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SK하이닉스→美마이크론 임원 전직 제동
오는 7월부터는 정상근무 가능…기술유출 우려
[서울=뉴스핌] 김정인 기자 = 인공지능(AI) 시장 선점을 두고 치열한 레이스를 벌이고 있는 국내 반도체 업계의 엔진에 이상이 감지됐다. 기업체를 굴리는 핵심 동력인 기술·인력이 유출되기 시작한 것. 반도체 기술이 이젠 국가 간 패권 경쟁의 소재가 된 가운데, 기술과 인력을 두고 불법까지 마다않는 상황은 이제 국가적 문제가 됐다.
김정인 산업부 기자 |
특히 AI 시대를 맞아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고대역폭메모리(HBM) 기술을 두고 반도체 인력 유출의 실태는 명확히 드러났다. 서울중앙지법은 최근 SK하이닉스가 전직 연구원 A씨를 상대로 낸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며 위반 시 1일당 1000만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A씨는 SK하이닉스에서 20년 넘게 근무하며 HBM 사업 수석, HBM 디자인부서의 프로젝트 설계 총괄 등으로 업무를 해오다가 2022년 7월 퇴직했다. A씨는 SK하이닉스 근무 당시 '퇴직 후 2년간 동종업체에 취업하거나 용역·자문 계약을 맺지 않는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이후 이 연구원이 경쟁사인 마이크론으로 이직해 임원급으로 재직 중인 사실을 확인한 SK하이닉스는 지난해 8월 법원에 전직금지 가처분을 냈다. 그 결과 법원은 SK하이닉스의 손을 들어줬다. A씨의 전직금지 약정이 몇 개월 남은 상태에서 이직한 것에 법원이 제동을 건 것이다.
당장은 법원이 기술 유출에 일단 제동을 걸어둔 상태지만 A씨는 2년 약정이 끝나는 오는 7월부터는 마이크론에서 정상근무를 할 수 있다. 이때부터 HBM 관련 핵심 정보가 경쟁사로 넘어가면 SK하이닉스는 타격을 피할 수 없다.
가뜩이나 반도체 전문가가 부족한 상황이라 업계에선 인력난을 호소하고 있던 상황이다. 여기에 HBM 기술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핵심인력까지 유출되니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다. 지난해만 해도 반도체공장 설계도면과 공정배치도 등을 빼돌려 중국에 복제공장 설립을 시도하고, D램 공정 정보를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로 유출하는 등 여러 건의 반도체 기술 유출이 적발돼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먼저 솜방망이 처벌부터 고쳐야 한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1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1심 사건 총 33건 중 무죄(60.6%)와 집행유예(27.2%)가 87.8%를 차지했다. 이번 사건의 경우, 법원이 가처분으로 기술·인력 유출에 대한 처벌을 내린 셈이지만, 사실 하루에 1000만원을 지급하는 처분은 HBM 기술을 얻어와 수익을 창출하는 데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기술과 인력 유출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경제적 이익 또는 신념에 의거해 직장을 옮기는건 개인의 자유다. 다만 기업의 기술 유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사법적·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한 시점이다. 미국, 영국, 대만은 기술 유출을 반국가범죄·간첩죄로 규정해 중형에 처하기도 한다. 인력과 기술이 이렇게 쉽게 새어나가게 둬서는 안된다. 국가는 이제 솜방망이가 아닌 철방망이를 들고 반도체 기술과 인력을 지켜야 할 때다.
kji01@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