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영란 편집위원=우윳빛의 뽀얀 캔버스에 검은 물감이 회오리치듯 꺾이며 휘감아 흐른다. 대여섯 번의 활달한 운필은 과감한 여백을 남긴채 화폭에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작가 이강소(78)가 지난해 완성한 '청명'이란 회화다. 지금까지의 회화와 맥을 같이 하면서도 더욱 즉흥적이고, 더욱 간결하며, 더욱 완숙해진 신작이다.
회화, 설치, 퍼포먼스, 사진, 조각을 넘나들면서 동시대 한국미술을 대표해온 작가 이강소가 서울 종로구 삼청로의 갤러리현대(대표 도형태)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몽유(夢遊, From a Dream)'라는 타이틀로 오는 8월 1일까지 열리는 전시에는 1990년대 말부터 2021년까지 완성한 회화 30여 점이 나왔다. 여러 장르를 오가며 실험적, 개념적 작업을 꾸준히 시도했던 작가이지만 이번 개인전은 '화가 이강소'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핵심에 해당되는 회화만 모았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 이강소 작 '청명 18172', 2018, Acrylic on canvas.194x258cm [사진=갤러리현대] 2021.7.7. art29@newspim.com |
이강소의 회화는 획의 그림이다. 크고 길쭉한 동양화 붓에, 물감을 듬뿍 묻혀 마치 일필휘지하듯 그어내린 필선은 힘찬 기운으로 가득차 있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휙휙 바람소리가 날 듯한 운필은 문자 같기도 하고, 추상화 같기도 하다. '시서화(詩書畵)는 하나'라는 동양적 미학을 여실히 보여주면서도, 동시대 감성과도 무리없이 소통하며 현대성과 세계성도 품고 있는 그림이다.
'몽유'라 명명된 이번 이강소의 전시는 작가와 갤러리현대가 함께 하는 네번째 개인전이다. 앞선 전시가 이강소라는 한국 현대미술의 중추적 작가의 실험미술 작품이 우리 미술사에 남긴 의미를 살펴본 자리였다면, '몽유'는 작가의 고유한 예술관과 문제의식이 회화 작품에 어떻게 구현되고, 어떻게 변모했는지 살피는 자리다.
'꿈속에서 놀다'로 해석되는 '몽유(夢遊)'는 이강소의 미학적 세계관을 함축한 단어다. 동시에 그것은 작가가 그림에 담고 싶은 시대적 명제이기도 하다. 그는 물질과 형상, 숫자로 가득찬 작금의 세계가 실은 꿈과 같다고 말한다. 번쩍번쩍 화려하고 압도적일수록 허상처럼 느껴진다는 것.
이강소는 "나에게 이 세계는 엄청난 신비로 가득하다. 동시에 정신차릴 수도 없이 복잡하고 가공스럽다. 만물은 생명을 다해도 그 원소들은 없어지지 않는다. 흩어지더라도 우주의 구조와 함께 알 수 없는 인과의 생멸을 거듭할 것이다"라며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탐구해온 동양철학과 양자역학에 기반한 통찰을 작품에 켜켜이 담아내고 있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스튜디오에서 작품을 응시하는 작가 이강소. [사진=갤러리현대] 2021.7.7. art29@newspim.com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이강소는 데뷔이래 실험적 미술과 퍼포먼스, 비디오작업을 통해 '회화'의 고정화된 개념을 뒤흔드는 실험을 거듭했다. 회화의 지지체인 캔버스천의 실밥을 한 올씩 뽑거나 찢어서 물질로서의 회화와 회화의 평면성을 전복시킨 '무제'(1975) 연작, 자신의 벌거벗은 신체에 물감을 칠한 뒤 광목천으로 물감을 닦아 그 천을 바닥에 펼친 '페인팅(이벤트 77-2)'(1977), 모니터를 활용한 붓질 이벤트 '회화 78-1'(1977) 등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매체인 '회화'라는 양식을 그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며, 허상인 이미지의 실체를 객관화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처럼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붙들고 온갖 실험을 거듭했던 이강소는 뉴욕주립대학에 객원 미술가로 머물던 1985년, 마침내 '그림 그리기'를 본격화했다. 캔버스를 뒤덮는 격렬하면서도 리드미컬한 붓질,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형상, 자연을 은유하는 듯 청색과 녹색을 조합한 그림이 이 시기 탄생했다. 이후 작가는 모노톤의 바탕을 상하 또는 좌우로 나눈 뒤 집, 나룻배 등 건축적 구조물과 추상화된 패턴을 병치시키는 이미지 실험을 이어갔다. 그의 화폭에는 부유하는 새 무리와 뿔 달린 사슴같은 대상이 무채색 배경에 불쑥불쑥 등장하며 특유의 구조가 구현됐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극도로 절제된 최소한의 붓질로 물, 구름, 비, 폭풍 등 자연을 떠올리는 화폭을 제작했다.
2000년대 들어 이강소는 더욱 단순하면서도 역동적인 필획으로 오리, 나룻배 형상을 드러냈고 2010년 중후반부터는 '청명(Serenity)'이라는 제목으로 절제된 추상화 연작을 선보이고 있다. 예측불가능한 운필의 '청명' 연작은 작가의 호흡과 리듬, 몸의 제스처에서 비롯된 격렬한 획과 대담한 여백이 어우러지며 관객에게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작가는 '청명' 연작에 대해 "내가 밝고 맑은 정신상태를 유지하면서 붓질을 했을 때 그것을 보는 관객도 청명한 기운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미술사학자 송희경은 "이강소의 '청명' 연작은 그림, 문자, 시의 공통된 특성인 함축, 여운, 기세가 집약된 시서화일률의 예술"이라고 평했다.
이번 전시는 크게 세 파트로 나눠졌다. 빠른 붓놀림으로 단순한 필획을 표현한 최근의 '청명' 연작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붓과 손, 감정과 정신이 혼연일체를 이룬 상황에서 휘둘러진 다양한 붓질은 화폭에 풍성한 미감을 빚어낸다. 좌에서 우로 화면을 가로지르며 툭툭 내던진 획, 짧고 긴 호흡의 획, 리듬감이 깃든 음악적 획 등 '일획의 미학'을 지닌 이강소의 획들은 옛 선비들의 격조 높은 문인화 전통과 이 새대 회화의 세련된 언어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지하 전시장에 나온 가로 5m의 '허-14012'(2014)는 붓을 든 손의 감각과 호흡에 따라 무심한 듯 그어간 수직 수평의 획들이 아름답게 변주된 작가의 대표작이다.
또 중국의 장강(양쯔강)을 닷새간 여행한 후 그 감흥을 격렬한 필치로 담아낸 '강에서'(1999) 연작도 전시의 한 축을 차지한다. 프랑스 니스의 갈레리데퐁세트에서 처음 발표된 이 연작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는 '기(氣)'의 양상이 유연하면서도 강렬하게 드러나 당시 유럽화단에서 큰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마지막 파트는 이번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채색이 사용된 '청명' 연작이다. 회색, 회청색 등 무채색을 주로 사용해온 이강소는 최근 화폭에 주홍, 연두, 노랑을 등장시키고 푸른 필획을 더했다. "어느 날 불현듯 색들이 내게 다가왔다"는 작가는 다층화된 추상의 밝은 공간을 만들고, 그곳을 노니는 듯한 대상을 가뿐하게 그려넣음으로써 초여름의 상쾌한 바람같은 회화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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