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황숙혜 기자 = 소위 '닥터 둠'으로 불리는 누리엘 루비니가 최근 폭락하는 암호화폐 시장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규제 완화와 정치적 후견을 등에 업고 날아오를 것처럼 보였던 비트코인과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그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칼럼을 통해 "혁명이 아니라 점진적 진화가 돈과 결제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며, 최근의 가격 폭락은 이 '유사 자산'의 본질적 취약성을 드러낸 경고음이라고 주장했다.
◆ '디지털 골드'가 아니라 레버리지된 위험 = 암호화폐 업계를 탐욕과 사기의 집합체라고 직격해 온 루비니는 먼저 '친(親)크립토' 성향이 가장 강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이 암호화폐에 어떤 기대를 불러일으켰는지 짚는다.
트럼프는 2024년 대선 당시 규제 완화를 약속하며 암호화폐 개인 투자자들에게 구애했고, 반부패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업계 내부자들로부터 막대한 정치 자금을 받았으며, 재선 이후에는 실제로 상당수 규제를 걷어냈다.
그 과정에서 스테이블코인 규제 법안인 GENIUS(미국 스테이블코인 혁신 촉진법)에 서명하고, 디지털 자산의 법적 지위를 명확히 한다는 명분의 CLARITY 법을 밀어붙였으며, 자신과 가족 이름을 딴 밈 코인을 홍보하고, 각종 의혹이 제기된 암호화폐 거래로 사적으로 이익을 챙겼다고 루비니는 비판한다.
테러 조직 지원 의혹을 받는 일부 암호화폐 범죄자 사면과 백악관에서 열린 업계 인사 초청 비공개 만찬까지 그는 이 모든 행보를 정치·개인적 이해관계와 얽힌 친크립토 포퓰리즘으로 읽는다.

당시 암호화폐 전도사들은 트럼프 2기를 '디지털 골드의 시대'로 포장했다. 루비니가 요약하듯, 이들 중 다수는 비트코인이 2025년 말까지 최소 20만 달러에 도달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미국과 주요국의 재정 악화, 달러 가치 희석 우려, 미·중 갈등과 중동 불안 등 각종 리스크가 금 가격을 끌어올렸고, 실제로 금은 2025년 한 해 60% 넘게 올랐지만 비트코인은 오히려 6% 하락했고 최근 고점 대비 30% 이상 밀리며 트럼프 당선 직전 수준 아래로 내려앉았다고 그는 상기시킨다.
뉴욕 소재 거시경제 컨설팅 업체 루비니 매크로 어소시어츠의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로 활동중인 루비니는 '디지털 골드'와 '위험 헤지 수단'이라는 암호화폐의 자기 서사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지정학적 충격이나 무역 마찰로 금 가격이 급등할 때마다 비트코인은 반대로 급락해 왔고, 실제로는 투기성 주식과 높은 상관관계를 보이는 레버리지 위험 자산일 뿐이라는 것이다.
트럼프·멜라니아 이름을 단 밈 코인이 95% 폭락한 사례는 이런 취약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으로 제시된다.
◆ 통화도, 자산도 아닌 '유사 자산' = 루비니의 칼럼은 암호화폐가 '통화'로서도, '자산'으로서도 자격이 없다는 논증으로 이어진다. 그는 통화의 세 가지 기능 즉 회계 단위와 교환 수단, 가치 저장 수단을 기준으로 할 때 암호화폐는 어느 하나도 만족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엘살바도르가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채택했지만, 실제 재화·서비스 거래에서 비트코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5%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낮다.
그는 암호화폐를 자산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고 말한다. 금·은은 산업적·장식적 실물 수요와 오랜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의 기능이 있지만 대부분의 코인은 현금흐름도, 실물적 용도도, 경제적 기능도 없다는 것이다.
비트코인 출시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암호화폐 영역에서 등장한 실질적 '킬러 앱'은 아이러니하게도 스테이블코인뿐이라고 그는 평가한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등 기존 명목 화폐에 가치를 연동한 일종의 디지털 현금에 불과하며, 금융·은행 시스템이 이미 수십 년 전 시작한 디지털화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루비니는 본다. 문제는 암호화폐 옹호자들이 이것마저 '탈중앙화 혁명'으로 포장하지만, 현실의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머니와 서비스의 95%는 이름만 블록체인일 뿐, 실제로는 사적·허가형·중앙집중형 시스템이라는 점이라고 꼬집는다.
그가 보기에 이 구조는 전통 금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거래 검증은 소수의 신뢰 기반 검증자에게 맡겨지고, 완전한 익명성과 '무허가(permissionless)' 특성을 내세우는 초기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루비니는 "진정한 탈중앙화 금융은 규모를 키울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어떤 책임 있는 정부도 통화·금융 거래의 완전한 익명성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는다. 그런 체제는 범죄자·테러리스트·불량국가·인신매매 조직·조세회피자에게 황금어장을 제공할 뿐이라는 이유에서다.
◆ GENIUS·CLARITY 무모한 실험 VS 규제 진전 = 루비니 칼럼의 두 번째 축은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한 두 개의 핵심 법안, GENIUS 법과 CLARITY 법에 대한 비판이다. GENIUS 법은 미국 연방 차원의 첫 스테이블코인 규제 프레임워크로, 발행 주체·준비자산·공시 기준 등을 규정하고 1대1 준비금 요건을 요구하는 등 업계에서는 "규제 명확성의 진전"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루비니는 이 법이 19세기 자유은행 시대와 유사한 '파괴적 실험'을 다시 여는 장치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의 핵심 문제의식은 두 가지다. 첫째, 스테이블코인이 '좁은 의미의 은행(narrow bank)'으로 규제되지 않아 예금·결제가 위험한 대출·투자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둘째, 중앙은행 최후의 대부자 기능과 예금보험 시스템에 접근하지 못하는 구조라는 점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몇몇 발행사가 준비금을 잘못 운용하거나, 실리콘밸리은행처럼 취약한 금융기관에 자금을 맡기는 것만으로도 시장 공포와 뱅크런이 촉발될 수 있다고 그는 경고한다. 루비니는 이를 '트럼프의 탐욕과 무지, 그리고 암호화폐 업계의 부패한 영향력 행사의 산물'이라고 규정하며, 현재 미국의 접근법이 금융·실물경제 불안정의 레시피가 될 수 있다고 날을 세운다.
CLARITY 법을 둘러싼 전통 은행과 암호화폐 업계의 충돌도 그의 포화 대상이다. 이 법은 디지털 자산의 법적 성격과 인프라 역할을 명확히 한다는 취지지만, 실제 논쟁은 결제와 신용 창출의 구조를 어디까지 바꿀지에 걸려 있다.
루비니는 부분지급준비제도에서 은행이 단기 예금을 장기 대출로 전환하는 '만기 변환'을 통해 결제와 신용 창출을 동시에 담당하며, 그 자체가 중요한 준(準)공공재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스테이블코인에 이자를 허용하면 사실상 '통화와 거의 같은 성격의 단기 예금'에 이자를 붙여 주는 셈이 되어 은행 시스템의 토대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결론적으로 그는, 스테이블코인이 이자를 지급하며 은행을 우회하는 것을 막거나 아니면 아예 결제와 신용 창출을 제도적으로 분리하는 근본적 금융개혁(좁은 의미의 결제은행과 별도의 대출·신용 공급 기관)을 택해야 한다는 양자택일을 제시한다.
◆ "혁명은 없다, 진화만 있을 뿐" = 칼럼 말미에서 루비니는 다시 초점으로 돌아간다. 돈과 결제의 미래는 전통 금융의 완전한 붕괴와 암호화폐의 승리라는 서사가 아니라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실시간 결제 인프라, 개선된 원장 시스템 등을 통한 점진적 진화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허가형·사적 블록체인이 AML/KYC 의무를 피할 수 없고, 전통 금융의 디지털화 수준이 이미 상당히 높아진 만큼, 블록체인을 사용하는 것이 거래 비용을 자동으로 낮춰 주지도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 맥락에서 최근 비트코인과 기타 암호화폐의 급락은 이 자산군이 본질적으로 극단적 변동성과 투기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재확인해 주는 또 하나의 사례로 해석된다.
마지막으로 루비니는 제이미 다이먼과 브라이언 암스트롱을 각각 소환한다. JP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이 암호화폐 업계가 요구하는 제도 변경이 금융안정에 미칠 파급효과를 경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코인베이스 CEO 브라이언 암스트롱이 이런 우려를 가볍게 치부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못 박는다.
트럼프가 만약 암호화폐 자금으로 오염되지 않은 참모를 곁에 두고 있다면, 그들이라도 은행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대통령에게 제대로 설명해 금융 시스템의 토대를 지키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쓴소리다.
루비니는 재무장관 스콧 베선트의 이름을 직접 호명하며 "듣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암호화폐에 대한 그의 독설은 이번에도 예외 없이 강렬하지만, 동시에 트럼프 2기에서 진행 중인 스테이블코인·디지털 자산 규제 실험이 어디까지 시스템 리스크로 번질 수 있는지를 둘러싼 논쟁의 불씨를 다시 키우고 있다.
shhwang@newspi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