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동명 고전 무대화
작품 탄생 당시와 달라진 사회상 와닿아
[서울=뉴스핌] 황수정 기자 =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는 절친 밧사니오의 결혼을 위해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1파운드의 살을 담보로 돈을 빌린다. 그러나 안토니오의 전 재산인 배가 모두 난파돼 기간 내 돈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샤일록은 증서 내용대로 이행하길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밧사니오의 아내 포샤의 도움으로 안토니오는 목숨을 구하고, 샤일록은 전 재산을 빼앗긴다.
뮤지컬 '베니스의 상인' 공연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
서울시뮤지컬단이 셰익스피어의 고전 '베니스의 상인'을 무대 위로 올렸다. 창작진은 탐욕의 상징인 샤일록의 내면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며 '지금 우리 시대의 샤일록은 어떤 인물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400년 전 원작과 비교해 거의 달라진 점이 없는 공연은 샤일록뿐만 아니라 모든 인물에 대해 의구심을 자아내고 돌아보게 만든다.
학창 시절 접했던 '베니스의 상인'은 악덕 고리대금업자의 횡포에 맞선 흡사 '솔로몬의 지혜' 같은 이미지였다. 그러나 2019년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베니스의 상인'은 너무나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재판 그 자체였다. 극을 보고 있자면 어째서 샤일록이 그토록 안토니오의 살을 원한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의 행동과 주장을 단순히 '탐욕'으로 설명하기엔 그 배경이 너무 복잡하다는 걸 그간 간과해왔음을 깨닫게 된다.
욕망의 대명사로 알려진 샤일록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리대금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베니스의 모든 시민에게 차별 당하며 살아왔다. 친구와 우정을 중시한 안토니오 또한 샤일록을 무시하고 욕한 인물 중 하나다. '베니스의 상인'이 탄생한 1596년은 반유대 감정이 팽배했던 시절이기에 당연한 설정이겠지만, 현재의 시선으로 보고 있기엔 그들의 무자비한 혐오가 불편하다.
뮤지컬 '베니스의 상인' 공연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
달라진 시대, 달라진 가치관은 고전이 담은 메시지를 전복시킨다. '1파운드의 살을 가져가는 대신 피는 흘릴 수 없다'는 기지는 궤변으로 느껴지고, 대신 돈을 받으려는 샤일록을 '외국인이 시민의 생명을 노리면 재산이 국가에 귀속된다'는 법으로 오히려 협박하는 것 같다. 애초에 샤일록이 법정에 들어설 때부터 공작, 판사 등 모두가 샤일록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강요한다. 과연 이것이 정당한 재판인가.
사건이 벌어지게 된 이유, 밧사니오가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허영과 사치 때문이었다. 재판이 끝난 후, 밧사니오는 "정의는 승리했다"고 말하지만, 안토니오는 "과연 그럴까"라고 반문한다. 그들에게는 정의였으나, 샤일록에게는 너무나 불합리했다. 법부터 기울어져 있는 상황에서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샤일록의 재판을 보면서, 오늘날 가해자에게 관대한 현재의 법, 죄에 비해 너무나 가벼운 형량에 분노하는 우리 모습이 겹쳐진다.
작품은 '청춘예찬' '대대손손' '경숙이 경숙 아버지' '너무 놀라지 마라' 등의 박근형 연출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메피스토' '베르나르다 알바' '광화문 연가' 등에 참여한 음악감독 23(aka 김성수)이 작곡과 작사를 담당한다. '웃는 남자' '킹아더' '지킬앤하이드' 등의 무대디자이너 오필영이 참여했다. 덕분에 화려한 무대와 웅장한 음악은 시종일관 시각과 청각을 사로잡는다.
뮤지컬 '베니스의 상인' 공연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
'샤일록' 역의 배우 김수용의 열연은 곧바로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분노, 집착, 좌절, 오열까지 변화무쌍한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소화한다. 다만 그 외의 캐릭터들은 개성이 강함에도 너무 평면적으로 그려져 아쉽다.
뮤지컬 '베니스의 상인'은 오는 6월 1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된다.
hsj1211@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