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영란 편집위원= 묵묵히 서있는 아름드리 나무들을 찍기 위해 전세계 곳곳을 누벼온 사진가 이흥렬(55). 그가 이번에는 제주 팽나무 사진을 모아 개인전을 갖는다.
나무사진가 이흥렬은 '제주신목_폭낭'이라는 타이틀로 서울 마포구 합정역 메세나폴리스의 리서울갤러리(대표 조운조)에서 오는 14일까지 초대전을 연다. 이번 전시에 작가는 올해초 제주도에 두달간 머무르며 찍은 독특한 미감의 팽나무 사진 등 20여점의 신작과 근작을 내걸었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이흥렬 작 '제주신목-애월읍_곽지리'. [사진=리서울갤러리] 2021.5.7 art29@newspim.com |
폭낭은 팽나무를 가리키는 제주도 사투리다. 팽나무는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이지만 제주도에도 한림읍 명월리의 팽나무군락지를 비롯해 여러 곳에 팽나무 고목들이 분포돼 있다. 이흥렬은 제주에서도 '신목'으로 불릴 정도로 널리 알려진 팽나무들을 일일이 답사하고, 선별한 뒤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담아냈다. 푸른 빛과 보랏빛 등을 머금은 그 사진들은 매우 환상적이며 드라마틱하다. 오묘한 색채의 고목들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듯 장엄하고, 숭고하기까지 하다.
이흥렬은 근래들어 세계를 돌며 특별한 나무들을 찍었다. 네팔 히말라야의 랄리구리스(2017년)를 비롯해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의 올리브나무(2018),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나무(2019)를 촬영했다. 그리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해외 작업이 어렵게 되자 작년에는 통영의 신목을 촬영했고, 올해는 제주도에서 팽나무를 찍었다.
작가는 고목과 인연이 깊다. 어린 시절 마을 어귀 서낭당 신목을 지나치며 등하교했는데 그 기이한 정경은 작가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었다. 중앙대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사진가로 나선 뒤 우연한 기회에 양재천 둑방길 나무들을 촬영할 일이 생겼다. 2013년 양재천 변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수백 그루의 나무들이 베어질 상황에 놓인 것. 이에 이흥렬은 주민들과 함께 '양재천 둑방길 나무 지키기' 운동을 펼쳤고, 나무들을 촬영해 나무 사진전을 열었다. 시민운동을 통해 둑방길 나무들은 결국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나무 작업에 깊이 빠져들었다.
중앙대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사진을 전공했던 이흥렬은 유학시절 전시를 가졌던 갤러리의 주선으로 이탈리아의 고목을 찍게 됐다.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의 올리브나무들이었는데 수령 500~600년, 심지어 2000년이 된 것도 있었다. 올리브나무 밭에서 살다시피 하며 찍은 환상적인 사진들로 작가는 2018년 이탈리아 바리시에서 '천년의 올리브나무'라는 개인전을 가졌다. 여세를 몰아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 나무들을 찍어 초대전도 개최했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이흥렬 작 '제주신목-구좌읍 김녕리'. [사진=리서울갤러리] 2021.5.7 art29@newspim.com |
지난해 통영의 친구로부터 "외국 나무만 찍지 말고, 이 땅의 나무도 찍어라"는 말을 듣고 '통영신목'을 촬영했고, 올초에는 제주도의 이름 난 폭낭(팽나무)을 카메라에 담았다. 촬영하는 나무에 따라, 나무가 위치한 지역과 그 지역의 역사적 의미에 따라 나무를 다르게 표현해온 작가는 이번에는 오묘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의 제주 폭낭 사진을 완성했다.
이흥렬은 제주 신목들의 아름다움과 함께, 제주의 역사적 사건에도 주목했다. 예를 들어 애월읍 봉성리 재리앗의 팽나무는 제주 4.3사건 이전에는 평화로운 마을 한가운데서 마을의 구심점 역할을 한 고목이었다. 그러나 4.3사건으로 주민 소개령이 내려지고 마을이 불태워진 후 이제는 허허벌판 중산간 지대에 외롭게 서있는 나무가 되었다.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있는 팽나무를 보며 작가는 그 나무가 간직하고 있을 '나무의 기억'이 떠올랐고, 단순히 식물이 아니라 역사의 나무, 기억의 나무로 표현하기 위해 깊고 어두운 조명을 택했다..
그렇다고 이흥렬이 나무의 역사성만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나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아름다움에도 주목한다. 이를 보다 심도있게 담아내기 위해 작가는 특유의 조명 기법을 동원한다. 주로 스튜디오같은 실내 작업에 사용되는 라이트 페인팅 기법을 야외로 끌어내 나무를 드라마틱하고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 어둠 속에서 피사체에 빛을 쏘아 촬영하는 라이트 페인팅 기법은 대자연에서 시행할 경우 많은 장비와 공력을 요한다. 매우 힘들고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이흥렬은 나무를 주인공으로, 보다 환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 방식을 추구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기존의 수많은 나무사진과 이흥렬의 사진은 극명하게 차별화된다. 만드는 사진이 아닌, 현장에서 발견하고 촬영하는 사진 고유의 특성은 그대로 견지하되, 한편으로 자신만의 독창성과 예술성을 추구하기 위해 이흥렬은 조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때문에 낮이 아닌 밤을 택해 복잡하고 힘든 촬영여정을 이어나가고 있다.
[서울=뉴스핌] 이영란 기자=이흥렬 작 '제주신목-조천읍 북촌리'. [사진=리서울갤러리] 2021.5.7 art29@newspim.com |
작가는 "제주에서 가장 먼저 만난 팽나무는 바람이 유난히 심한 동복리의 팽나무였다. 세찬 바람 때문에 한쪽으로 자라 편향수가 됐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역동적이었고 당당했다. 마치 육지로부터 온갖 수난을 당한 제주였지만, 이제는 누구나 찾고 싶고, 누구나 살고 싶어하는 곳이 된 제주를 상징하는 듯했다. 동복리 폭낭을 만난 뒤로 매년 두세 번씩 제주를 찾아 폭낭을 촬영했고, 올초에는 전시를 위해 더욱 집중해 제주의 팽나무들을 찍었다. 육지에 사람들의 애환을 품은 느타나무가 있다면, 제주는 폭낭이 있다"고 밝혔다.
이흥렬이 찍은 팽나무(폭낭)들은 다채롭다. 동네 어귀에 우뚝 솟아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고 친구가 된 인간 폭낭, 중산간 우물가에 홀로 서서 들짐승들의 지킴이가 된 자연 폭낭, 4.3사건의 학살을 겹겹이 품은 역사 폭낭, 그리고 마침내 신이 된 신목 폭낭까지 그 폭이 넓다..
작가는 "촬영을 시작하기 전 나무에 기대어 앉으면 나즈막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무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한채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신비하게 다가온다. 나는 그에 맞춰 조명의 색과 기법, 프레임을 바꿔가며 신들린 사람처럼 작업하곤 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전시는 이흥렬의 16번째 개인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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