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배우 제이민이 록 뮤지컬 '리지'에서 일상과 부조리에 억눌려있는 이들에게 극도의 해방감과 시원한 쾌감을 전한다.
제이민은 27일 반포동 한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뉴스핌과 인터뷰에서 2020년 초연에 이어 '리지' 재연에 참여하는 소감과 작품 안팎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1892년 8월 4일 미국매사추세츠 주의 폴 리버에서 일어난 미제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뮤지컬은 극중 모두가 억압받고 있는 상황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깨뜨리고 무너뜨리며 관객들의 묵은 감정들을 해소한다.
"초연 때부터 공연을 수십회 했으니 익숙해지긴 했어요. 근데 그 익숙함이 더 긴장되는 거 있죠. 어떤 공연을 하든 재연에서 똑같으면 안된다, 더 발전된 걸 보여드려야 한다, 더 많이 찾아서 좋은 결과를 보여드리고 싶단 부담이 있거든요. 익숙하다고 느낄 때 더 두려워져요. 그럴 때 더 긴장하고 채찍질하게 되는 게 아이러니하죠. 공연이 꼭 학문같아요. 처음부터 100% 완성이라는 게 없고 끝이 없죠. 회차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걸 발견하게 돼요."
[서울=뉴스핌] 황준선 기자 = 뮤지컬 '리지'의 배우 제이민이 27일 서울 서초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2.04.27 hwang@newspim.com |
'리지'는 '헤드윅'으로 인연을 맺은 쇼노트의 제안으로 출연하게 됐다는 제이민. 여자 배우 네 명이 꾸미는 무대라 걱정 아닌 걱정도 있었지만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다. 다들 보고싶어할 것"이라고 답했던 초연 때를 돌아봤다. 실제로 초연 당시부터 어디 숨었다 다들 튀어나왔나 할 정도로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이 이어졌다.
"관객들이 새로움에 목말라하는 게 느껴졌어요. 초연 때 정말 즐겁게 공연했었죠. 한 가지 아쉬웠던 건 커튼콜을 함께 즐기려고 록 콘서트 형식으로 만들어놨는데 코로나가 시작돼서요. 재연 올릴 때 쯤이면 풀리겠지 했는데 쉽지는 않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좀 더 즐겁게 보실까 연출적으로나 무대적으로 보강해서 풀어내기도 했죠. 어떤 장면에서도 지루하게 느끼지 않게끔, 어떻게 다이나믹하게 연기할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했고요. 지금은 '리지'의 10명의 배우들이 어디서 이 답답했던 걸 달랬을까.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어 할 정도로 뻥뻥 노래하고 연기하고 에너지를 쏟아내고 또 얻어가기도 하고 있어요."
'헤드윅'의 이츠학을 연기할 당시에도 그랬지만, '리지'의 앨리스 역으로 무대에 오르는 제이민에겐 록의 정신이 깃들어있다. 풍부한 성량과 주체할 수 없는 록 스피릿은 관객들을 절로 들뜨게 한다. 유난히 록 뮤지컬과 잘 어울리고 사랑하게 되는 이유를 직접 물었다.
"어렸을 때부터 레드 제플린이나 핑크 플로이드, 현대 록 음악들을 많이 들었고 좋아해요. '헤드윅'을 모를 땐 뮤지컬에서 가능할 줄 몰랐어요. 더 클래시컬하고 좀 더 스펙트럼을 넓히면 팝적인 느낌 정도였죠. 점점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다양한 음악성을 포용할 수 있게 됐고 배우들이 할 수 있는 게 많아지고 소화해야 하는 영역도 넓어졌어요. 원래 성악 쪽 발성이 아니다보니 예쁘게 표현하는 것에 대한 답답함도 있었고요. 더 어리고 예뻤을 때 해봤으니 나이가 들면서 제 색깔을 쌓아가고 찾아가는 중이죠. '리지'가 제가 가는 길에서 제 특징을 잘 보여주는 극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제 성대가 버텨주는 한은 오래오래 더 하고 싶어요. 스트레스가 다 풀리거든요."
극중 제이민이 연기하는 앨리스는 리지의 이웃으로 우정과 사랑 사이를 넘나드는 묘한 관계성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특히나 표현 수위가 가볍지만은 않기에 '리지'의 숱한 충격적인 설정 중 하나이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극적 장치로도 작용한다.
[서울=뉴스핌] 황준선 기자 = 뮤지컬 '리지'의 배우 제이민이 27일 서울 서초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2.04.27 hwang@newspim.com |
"초연 때 정말 고민이 많았죠. 배우와 창작진이 모두에게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많은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게 그 선을 부드럽게 표현하려 노력했어요. 가치관과 시선은 모두가 다르지만 사랑의 형태가 다양할 수 있다고 봐요. 모든 사랑은 결국 친밀감, 애착, 애정으로부터 시작되고 앨리스와 리지도 서로를 위하는 존재니까요. 서로 의지하고 어깨를 내줄 수 있고 조금 더 나아간 특별한 관계임을 표현하고자 했죠. 절대 불쾌감을 주고싶지는 않았어요. 뭐가 됐든 예뻐 보였음 했고 우정과 사랑이 함께 표현되길 바랐죠. 이걸 자극적인 소재로 삼아 소비하고 싶지 않았고 특별하고 애틋한 사랑이자 우정으로 보이길 늘 바라고 있어요."
제이민은 앨리스 러셀로 유리아, 전성민, 이소정 세 명의 리지와 호흡을 맞춘다. 초연부터 함께한 멤버 유리아부터 각자가 개성이 강한 배우들인 만큼 주고받는 감정도 다르다. 덕분에 배우들에게도, 관객들에게도 매 순간 새로운 공연으로 느껴질 법하다.
"리아랑은 말할 것도 없죠. 목소리의 밀도가 잘 맞고 서로 잘 지탱해주는 느낌이에요. 정말 짜릿해요. 쇠줄을 쫙 당기는 것처럼짱짱하고 팽팽한 느낌이 들죠. 전성민 언니는 연습 때 정말 고뇌를 많이 하는 걸 지켜보고 상의하면서 얘길 많이 나눴어요. 그러면서 신뢰감이 생겼죠. 사실 첫눈에 반했어요. 제가 언니 수집가거든요. 성민언니는 내꺼다 했죠.(웃음) 유독 눈물이 많이 나고 지켜주고 싶은, 감싸 안아주고 보호해주고 싶은 리지예요. 소정이는 리지가 뮤지컬 입봉작인데 허스키함과 파워가 함께 우러나는 깊이감 있는 목소리를 가진 친구예요. 걱정은 안했어요. 무대 체질일 것 같더라고요. 아니나다를까 그래요. 소정이랑 할 땐 좀 더 이끌어주고 싶은 리지고, 그러다가도 눈을 뒤집으면서 광기어린 표정을 보여줄 땐 깜짝 놀라기도 하죠."
제이민은 '리지'를 여성이든 남성이든, 소수자든 약자든 강자든 모두를 아우르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는 "욕망을 분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억압받는 모습과 분출하는 게 모두 보여야 하는 극"이라고 이 작품을 짚었다.
"앨리스는 억압이 가득한 세상에서 금지된 사랑을 하게 되는 인물인 거죠. 사랑으로 억압받고 사랑으로 욕망을 분출하는 역이라고 봤어요. 개인적으로 저의 앨리스는 어쩌면 더 엄격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을 것 같아요. 굉장히 가부장적인, 서양이라면 청교도 집안의 딸이라든가 엄격하고 예의범절 신앙을 강요당한 케이스요. 그래서 더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있었겠죠. 그래서 리지에게도 공감하지만 떠나야 한다는 리지에게 같이 있다보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입장을 취하게도 되는 거죠. 그럼에도 사랑을 위해 마지막엔 모든 판을 뒤집을 수 있는 키를 쥔 인물이죠."
[서울=뉴스핌] 황준선 기자 = 뮤지컬 '리지'의 배우 제이민이 27일 서울 서초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2.04.27 hwang@newspim.com |
앨리스는 극중 리지와 특별한 관계지만 리지의 무죄 주장에 쉽사리 동의하지 않는 강단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결국은 가장 마지막에 드레스를 벗어 던지며 모든 문제를 해소한다. '리지'의 모든 등장인물은 각자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극도의 억압을 받아온 상황을 깨뜨리기 위해 양심, 도덕, 모든 굴레를 벗어던진다.
"앨리스는 교육을 잘 받은, 신념이 강한 인물이에요. 리지에게는 복합적인 감정이 들 것 같아요. 아빠를 죽였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게 아니라 미리 알았다면 공범이 됐을 수도 있는 사이였잖아요. 앨리스가 조금 더 이성적이기도 하고요. 사랑을 이용해서 가증스럽게 위증을 요구하는 리지가 애처롭고 슬프고 미운 거죠. 그래도 가장 큰 힘은 사랑이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겠다, 내가 본 것을 리지에게 불리하지 않게 증언하겠단 마음으로 재판장에 서죠. 그리곤 감히 사랑으로 모욕을 당하곤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라요. 신념과 사랑, 하나를 놔야 한다면 사랑을 택하는 거죠. 거기서 사실 신념이 바뀌었을 수도 있어요. 신념은 제가 갖는 거지 강요당하면 더이상은 아니잖아요."
'리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출 중 하나는 각자의 이익을 위해 리지의 무죄에 동조하는 이들이 드레스를 벗어던지는 신이다. 조금 유치하게 말하면 '흑화하는' 장면, 또 여배우들이 직설적으로 욕설을 내뱉고 소리를 지르는 모든 신에서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해방감이 느껴진다.
"사실 흑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관이기도 하죠.(웃음) 굳이 여성 관객들을 한정짓지 않아도 모든 억압받고 내가 약해서 받는 차별, 스트레스가 있다면 잠시나마 대리만족을 느끼시길 바라요. 이런 극으로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게 그만큼 다들 많이 억압받고 해소가 안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저흰 커튼콜을 거의 3막이라고 부를 정도로 다 쏟아내는데 오고가는 에너지가 있어야 더 좋아요. 저희만 발신하면 힘들거든요. 수신이 좀 있어야 에너지가 순환이 되는 느낌이죠. 어디가서 그래보겠어요. 시원하게 지르고 싶은 분들이 모두 찾아오시면 좋겠어요."
jyyang@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