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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티션스토리] (상) 농사짓던 중학생 송석준, 3선 의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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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핌] 신정인 기자 = 송석준 국민의힘 의원은 22일 유튜브 채널 뉴스핌TV '폴리티션 스토리'에 출연해 국토교통부 관료를 거쳐 3선 국회의원이 되기까지의 삶을 진솔하게 털어놨다.

경기 이천에서 나고 자란 송 의원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직접 농사를 지으며 학업을 병행한 성장기를 전했다.

그는 서울로 전학 후 도시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형제들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와 친구들의 응원 덕에 서울대 국제경제학과에 진학하며 꿈을 이어갔다.

공직 생활 중에는 국토부에서 신도시 개발, 부동산 정책, 공간정보 산업 육성 등의 정책을 이끌었으며, 이후 정치에 입문해 수도권 규제 개선과 지역 교통망 확충에 앞장서고 있다.

송 의원은 "불합리한 규제 개선과 서민경제 활성화를 위해 입법과 예산에 힘쓰겠다"며 하반기 정치적 목표를 밝혔다.

송석준 국민의힘 의원. [사진=뉴스핌 DB]

1964년 경기 이천에서 태어난 송 의원은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행정고시에 합격해 1990년 국토부(당시 건설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국토계획·부동산·신도시 정책 등 핵심 업무를 맡으며 25년간 국토교통부 대변인, 건설정책국장, 서울지방국토관리청장 등을 역임했다.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소속으로 이천시 지역구에 출마해 첫 당선된 후, 내리 3선에 성공했다. 오랜 관료 경험을 바탕으로 국회에서 국토교통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며 수도권 규제 완화, 지역 균형 발전, 부동산 정책 개선 등에 주력하고 있다.

다음은 송 의원과의 폴리티션 스토리 인터뷰 일문일답. 자세한 이야기는 뉴스핌TV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신정인 기자, 이하 신 기자)
지금 지역구인 경기 이천에서 나고 자라셨는데 학창 시절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송석준 의원, 이하 송 의원)
학창시절을 아주 좀 남달리 보냈던 것 같아요. 어릴 때 과학자가 되고 싶은 꿈도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 좀 책 읽기를 좋아했는데 중학교 1학년 초에 아버님을 일찍 여의고 또 직접 아버지 대신에 이제 농기계 없이 농사를 짓는 그런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본의 아니게 일과 또 공부를 같이 병행할 수밖에 없는 좀 독특한 경험을 좀 했습니다.

-(신 기자)
의원님께서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출신이시잖아요. 농업과 학업을 병행하시면서 서울대 입학하시기까지 고난도 많으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겨내셨는지

▲(송 의원)
중학교 고등학교 시골에서 다닐 때는 공부 환경도 그렇게 좋지 않았을뿐더러 일을 농기계 없이 육체 노동으로 하다 보니까 공부를 몇 번을 포기하고 싶은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받은 이제 강한 정신력을 기반으로 해서 육체적인 고통은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열악한 공부 환경이지만 그래도 농사 일을 하면서 공부하면서 제가 하고 싶었던 건 다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정말 힘들었던 것은 서울의 인창고라고 도시 학교로 전학을 와서, 오히려 공부 시간이 3배로 더 많아졌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성적이 거꾸로 곤두박질 치고 제가 뜻대로 되지 않는 그런 게 너무 많았습니다.
선생님들도 훌륭하시고 공부 시간도 많고 그런 좋은 환경 속에서 오히려 더 성적이 곤두박질 치는 걸 보고 많이 방황하고 좌절하고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사실 몇 번을 때려치고 검정고시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이겨내고 보니까 그래도 세상에 어떤 힘든 일도 참고 이 방향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은 가고자 하는 종착지에 도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참 그래도 친구들의 도움이 컸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많이 방황하고 힘들 때 이제 물론 이제 어머님이나 형제들의 도움이 컸지만 특히 친구들이 이런저런 것으로 많이 힘이 되어 준 게 빨리 도시 생활에 적응을 하고 제가 이제 목표로 한 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힘이 됐던 것 같습니다.

-(신 기자)
친구분들하고도 굉장히 잘 지내셨던 것 같은데 별명도 따로 있으셨나요

▲(송 의원)
제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하다 보니 원래도 형제들 중에서도 검은 편인데 얼굴이 그을려서 더 까맸습니다.
서울로 전학을 왔을 때 대뜸 제가 반에 쑥 얼굴을 드밀자마자 애들이 한결같이 합창하듯이 저한테 부른 별명이 있었거든요. '또잡토'라고. 당시에 인창고 2학년 4반에서 얼굴이 제일 좀 검은 편에 속했던 연탄이라는 애가 있었는데 걔보다 더 검은 애가 아잡토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소위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토인 약자로 '아잡토'였는데 제가 반에 가니까 저보고 '또 잡아온 토인' 해서 '또잡토'. 그래서 제가 고등학교 때 또잡토라는 별명을 들으면서 서울 학창 시절을 보낸 적도 있었습니다.

-(신 기자) 7남매 중 넷째이시잖아요. 아까도 좀 형제분들의 도움 많이 받으셨다고 했는데 어떤 식으로 서로 의지하면서 지내셨었는지

▲(송 의원)
저는 사실은 7남매 중에 딱 가운데 넷째라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는 제가 좀 찬밥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좀 형제 중에 가운데 낀 형제라 조금 제가 외톨이 되고 소외받을 때도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제 제가 성장하고 학창시절을 보내다 보니까 형제들 모두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큰누님이나 둘째 누님이 사실 학교를 많이 못 다니셨습니다. 최저학력으로 이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는데 우리 큰누님이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서울의 양장점에서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하셔서 저한테 매월 당시에 그래도 소년중앙이라는 거를 사서 손편지하고 함께 보내주신 그때 그 책을 통해서 제가 시골 생활을 하지만 도회지 친구들의 그런 의식 세계를 같이 좀 간접 경험할 수가 있는 게 큰 힘이 됐었습니다

특히 거기에 매년 1월로 부록으로 일기장이 딸려 나왔는데 그 책이 너무 귀하고 그 일기장이 소중해서 제가 하루도 거름없이 그 일기장을 채워 놓는 게 습관이 돼서 초등학교 3학년서부터 정치하는 그날까지 매일 일기 쓰는 습관을 갖게 됐습니다.

둘째 누님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저랑 같이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셨는데 많은 일을 같이 하면서 힘이 되어주셨던 기억이 있고. 결혼하셔서도 많이 챙겨주셨고.

형님은 정말 누구보다 본인이 희생을 하셨습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형님이 고등학교 갈 형편이 안 돼서 직업훈련원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후 형님이 기능공으로 취직을 해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그 퇴직금으로 저를 전학시켜준 겁니다.

형님이 지금도 고향을 지키고 어머님 모시고 농사를 짓고 있지만 저를 위해 본인의 미래를 희생한 것이 컸습니다. 여동생은 그 당시에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밥 해주고 빨래해 주면서 저를 뒷바라지해 줬습니다. 제가 서울대에 가는데 굉장히 정신적으로 큰 힘을 얻는 계기가 됐죠.

-(신 기자)
공직 생활을 쭉 줄곧 하시다가 직후에 바로 새누리당에 입당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당선되시고. 그때 의원님을 정치권으로 끌어주시거나 좀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많이 준 분이 누군지 궁금한데요.

▲(송 의원)
정치인이 되고자 할 때는 많은 분들은 상식적으로 그렇게 얘기하세요.
누가 좀 기존 정치권에서 이렇게 추천하거나 끌어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사실은 저는 그게 없었거든요.

저는 소년 농군 가장으로 농사지으면서도 과학자의 꿈을 키우다가 2학년 때 이천군 과학경시대회 나갔다는데 예선 탈락을 하면서 노벨 물리학상을 타겠다는 과학자의 꿈이 산산이 깨지고 결국 포기를 해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가 고민하다가 우연히 읽은 책이 존 메어나드 케인즈의 전기문이었는데 그 책을 읽고 제가 '아 과학자가 아니어도 이렇게 경제학자 기반의 행정가나 정치가가 돼서 세상과 경제를 살리고 넉넉하게 할 수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 하도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 아버지가 형제를 많이 낳아놓고 너무 무능하게 자녀들을 키우는 것 같아서 이 다음에 크면 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 제 인생 목표였습니다.

그러고 새롭게 잡은 꿈이 경제학자 기반의 행정가 내지 정치학자였습니다. 그래서 행정 공무원을 하면서도 언젠가는 (정치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우리 지역구에 제 전임 국회의원님이 지방선거 때 무슨 사건 때문에 출당이 되는 사고가 생겼습니다. 당시 제가 정치인의 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지역의 많은 분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면 '이제는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해서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이웃 동네 형님들이 "너 인마 정치를 하려면 진작부터 나한테 와서 부탁을 해야지"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들한테 혼나면서 제가 시작을 했고 그때 같이 저랑 경쟁했던 분들은 다 벌써 중앙당에 '친박'이네 '친이'네 하면서 줄이 있었는데 저는 사실 그런 거 없이 그냥 오로지 시민들만 믿고 '시대적인 상황이 내가 이제 움직일 때가 됐구나' 해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정치 활동을 하면서 많이 저에게 도움을 주고 또 제가 많이 참고를 하는 분이 이경재 의원님이십니다. 강화군 지역구였지만 원래 고향이 이천이세요. 어릴 때 저처럼 일찍 아버님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고생을 많이 하시면서 크셨고 그래서 저랑 인생 역정이 비슷하십니다. 그분하고 의정 활동을 하면서 많이 도움도 받고 배우면서 정치 활동을 해왔습니다.

-(신 기자)
요즘도 종종 만나 뵙거나 소통하세요?

▲(송 의원)
지금도 '품앗이'라는 활동을 하시는데 국회에서 '동심 한마당'이라고, 매년 어린이날을 전후해서 열리는 행사도 같이 제가 도와서 하고 있고요. 이제 지역 행사할 때도 같이 또 뵙습니다.

-(신 기자)
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90년도에 국토부처 관료로 입직하셔서 서울지방국토관리청장까지 역임을 하셨습니다. 사실 정치인으로서의 생활과 공무원으로서의 생활은 많이 다를 것 같은데 좀 어떤 부분이 가장 크게 다르다고 느끼셨는지

▲(송 의원)
많이 다르죠. 제가 그것 때문에 사실 정치인의 길을 택한 거거든요. 제가 행정 고시 재경직을 합격 해서 당시 건설부 처음에 들어왔고, 건설교통부 나중에는 국토해양부 국토교통부 이렇게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 부서에서 25년 공직생활을 하면서 많은 보람이 있는 일도 했었죠.

5기 신도시 1기 신도시도 만드는 일로 시작을 해서 우리나라의 국토이용계획법제로 회사를 정비하는 일도 하고 또 IMF 직후에 부동산 경기 활성화 제도, 그때 토지공개념을 과감하게 손을 대고.

부동산 경기 활성화 시책도 한 기억도 있고 청와대에도 파견 나와서 우측보행 제도를 도입한다든가, 총리실로 파견 나가서 국장 시절에 새만금 마스터플랜을 만든 기억도 있고요.

제가 공간 정보 산업이라는 거를 처음 우리나라 11번째 특수산업으로 분류 독립 시킨 기억도 있고. 그런데 행정부는 기본적으로 이렇게 할 수 있는 한계가 명확하더라고요.
그러니까 편하긴 하죠. 또 파워도 있죠. 예산을 집행하고 법률을 집행하니까 파워도 있고 이렇게 또 안온한 철밥통에 그런 건 있지만 또 한계 국회가 정해준 그 한계를 넘을 수 없다라는 거. 그래서 저는 특히 우리나라가 아직도 불합리한 제도가 많다고 봅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제 시대적 소명을 다한 수도권 규제 같은 거죠.
이미 수도권 규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계속 늘어났고 이미 수도권이 거의 다 포화 상태가 왔단 말이에요.
지금 서부 쪽으로는 평택 화성까지 다 이미 개발이 됐고 수도권의 자연 보전 권역이라고, 그나마 동남부권에 이천 여주 양평 일부하고 안성 용인 광주 일부만 남았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이쪽은 급속히 난개발로 가고 있단 말이에요.

난개발 아니면 그냥 모든 개발이 사실상 막지 못하면서 결국은 난개발만 초래하는 이 잘못된 제도를 좀 손을 대겠다.
그래서 수도권 규제를 막연하게 규모로 제한하는 것을 계획적 개발과 관리가 가능하게끔 풀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들어왔는데 와보니까 아직도 이 지방의 논리에 의해서 그 형해화된 수도권 규제가 그대로 있다는 게 너무 안타깝고요.

그런 거를 국회에 가서 직접 한번 바꿔봐야겠다라고 들어왔는데 쉽지는 않아요. 그래도 이제 여기서 뛰니까 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고 특히 재원 법인에 있어서도 예비 타당성 제도라는 것 때문에 꼭 해야 될 사업도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것도 지금 제가 예산 참여할 때 적극적으로 관여해서 해결할 수 있고. 국회로 오면 행정부와 달리 무한 책임이기 때문에 힘들고 보다 더 고달픈 건 있지만 소위 법도 만들 수 있고 또 예산도 정부 편성안을 뜯어고칠 수 있는 그런 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람이 있는 일은 확실히 정치권이 더 많이 할 수 있구나 하는 점이 있습니다.

-(신 기자)
올 하반기 목표나 아까 말씀하신 규제 완화 이런 거 관련해서 좀 어느 정도까지 하겠다 이런 목표가 따로 있으실까요?

▲(송 의원)
사실은 그 수도권 규제 문제는 좀 더 지방 의원님들의 공감대를 더 많이 형성을 해야 되기 때문에 굉장히 어렵고도 지난한 과제입니다.
그렇지만 계속 좀 설득을 해서 올해도 일부 규모 면에서 이제 그동안에 산업단지 2만 평으로 제한돼 있던 것을 이제는 연접해서 10만 평까지 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 해서 불합리한 규모 제한을 없애고 계획적으로 개발할 수 있게끔 할 계획이고요.

이천이 교통의 요충지 도시인데 거기 철도망이 별자형으로 중심 축이 형성이 되도록 돼 있습니다. 이천에서 그런 시대를 빨리 당길 수 있도록 좀 노력하고 있고요.

그 외에 지금 부동산 시장도 대부분 지역이 너무 침체되어 있고 건설 시장이에 건설업계가 너무 좀 어려웠고 그것이 결국은 지방 경제와 바닥 경제를 굉장히 어렵게 하기 때문에 그런 경제 활성화라든가 특히 중소 자영업자 소상공인들의 애로를 해결하는 데 각종 입법, 예산을 통해서 서민 경제의 온기와 활력을 높이는 데 역점을 두고자 합니다.

allpass@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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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훈 "韓 경제, 회색코뿔소 상황" [세종=뉴스핌] 김범주 기자 = 이혜훈 기획예산처 초대 장관 후보자가 29일 지명 후 첫 출근길에서 "한국 경제는 오랫동안 많은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무시하고 방관했을 때 치명적인 위협에 빠지게 되는 회색코뿔소(Gray Rhino)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 후보자는 이날 임시 집무실이 차려진 서울 종로구 예금보험공사로 출근하면서 한국 경제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경제가 성장 잠재력이 훼손되는 구조적이고 복합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다"며 "고물가 고환율의 이중고가 민생에 많은 부담을 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뉴스핌] 최지환 기자 = 이혜훈 초대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가 29일 오전 서울 중구 예금보험공사 본사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며 소감을 밝히고 있다. 2025.12.29 choipix16@newspim.com '회색코뿔소'라는 용어는 미국 경제학자 미셸 워커가 2013년 다보스포럼에서 처음 사용했다. 지속적인 경고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쉽게 간과하는 위험 요인을 말한다. 이 후보자는 "단기적 대응을 넘어서서 더 멀리 더 길게 보는 그런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며 "이런 맥락에서 기획예산처가 태어났다"고 설명했다. 현재 한국 경제가 직면한 5대 구조적 문제점으로는 인구, 기후, 극심한 양극화, 산업 대격변, 지방 소멸을 꼽았다. 다만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닌 중장기적으로 발생한 '위기'라는 점을 강조했다.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해 예산과 기획을 연동하는 방식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기획과 예산을 연동시키는 방식이 필요하다"며 "불필요한 지출은 찾아내서 없애고 민생과 성장에는 과감하게 투자하는 그런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국민의 세금이 미래를 위한 투자가 되게 하고, 그 투자는 또다시 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이런 전략적 선순환을 기획예산처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이 후보자는 '현 정부의 확장 재정 기조'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에 "별도로 (간담회 등의) 자리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야당 정치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기획처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이유'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즉답을 피했다. wideopen@newspim.com 2025-12-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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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청와대'…李대통령, 오늘 첫 출근 [서울=뉴스핌] 박찬제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29일부터 청와대로 공식 출근한다.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가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옮긴 지 약 3년 7개월 만으로, 대통령실의 공식 명칭도 '청와대'로 다시 돌아간다. 이 대통령이 출근하기에 앞서 이날 오전 0시부터 용산 대통령실에 걸려 있던 봉황기가 내려가고 동시에 청와대에 게양된다.  이재명 대통령이 26일 옛 국방부 청사인 용산 대통령실로 마지막 출근을 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오는 29일부터는 청와대에서 집무한다. [사진=대통령실] 봉황기는 대통령 재임 중 상시 게양되는 국가수반의 상징이다. 우리나라의 국화(國花)인 무궁화를 가운데 두고, 상상 속의 새 봉황 두 마리가 마주 보는 문양이다. 봉황기는 윤석열정부 시절 한 번 하기된 바 있다. 올해 4월 4일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을 선고하면서다.  이 대통령이 청와대로 출근함에 따라, 업무표장(로고) 역시 과거 청와대 것으로 돌아간다. 용산 시대가 저물고 청와대 시대가 다시 시작되는 셈이다. 이 대통령의 청와대 연내 복귀는 많은 해석을 낳는다. 새해부터 국민주권정부의 새 출발을 시작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됐다는 해석과 12·3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등의 사건이 벌어진 지난 정부와의 단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해석 등이다.  청와대가 다시 문을 열면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대통령 집무실이 여민관에 마련된 점이다. 청와대는 크게 ▲대통령이 집무를 보는 '본관' ▲비서관실과 수석실이 분산 배치된 '여민관 1~3동' ▲외빈 맞이와 행사를 갖는 '영빈관' ▲'대통령 관저' ▲기자실이 있는 '춘추관' 등으로 구성된다. 박근혜 정부까지는 대통령 집무실이 본관에 위치했다. 참모들이 근무하는 여민관과 500m 떨어져 있었다.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집무실을 참모진이 있는 여민관에 마련해 거리를 좁힌 바 있는데, 이 대통령도 여민관에 집무실을 마련했다. 이 대통령은 본관 집무실과 여민관 집무실을 함께 쓴다는 방침이다. 주로 쓰는 집무실은 여민관이다. 여민관에서 일하는 '3실장'(비서실장·정책실장·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참모진들과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는 취지다.  국가상징구역 종합계획도 [자료=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행복청)] 대통령 집무실이 '구중궁궐'이라는 비판을 듣는 청와대로 이전을 한 만큼 국민과의 소통이 제한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대통령실도 이를 의식 중이다. 강훈식 비서실장은 지난 7일 "청와대 이전 후에는 대통령 일정과 업무에 대한 온라인 생중계 등을 더 확충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다만 일각에선 청와대 시대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이 대통령이 취임 전부터 대통령 세종집무실을 꾸준히 언급한 바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22일 대통령 세종집무실과 국회 세종의사당의 입지가 확정되기도 했다.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행복청)의 대통령 세종집무실 목표 준공 연도는 2030년 상반기다. 아직 목표만 세운 단계라 더 늘어질 수도, 더 당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지난 12일 행복청 업무보고 자리에서 "조금 더 서둘러야 할 것 같다"며 공정 단축을 주문한 바 있어 준공 시기가 조금 더 앞당겨 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pcjay@newspim.com 2025-12-2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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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영향 종목

  • Lockheed Martin Corp.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안보 지원 강화 기대감으로 방산 수요 증가 직접적. 미·러 긴장 완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위산업 매출 안정성 강화 예상됨.

부정 영향 종목

  • Caterpillar Inc. Industrials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시 건설 및 중장비 수요 불확실성 직접적. 글로벌 인프라 투자 지연으로 매출 성장 둔화 가능성 있음.
이 내용에 포함된 데이터와 의견은 뉴스핌 AI가 분석한 결과입니다.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작성되었으며, 특정 종목 매매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 및 결과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으므로, 투자 전 충분한 조사와 전문가 상담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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