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파편화: 산업·공급망·에너지 질서가 다시 짜인다
지역·섹터 전략: 미국 중심축 유지… 아시아·신흥국 구조적 기회 부상
[서울=뉴스핌] 고인원 기자= 2026년을 바라보는 월가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의 시각은 놀라울 만큼 한 방향으로 수렴한다.
▲인공지능(AI) 혁명이 전 세계 생산성과 기업 이익 구조를 다시 짜고 있고, ▲인플레이션은 팬데믹 이전처럼 쉽게 꺼지지 않는 '뉴노멀' 구간에 들어섰다. 여기에 미·중 갈등을 축으로 한 ▲글로벌 파편화가 산업과 공급망, 에너지 질서를 동시에 재편하면서 세계 자본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것이 공통된 진단이다.
IB들은 이 세 가지 구조 변화 속에서 투자자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성장주 베팅이 아니라, 성장성과 방어력, 그리고 충격에 대한 회복력을 동시에 갖춘 포트폴리오라고 강조한다.

◆ AI: "초기 투자 사이클은 끝"… 생산성과 수익화가 이끄는 2단계 성장
무엇보다 AI는 월가가 꼽는 1순위 구조 테마다. 생성형 AI 투자 사이클은 이미 초기 장비투자 국면을 지나, 기업들의 실제 생산성 개선과 비용 절감에 기여하는 '수익화 단계'로 진입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UBS는 최근 내놓은 2026년 전망 보고서를 통해 견조한 AI 자본 지출 덕분에 지난 3년간 나스닥이 107% 상승했다고 짚으면서, 2026년 AI 관련 자본 지출이 5710억 달러, 2030년까지 누적 4조7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내다본다.
현재는 자본 지출이 수익화보다 앞서는 전형적인 도입기 패턴이지만, 사용자가 기술에 익숙해질수록 기술 기업들이 가격 결정력을 회복하고 이익이 따라붙는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피델리티는 이제 반도체·하이퍼스케일러만 사들이던 '묻지 마 AI 투자' 시대는 끝났다고 진단한다. 대신 통신, 금융, 유통 등 비(非)기술 섹터에서 AI를 활용해 운영 효율성을 실질적으로 끌어올리는 기업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들의 이익 레버리지에 주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JP모간은 2026년 AI 전략으로, ① 마이크로소프트·알파벳 등 고성장과 잉여현금흐름 회복력을 겸비한 대형 기술 리더에 대한 집중, ② 전력·반도체·냉각·광섬유·구리·희토류 등 인프라 병목을 해소할 '촉진자' 기업 발굴, ③ AI를 통해 실제 매출과 이익을 키우는 '스마트 사용자'(금융·소프트웨어), 그리고 ④ 오픈AI·앤트로픽 같은 비상장 초기 혁신기업에 투자하는 사모·VC시장 등 4개 축으로 구분해 접근할 것을 제안한다.
AI는 더 이상 반도체 몇 종목에 그치는 테마가 아니라, 에너지·전력·금속·데이터 인프라까지 아우르는 초거대 생태계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 글로벌 파편화: 산업·공급망·에너지 질서가 다시 짜인다
두 번째 축은 글로벌 파편화다. 미·중 경쟁 심화는 글로벌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AI 장비, 배터리, 전력망 장비 등 전략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와 수출 통제, 보조금, 정부 지분 인수 등 사실상 '국가 주도 산업 전략'을 총동원하고 있다. 기업들은 비용이 다소 높더라도 동맹국 중심의 공급망으로 돌아오는 리쇼어링·프렌드쇼어링 흐름을 따르고 있고, 이런 재편은 인도·멕시코·동남아 등 새로운 생산 거점을 부상시키고 있다. 이 과정에서 투자 기준도 '가격과 효율성'에서 '안보와 회복력, 지역적 정렬'로 옮겨가고 있다.
글로벌 파편화의 가장 민감한 전선은 에너지와 전력이다. 유럽은 러시아산 가스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LNG(액화천연가스) 인프라를 공격적으로 확충했지만, 그 대가로 에너지 비용 구조 자체가 한 단계 올라섰다. 미국과 아시아에서는 원전과 전력망 현대화, 에너지 저장장치(ESS) 투자가 가속화되고 있다. 여기에 AI 데이터센터의 폭발적인 전력 수요가 더해지면서, 에너지는 단순한 경기 민감 인프라가 아니라 국가 안보를 좌우하는 '전략 자산'으로 재규정되고 있다.
UBS는 2035년이 되면 미국 전체 전력 사용량의 9%가 AI 데이터센터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미 미국 전력망에는 5년 치 주문 잔고(backlog)가 쌓였고, GPT-5는 GPT-4보다 프롬프트당 에너지를 2.5배 더 많이 소모한다. 데이터센터 냉각에 필요한 물 부족과 지역 주민 반대는 아마존, 구글 등의 프로젝트 취소나 지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지정학적 갈등과 AI 확산이 맞물리면서 에너지와 원자재는 구조적 공급 부족 국면으로 진입했다는 판단이 월가의 컨센서스다. 탈탄소 전환, 전기화, 재생에너지 확대가 장기적으로 화석연료 수요를 잠식할 것이라는 중장기 담론과는 별개로, 현실의 투자 시점에서는 과도기적 공급 제약과 시설 투자 부족이 에너지 가격의 하단을 떠받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구리·리튬·니켈·희토류 등은 AI 인프라와 전기차, 배터리, 송배전, 태양광 등 거의 모든 전기화 트렌드의 공통 분모다. 장기 수요는 가파르게 늘어나지만, 광산 개발과 정제 능력 확충이 규제·환경 이슈로 막혀 있어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월가 IB들은 구리 가격이 톤당 1만3000달러 이상으로 올라설 가능성을 거론하며 관련 광산·소재 기업과 ETF를 유망한 포트폴리오 구성 요소로 제시한다.
에너지 지도의 재편은 남미의 위상도 끌어올리고 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등은 리튬·구리·은 등 핵심 자원을 보유한 덕분에 지정학적 위험 헤지 수단이자, 선진국 대비 약 10배 수준의 선행 주가수익비율(P/E)을 제공하는 저평가 지역으로 조명받고 있다. 글로벌 파편화와 에너지·원자재 강세는 결국 하나의 축 위에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 인플레이션의 뉴노멀: 금리·물가의 고착화, 자산 가격의 재평가
세 번째 축은 인플레이션의 고착화다. 월가 IB들은 팬데믹 이전의 낮은 물가와 제로 금리 시대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지정학적 리스크, 에너지 전환 과정의 구조적 비용 증가, 선진국 재정지출 확대, 기후 규제로 인한 탄소 비용 등 여러 요인이 겹치면서 물가는 과거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안착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JP모간은 이를 뒷받침하는 요인으로 소비자와 기업의 가격 인상 수용도 상승, 팬데믹 이후 50% 이상 늘어난 미국 가계 순자산과 17조 달러에 달하는 주택 자본, 안보 우선 공급망 재편으로 인한 '회복력 프리미엄', 기후 변화와 규제가 만드는 비용 상승, 그리고 G7 대부분 국가에서 확대된 재정적자를 제시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정책금리가 단기간에 크게 떨어지기 어렵고, 최소한 2026년까지는 실질금리가 과거 평균을 웃도는 수준에서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고밸류에이션 성장주보다는 안정적 현금흐름을 제공하는 채권, 인프라, 원자재 자산의 상대 매력을 끌어올리는 요인이 된다.
이런 거시 환경 변화 속에서 채권 시장은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2022년 인플레이션 쇼크는 전통적인 주식–채권의 음의 상관관계를 깨뜨렸지만, 물가 상승률이 3% 안팎으로 내려오고 임금 상승률이 3.5% 수준에서 안정되면서 채권의 방어력과 인컴 기능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UBS는 채권의 연간 총수익률이 중간 한 자릿수(약 5%) 수준에서 견조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정부 부채 부담을 감안하면 국채보다는 유럽 투자등급(IG) 회사채가 더 건전한 펀더멘털과 높은 수익률을 동시에 제공하는 매력적인 대안으로 거론된다.

◆ 지역·섹터 전략: 미국 중심축 유지… 아시아·신흥국 구조적 기회 부상
주식·채권을 넘어 지역별 자산 배분에서도 뚜렷한 편차가 나타난다. 미국은 여전히 글로벌 증시의 중심축으로, 월가는 2026년 S&P 500의 주당순이익(EPS)이 10% 증가하고 지수가 7700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기술·유틸리티·헬스케어·은행이 중심 축이다.
신흥국(EM)은 구조적 달러 약세의 최대 수혜자로 꼽힌다. 인도·멕시코·동남아는 공급망 재편의 최대 수혜지, 한국·일본은 지배구조 개편과 '밸류업' 정책으로 밸류에이션 매력이 높아지고 있다. 중국 기술주는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심하게 할인된 섹터로, 리오프닝 지연과 규제 리스크를 상당 부분 가격에 반영한 상태에서 재평가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월가 IB들이 그리는 2026년 투자지형의 메시지는 결국 하나로 수렴한다. AI 확산, 인플레이션 고착화, 글로벌 파편화라는 세 가지 구조 변화가 세계 경제와 자본시장의 '새 헌법'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 틀 안에서 투자자는 AI 수혜 기업과 인프라, 전력·원자재·핵심 광물, 우량 회사채, 그리고 구조적 성장 요인을 갖춘 신흥국 시장을 조합해 성장성과 방어력을 동시에 갖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AI 차질, 부채와 인플레이션 재점화 같은 핵심 리스크에 대비해 충분한 유동성(현금), 품질 좋은 채권, 금(Gold)을 갖춰두는 것이 필수적인 안전장치라는 점도 IB들은 한목소리로 강조하고 있다.
koinwon@newspim.com













