앉을 순 있다. 하지만 최병훈은 기능 이전에 하나의 예술적 오브제로서 관객이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그 깊고 묵직한 형상을 음미하길 원하고 있다. 검은 현무암 화석 속에 내재된 세월의 신비로운 결을 사색하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길 소망하고 있는 것. .
조현화랑에서 꼭 10년 만에 다시 개인전을 열며 부산의 예술팬을 만나고 있는 최병훈은 "드러냄의 얕음 보다 내면의 깊이를 찾아가는 길에 나는 자연을 만난다. 그 길은 깊고 멀다"고 했다. 전시는 7월4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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