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데뷔로 강력한 후계 시그널
김주애 '유력'→'확실'로 옮겨 가는 듯
北주민에 세습은 깨어나지 못할 악몽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이달 초 북한 김정은이 자신의 딸 주애를 데리고 베이징역에 나타난 건 뜻밖이었다. 설마하며 주시하기는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고 보니 정치(精緻)한 분석을 내놓기 쉽지 않다.
12살 어린아이를 성장(盛裝) 시켜 의전서열 2위에 자리하도록 했으니 의장대까지 거느리고 붉은 카펫이 깔린 플랫폼에 마중 나온 차이치(蔡奇) 공산당 서기와 왕이(王毅) 외교부장 등 중국 측 고위인사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듯싶다.
![]() |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사실 김주애가 북한의 차세대를 이끌 후계자로 떠오르고 있다는 관측에 대해서는 대북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해왔다. '여자가 어떻게 북한 최고지도자가 되느냐'는 반문도 컸다.
필자 또한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던 게 솔직한 심정이다.
집권 15년차에 접어든 노회한 정치지도자인 것처럼 비춰지지만 김정은의 나이는 이제 41살에 불과하다. 청년지도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니 불혹을 넘긴 나이면 중견이 아니겠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60세까지는 통치를 이어갈 것이란 점에 비춰볼 때 후계 문제를 띄우는 건 일러도 너무 이른감이 있다.
3년 전 뜬금없이 시작된 김정은의 후계놀음은 설왕설래를 부채질 했다. 워낙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보니 그저 '딸 바보 김정은의 자랑질' 정도로 여겨졌고, 그러다 말겠지 하는 느낌도 있었다.
그런데 김정은의 후계자 띄우기는 거침없이 이어졌다. 주애를 수식하는 관영 선전매체의 표현은 '사랑하는 자제분'에서 '존귀하신 자제분'으로 옮겨갔다.
급기야 그녀를 군사 퍼레이드의 VIP석을 의미하는 주석단 중앙에 자리하게 했고, 군부 원로 간부들이 거수경례를 올렸다. 열병식에 참가한 군인들은 그 앞을 '백두혈통, 결사옹위'를 외치며 행진했다.
사정이 이쯤 되고 보니 혹 김정은 건강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까지 치닫게 됐다. 남들 모르는, 얼마 살지 못하는 병에 걸려 후계 문제를 서둘러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란 추론이다.
실제로 '움직이는 종합병동'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김정은의 건강은 말이 아니다. 베이징 중국 전승절 80주년 행사에 참석해 텐안먼(天安門) 망루에 오를 때 그는 말수가 적어졌고 가쁜 숨을 쉬었다.
같은 날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장에서는 굵은 땀방울을 흘리는 그의 모습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됐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과 러시아의 경호원이 회담장 에어컨의 온도조절기를 두고 신경전을 펼친 대목도 미심쩍다. 푸틴의 경호원이 20도에 맞추려 하는 걸 김정은 측이 23도로 올리려 들면서 양측은 서로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더워서 땀을 흘리면서도 에어컨을 세게 틀면 안 되는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외부로 드러나는 김정은의 전반적인 건강상태로 볼 때 유고상황이 임박했다거나 이를 대비해 후계 문제를 서둘러야 할 정도의 상황은 아닌 게 분명해 보인다. 아무리 140kg의 고도비만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40대 초반 청년지도자의 건강을 두고 '급사'나 '유고' 운운하는 건 무리수일 수 있다.
이럴 때는 어설픈 퍼즐 조각 맞추기나 속칭 '뇌피셜' 보다는 대북 정보기관의 판단에 귀 기울여 보는 것도 현명한 선택이다. '그 밥에 그 나물' 형국의 언론 보도나 백가쟁명(百家爭鳴)식 전문가 의견에 휘말려 미궁에 빠지기 보다는 훨씬 나아 보인다.
![]() |
[서울=뉴스핌]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일 오후 전용열차 편으로 베이징역에 도착해 중국 측 인사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김정은 뒤편으로 딸 주애(붉은 원)와 최선희 외무상이 보인다. 김주애가 해외 방문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사진=조선중앙통신] 2025.09.10 yjlee@newspim.com |
무엇보다 우리 국가정보원이나 미국 중앙정보국(CIA)는 공개되지 않은 대북 첩보나 위성 등을 통한 감청정보, 그리고 휴민트(Humint) 망을 통해 입수된 고급 정보를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 과거 김정일(2011년 12월 사망) 국방위원장의 후계 문제가 거론될 때 주요 변곡점마다 마일스톤(milestone)을 세워 준 게 한미 정보당국의 관련 대북정보였다.
그런 국정원이 지난해 7월 국회 정보위에 "북한은 김주애를 현시점에 유력한 후계자로 암시하며 후계자 수업을 진행 중"이라고 보고했으니 상황은 많이 기울어진 듯 싶다. 김정은이 사실상 4대 세습을 위한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중국 전승절 80주년 행사 참석은 김정은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이 따르는 자리였다. 그가 집권 이후 처음으로 다자 정상외교 무대에 선다는 점에서다.
그런데도 어린 딸을 내세우는 결정을 했다는 건 체제 내부에서의 후계 분위기 띄우기를 넘어 국제사회에 보란 듯이 이를 알리려 한 것임을 함의한다. 어쩌면 시진핑과 중국 지도부에게 '알현' 성격의 인사를 시키려는 의도일 가능성이 있다.
베이징 데뷔를 통해 딸 주애를 김정은 후계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은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선거 개표방송으로 치면 '유력'에서 '확실'로 막 넘어가는 단계에 접어든 형국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다. 주애의 후계 가능성이나 아들이 있느냐 없느냐를 둘러싼 논란, 왜 김정은이 서두를까 하는 의문 등에 매몰돼 북한 4대 세습이란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한 경계와 비판이 헙수룩해지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말로는 '인민주권'과 '민주공화국'을 부르짖으면서 김일성 일가는 80년 세습통치를 이어가고 있다. 그 사이 2500만 주민들은 지옥과 같은 삶을 대(代)를 이어 강요당했고, 국제사회도 가장 폭압적인 정권으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지구상 인터넷이 전무한 유일한 체제인데다 외부정보의 유입마저 철저히 틀어막고 있으니 평양판 갈라파고스(Galapagos Islands) 그 자체다. 정권의 탄생부터 허구이고 최고지도자 우상화의 소도구들 또한 거짓과 과장이지만 자유언론과 야당‧노조 등이 없는 민주와 인권의 불모지이니 방도가 없다. 사소한 균열도 차단하는데 체제의 명운을 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입담 좋은 호사가들이 안줏거리로 삼을 법한 북한의 세습 에피소드가 그 누구에게는 더 이상 참기 힘든 하루하루가 연장되는 무한루프이자 깨어나기 어려운 악몽일 수 있다.
yjlee@newsp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