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최헌규 중국전문기자= 기자는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를 중국 현지에서 맞았다. 2024년 8월 24일 한중 수교 32주년을 맞은 지금 뒤돌아보면 당시 현지에서 목격했던 중국과 중국인들은 마치 신기루처럼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한중 수교 30주년(2022년 8월 24일)도 기자는 중국 현지 베이징의 조어대 국빈관 팡페이위안(17호각) 홀 기념식장에서 지켜봤다. 머릿속엔 계속 30년 전의 중국 잔상이 어른거리는데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봐도 현실엔 더이상 그런 나라가 없었다.
수교 초기 중국은 모든 산업에서 한국에 까마득히 뒤쳐졌다. 하지만 수교 30년, 아니 미중 패권경쟁이 치열하고 코로나가 창궐했던 최근 수년새 중국은 우리앞에 아주 낯선 나라로 모습을 바꿨다.
불모지였던 LNG 선박 건조 분야는 지금 수주에서 한국을 따돌리고 있다. 코로나 기간 중국은 유럽 등 몇몇 선진국들의 전유물인 대형 크루즈선까지 건조해 인도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 보잉과 유럽 에어버스 외에 어느 나라도 흉내를 못 내는 상업용 항공기(C919)도 제작해 국제인증을 마치고 상업 운항에 돌입했다.
국가 주도하에 수십조원의 반도체 펀드가 잇따라 조성되고, 시진핑 주석의 지시로 전국 대학 마다 반도체 학과가 신설됐다. 많은 수의 반도체 전공자들이 교문을 나와 산업현장에 발을 들이면서 중국 반도체 굴기에 속도가 붙고 있다.
샤오미의 기적처럼 언젠가 반도체 분야에서도 '대륙의 실수'가 재현될 것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온다. 비록 구형 노광기에 의존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미 중국은 7나노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다.
미국의 공세로 다소 주춤해진 감이 있지만 팍스시니카를 향한 질주가 걸음 자체를 멈춘 것은 아니다. 오늘날 중국 굴기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엔 복잡한 속내가 교차한다.
놀라움과 두려움, 그리고 질시와 같은 감정이 뒤엉켜 있다. 강대국을 향한 질주, 중국 굴기를 얕보고 외면하려는 정서도 강하다. 하지만 국익을 위해서는 비록 불편하더라도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중국을 오늘날처럼 강대한 나라로 만든 집단은 말할 것도 없이 현재 중국 대륙의 주인인 공산당이다. 공산당은 봉건 군벌 외세를 몰아내고 신중국을 세웠으며 오늘날 중국 굴기를 주도하면서 미국과 글로벌 패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현재 공산당의 중국은 미국과 마주앉아 미래 인류사회의 AI 안전을 논의하고, 저탄소 지구 온난화에 대해 미국보다 더 많은 염려를 하는 나라가 됐다. 웨스트조지아 대학 교수인 기자의 친구는 2024년 여름 서울에서 기자를 만나 중국은 쓰레기 분리수거 흉내라도 내지만 미국은 추접하다는 이유로 그냥 한꺼번에 폐기한다고 말했다.
중국 스스로 천지개벽이라고 하는 공산당 창당(1921년)은 이제 막 100년을 넘겼다. 공화당이나 민주당 같은 미국의 정당 역사에 비하면 두어 세대 차이가 나는 신생 정당이다. 하지만 압축 성장만큼이나 빠르게 국제 영향력을 키워 가고 있다.
[서울=뉴스핌] 최헌규 중국전문기자= 2024.08.24 chk@newspim.com |
대륙의 주인 공산당의 중국은 미국의 견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팍스시니카를 향해 계속해서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고 있다. 인구 14억명의 중국이 약 10년후인 2035년 선진국 대열에 발을 들여놓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중국의 이런 행보는 한반도의 운명을 향해 점점 더 거친 풍랑으로 다가오고 있다. 경제 성장률이 둔화되긴 했지만 중국은 여전히 위압적인 태세로 국가 대부흥의 시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공산당이 신중국을 세운 건 올해(2024년)로 75주년이다. 100년도 안 되는 이 짧은 시간에 중국 공산당은 무슨 재주로 이렇게 강한 나라를 만들었을까. 오랫동안 중국을 취재하면서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의문이다.
기자는 뉴스핌 통신사 특파원으로서 중국 현장을 취재하면서 그 궁금증을 단편적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기자의 생각에 공산당의 진정한 힘은 강한 경제나 인구, 군사력이 아니라 무섭도록 철저한 역사 기억에서 나오는 것 같다.
늘상 중국인들은 "우리는 역사를 스승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공산당 정권은 역사의 망각이 패망의 지름길이라며 끊임없이 국민 자각을 일깨운다. 공산당의 역사 기억엔 치열함이 번득이고 비장함이 서려 있다.
아편전쟁의 치욕, 30만 명 난징 대학살, 일본의 동아병부(东亚病夫, 아시아의 병자) 조롱과 서방 8개국에 의한 원명원의 방화 약탈이 중국에선 시퍼런 현재 진행형 역사다. TV에선 연중 항일, 항미 드라마가 끊이지 않는다. 이런 역사인식 앞에 잠자던 애국심이 깨어나고 내부 결속이 강화된다.
자꾸 강대해져 가고 있는 공산당의 중국과 이웃하고 있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적 운명이다. 중국이 싫다고 이사 갈 수도 없고 중국 굴기를 외면한다고 그 현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과거 일본의 글로벌 부상이 한창이던 시절 우리 사회에 '극일'이라는 얘기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주도적 우위를 유지하며 공존을 모색해 나간다는 의미였던 듯한데 지금 중국에 대응하는 데 있어 필요한 전략이 '극중'이 아닐까 싶다.
미중 패권 경쟁으로 살벌한 시대지만 잘만 대응하면 이는 기회 요인이기도 하다. 지혜만 있다면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굳히면서도 중국과 멀어지지 않는 실리 외교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미국과 친하다고 중국을 배척할 이유가 없고, 중국과 교류한다고 해서 미국과 소원해질 이유도 없다. 현실 외교엔 많은 제약과 어려움이 있지만 대한민국이 자주적인 주권 국가라는 점을 명심하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관리해 나가야 한다.
근린 국가로서 우리는 중국과 수천 년 동안 문화 인문적 가치를 공유해 왔다. 수교 32주년을 맞는 지금 한중 관계가 차갑게 식었지만 서울에선 중국 음식문화를 대표하는 마라탕과 탕후루 가게가 인기다.
최근들어 당국간 접촉과 문화, 예술, 학술 등 인문 분야 교류와 인적 왕래도 다시 늘어나고 있다. 지자체와 정부 관계자들이 오가고 수교 32주년을 맞아 한중 청년교류도 5년만에 재개돼 50명의 한국 청년들이 최근 중국을 방문했다는 소식이다. 서울을 찾는 중국 유커들이 늘고 코로나 전 인기였던 한국인의 장가계 여행도 차츰 회복되는 분위기다.
수교 32주년, 한중 양국의 새로운 관계 모색에 대한 기대와 도전이 교차하고 있다. 만시지탄이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한중 관계가 더 이상 멀어지지 않게 유효하게 관리를 하고 실용주의적인 중국 접근을 통해 상생의 접점을 찾는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서울= 최헌규 중국전문기자(전 베이징 특파원) chk@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