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가나' '아가멤논' '맥베스' 세 에피소드로 구성
24일까지 대학로 홍익대 아트센터 소극장서 공연
[서울=뉴스핌] 황수정 기자 = 고대 그리스 신화와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세 유럽의 전설이 절묘하게 교차된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 인간이 얼마나 변할 수 있는지, 얼마나 잔인해지고 약해지는지 여과없이 드러낸다. 인간의 탐욕부터 파멸까지 인간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 바로 '벙커 트릴로지'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 중 '모르가나' 공연 장면 [사진=㈜아이엠컬처] |
연극 '벙커 트릴로지'(연출 김태형)는 영국 극작가 제스로 컴튼의 작품으로 1차세계대전 중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다룬다. 영국 이야기지만 김태형 연출과 지이선 작가가 각색, 2016년 초연 당시 전석 매진을 기록한 바 있다. '3부작(Trilogy)'이라는 뜻답게 작품은 '모르가나' '아가멤논' '맥베스' 세 편의 옴니버스로 이뤄진다.
'모르가나'는 원탁의 기사들의 이름을 별명으로 가진 젊은 영국 청년 아더, 랜슬롯, 가웨인이 전쟁으로 친구 10명을 잃고 변해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어느 성탄절 만난 여성이 시발점이 돼 살아남은 친구들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담는다. 중세 유럽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모르가나는 때로는 아서왕의 원수, 때로는 방패, 때로는 아내가 된다. 극중 여성은 친구들에게 희망을 주다가도 좌절과 공포를 주는 등 끝까지 정체를 밝히지 않으며 여운을 준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 중 '아가멤논' 공연 장면 [사진=㈜아이엠컬처] |
그리스 신화 속 '아가멤논'은 트로이 원정에 참여한 총사령관이지만 아내와 정부에게 살해당하는 인물이다. 연극 '아가멤논'은 여기에 여성인권을 더해 한층 깊이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여성 인권이 중요하지 않았던 시절, 여성참정권을 주장하는 영국인 크리스틴과 결혼한 독일군 알베르트는 뛰어난 저격 실력으로 명성이 높아진다. 그만큼 크리스틴의 기다림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결국 크리스틴은 영국인들을 살리기 위해 남편을 배신한다. 점점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알베르트, 대의를 위해 힘든 결정을 한 크리스틴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지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맥베스'를 바탕으로 하는 연극 '맥베스'는 다른 두 에피소드보다 강렬하다. 영국군은 종전을 자축하는 전야제라는 명목 하에 장군과 병사들이 모여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공연한다. 현실과 연극이 '촛불'이라는 매개체로 넘나들며 관객을 혼란스럽게 하지만, '맥베스'의 모든 이야기가 실제 군인들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닿아 그 비극성을 높인다. 특히 '맥베스'에서는 독가스 공격을 연상케 하는 스모그, 방독면, 흥건한 피까지 다소 충격적인 연출이 눈에 띈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 중 '맥베스' 공연 장면 [사진=㈜아이엠컬처] |
각각 세 에피소드는 한 편만 관람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한 편을 보고나면 다른 편까지 보고 싶어진다. 또 소품 중 하나인 '베개'가 세 에피소드 모두 상징적으로 사용되면서 어떤 의미를 뜻하는지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다. 배우 이석준, 박민성, 오종혁, 박은석, 신성민, 김바다, 강승호, 정연, 이진희가 출연하는데, 각 에피소드에서 완전히 달라진 캐릭터를 열연하는 모습 또한 인상적이다.
전쟁의 비극을 다각적으로 보여주는 '벙커 트릴로지'는 참호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답게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길목부터 참호처럼 꾸며져있다. 매우 협소해 100여 명만 입장 가능한 공연장은, 무대를 중앙으로 관객이 3면을 둘러싸고 있다. 이는 관객이 작품에 몰입하고 생생한 현장감을 줄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이러한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 다소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는 오는 24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hsj1211@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