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세종문화회관(사장 안호상) 서울시극단(단장 고선웅)의 올해 두 번째 연극 '연안지대'가 전쟁과 갈등, 혼란을 물려준 부모 세대의 유산을 짊어진 자식들이 연대를 통해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14일 개막하는 '연안지대'는 레바논 출신 캐나다 작가인 와즈디 무아와드의 전쟁 4부작 중 첫 번째 작품으로 국내 무대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 시체를 짊어지고 장지를 찾아 나서는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과 혼돈의 삶을 살아내는 모두를 무대에서 마주하고 서로를 보듬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서울시극단 '연안지대'의 한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2024.06.14 jyyang@newspim.com |
주인공 윌프리드(이승우)는 어느 날 기억도 나지 않는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듣고 그의 시신을 찾으러 간다. 어머니를 죽게 한 아버지에게 가족묘지를 내 줄 수 없다는 친척들의 반대에 그는 시체를 짊어지고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 나선다. 전쟁으로 인해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의 공간을 모두 차지한 곳에선 아버지가 묻힐 곳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바다에 다다른 윌프리드는 그 곳에서 아버지를 놓아주며 죽음과 같은 삶, 삶과 닮은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연안지대'는 전쟁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던, 윌프리드의 삶이 사실은 얼마나 전쟁의 흔적과 맞닿아있는지를 차근히 보여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났던 전쟁의 한 가운데서 태어나 저마다 전쟁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 또 실제로 참혹한 전쟁을 겪는 이들을 두루 만나게 된다.
이 극은 윌프리드가 시몬, 아메, 사베, 마지, 조제핀을 만나는 과정을 통해 인류의 정신을 갉아먹고, 적군과 아군조차 알아볼 수 없이 혼란스러운 지옥을 만드는 전쟁의 참혹함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가 지고 있는 아버지의 시체만큼이나 무거운, 부모 세대가 남긴 지독한 유산을 감내하고 또 회피하고 결국은 놓아주는 방식을 보여준다.
특히 부모님의 얼굴을 모르고 자란 윌프리드가 꿈 속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되는 공간에서 자신을 수호하는 기사와 소통하는 장면이나, 이미 죽어버린 아버지와 소통하는 장면에선 마치 연극적으로 구현된 멀티버스(다중 우주) 세계를 마주하는 듯하다. 윌프리드의 정신을 붙들어주는 기사가 어머니 쟌(최나라)의 얼굴을 한 것 역시 부모가 자식에게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의도한 듯한 연출의 흔적이 묻어난다.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서울시극단 '연안지대'의 한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2024.06.14 jyyang@newspim.com |
윌프리드가 아버지의 시신을 결국 바닷물에 흘려 보내기로 마음 먹었을 때, 아버지 이스마엘(윤상화)은 그러지 말라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죽은 이를 어떻게 보내고 추모할 지를 결정하는 것은 산 사람이다. 각자의 마음 속 짐이자, 아픈 상처로 남아있던 부모의 그림자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제대로 정리하고 보내줬을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 전쟁과 폭력에 지친 인물들은 그렇게 이스마엘을 보내며 부모와 얽힌 과거와 상처를 털어낸다.
전쟁과 아픔, 상처 속에서 살아가고 또 죽어간 모두의 이름을 읊고 멍에처럼 지고 다니는 조제핀의 등장은 꽤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아무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외치겠다는 시몬 역시 그렇다. 쉬쉬하고, 누군가는 감추려하는 진실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되묻고, 잊혀져간 이름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행위에서 다음 세대는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희망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서울시극단 '연안지대'의 한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2024.06.14 jyyang@newspim.com |
그럼에도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멈추지 않는 총성과 폭음은 그토록 전쟁의 세대를 증오하고도, 반복되는 현실을 그대로 담은 듯하다. 누군가는 지구 반대편의, 우리 나라와는 유리된 이야기라고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은 단지 전쟁이 아니다. 모든 것을 앗아가는 가장 비인간적인 상징으로서, 전쟁의 폭력은 어쩌면 전쟁보다 더 참혹한 삶과 일상일 수도 있다.
레바논 내전을 온 몸으로 겪은 원작자의 의도와 메시지를 2024년의 한국의 것으로 확장하는 것은 무대 위 배우와 연출, 그리고 관객 모두의 일이다. 그리고 '연안지대'는 그 화두를 던지는 데 성공했다.
jyyang@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