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오영상 기자 =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원자력협정 개정'이 핵심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이 이번 협상에서 추구하는 바는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역량 확보를 통해 핵연료 주기를 완성하는 것이다.
◆ 제한적 권한에서 '자율성 확대' 요구로
1974년 최초 체결돼 2015년 개정된 현행 한미 원자력협정에 따라 한국은 20% 미만 저농축 우라늄 생산을 조건부로 허용 받고 있지만,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나 고농축 우라늄 생산 등 핵심 기술 분야에서는 여전히 미국의 사전 동의가 필요하다.
한국 정부는 이번 개정 추진이 핵무기 개발과 무관하며, 오로지 에너지 안보·산업 자립·사용후 핵연료 관리를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협정 개정 논의는 차세대 원전 기술 확보와 원자력 폐기물 처리 문제 해결, 그리고 에너지 공급망 안정성까지 걸려 있는 사안이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에서 개정 협상 개시 선언이 나올 경우, 이는 단순한 절차적 진전을 넘어 한국의 원자력 정책 주권 확대라는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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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뉴스핌DB] |
◆ 日, 6년 동안 美와 16차례 교섭
이 상황은 과거 일본의 경험과 비교된다. 일본은 미국과의 원자력협정에서 오랜 교섭 끝에 자율성을 확보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일본 역시 1968년 처음 맺은 협정에서는 재처리와 농축 같은 활동마다 미국의 개별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일본은 이 제약을 풀기 위해 정부·정치권·산업계가 삼각축을 이루어 꾸준히 개정을 요구했다.
일본은 국제 무대에서 명분을 쌓기 위해 1970~80년대 '핵연료주기평가(INFCE)' 논의에 적극 참여했다. 일본 관료와 전문가들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핵 비확산과 양립 가능하다"는 논리를 국제사회에 꾸준히 설득했다.
특히 플루토늄을 에너지 연료로 활용하는 '플루서멀(Plu-thermal) 정책'을 공개적으로 내세우며, 핵무기 개발 의도가 아님을 강조했다.
일본 과학기술청과 외무성 관료들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철저히 기술적·제도적 논리를 준비했다. 재처리·농축 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적극 수용하고, 관련 보고서를 투명하게 공개해 "책임 있는 핵연료 사이클 운영국"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1980년대 일본 자민당은 에너지 안보를 국가 전략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1970년대 오일쇼크를 겪은 이후 원자력에 대한 의존도가 급격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자민당 정치인들은 미국 의회와 정부를 상대로 "일본이 안정적인 동맹국으로서 신뢰할 수 있는 핵연료 운용국"임을 알리는 외교 활동을 전개했고, 미일 정상 간 채널을 활용해 협상에 정치적 무게를 더했다.
일본 전력회사들은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위한 실증 시설 건설에 투자했고, 재처리·농축 기술을 축적하며 미국 측에 "실행 가능한 능력과 준비가 돼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원자력연료사이클개발기구(PNC, 후에 JNC로 개편)는 연구 인력과 안전관리 체계를 강화해 협상의 신뢰성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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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의 한울원전5,6호기[사진=뉴스핌DB] |
◆ 新협정에서 '포괄적 사전동의' 확보
1982년부터 본격 재협상에 나선 일본은 1988년 개정된 미일 신(新)원자력협정에서 세계적으로 유일한 '포괄적 사전동의(advance programmatic consent)' 방식을 보장받았다.
포괄적 사전동의 방식이란 일본이 사전에 원자력 운용 시설과 범위를 미국과 협의해 정해 두면, 이후에는 개별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핵연료 주기 활동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방식을 통해 일본이 확보한 자율성은 다음과 같다.
▲재처리 권한: 일본은 자국 내에서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해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권한을 장기적으로 확보했다.
▲우라늄 농축 권한: 저농축 연료 생산을 포함한 농축 활동을 미국의 별도 동의 없이 수행할 수 있게 됐다.
▲MOX 연료 생산·사용: 재처리 과정에서 얻은 플루토늄을 혼합산화물(MOX) 연료로 제조해 자국 원전에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핵물질의 보관 및 제3국 이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등 조건을 충족하는 한,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자체적으로 보관하고 제3국으로 이전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시설 운용 및 설치: 사전에 프로그램(시설, 규모, 목적)을 미국과 약정하면, 그 범위 내에서는 모든 연구·개발·공업 활동을 자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즉, 일본은 국제 감시와 투명한 운용을 전제로 원자력 주기상의 핵심 기술과 물질을 사실상 독자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핵무기 비보유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플루토늄 재처리와 농축을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비핵국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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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왼쪽)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23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한일정상회담 공동언론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뉴스핌] |
한국 측이 원하는 협정 개정 방향은 바로 이 일본의 모델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한국과 미국 간에는 존재하고, 미국과 일본 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제한을 완화하거나 해제하는 것이다.
일본 사례가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우선 다자·양자 무대를 활용해 명분을 축적하고 국제사회를 설득해야 한다. ▲핵무기 개발과 무관하다는 '비확산 준수' 원칙을 투명하게 입증해야 한다. ▲정부·관료·산업계 등의 총력 대응이 필요하며 ▲장기간 협상을 인내하며 전략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한국의 협상 전략 역시 단순한 기술 논리가 아니라, 투명성과 책임성을 전제로 한 신뢰 외교가 될 수밖에 없다.
goldendog@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